漢詩 I

강에는 눈만 내리고(江雪) - 유종원(柳宗元)

코알라 아빠 2020. 11. 11. 23:25

비운의 팔사마를 버티게 한 것은...

 

강에는 눈만 내리고(江雪)

                                     -유종원(柳宗元)

 

산이란 산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千山鳥飛絶)

길이란 길에는 사람 자취 끊어졌는데(萬徑人踪滅)

외로운 배에는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孤舟簑笠翁)

홀로 낚시질, 차가운 강에는 눈만 내리고(獨釣寒江雪)

 

 

윤제홍, <한강독조도>, 20×27cm. 종이에 연한 색, 개인

 

올 겨울에는 눈이 참 많이 내린다. 바람도 매섭다. 오지 마을에 좌천되어 갇혀 지내다시피 살다 보니 어려운 살림에 마음까지 얼어붙는다. 못난 아들을 따라 나선 어머니는 바뀐 물 때문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의 병이 어찌 물 때문이겠는가. 네 살 때부터 공들여 교육시킨 아들이 성공하는가 싶었는데 궁벽한 시골로 쫓겨난 까닭에 마음의 병을 얻으셨을 것이다. 유종원(柳宗元:773-819)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환관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감히 젊은 혈기 하나 믿고 맞섰단 말인가. 권력유지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독종들한테서 군 통수권을 빼앗겠다고 했으니 바보처럼 가만히 앉아서 당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결국 개혁을 주장하던 왕숙문(王叔文)은 사형을 당했다. 유종원과 마음을 나누던 벗 유우석(劉禹錫)은 낭주로 유배되었고 한태(韓秦), 한엽(韓曄), 진동(陳諌), 능준(凌准), 정이(程異), 위집의(韋執宜) 등도 모두 사마(司馬)라는 직책을 받고 벽촌으로 쫓겨났다. 기득권 세력과 맞서 싸우다 변방으로 쫓겨난 이들을 가리켜 사람들은 팔사마(八司馬)’라 불렀다.

 

진짜 어부와 가짜 어부

쌓인 눈 위에 또 다시 눈이 내린다. 가난한 사람에게 겨울은 더 이상 낭만을 즐길 수 있는 관념적인 계절이 아니다. 생존을 위협 받는 두려움이다. 서른 셋에 영주(永州:호남성 영주시)에 폄적된 유종원은 겨울 추위를 고스란히 맞으며 지난 시간을 돌이켜본다.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개혁에 뛰어들었으니 실패했어도 후회는 없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무참히 꺾인 것이 아쉬울 뿐이다.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새 한 마리 날지 않을 만큼 적막하다. 워낙 후미진 시골이다 보니 친하게 지냈던 사람조차 찾아올 엄두를 내지 못한다. 길은 뚫렸으나 사람의 자취가 끊어진 지 이미 오래. 계속된 눈으로 길마저 흔적이 사라졌는데 또 다시 눈이 내린다. 멀쩡한 사람을 오도 가도 못하게 가둬버린 눈은 팔사마의 의지를 잘라 내고 몰아세운 환관들의 권력만큼이나 철저하고 강고하다. 그 눈 속에서 늙은이가 홀로 낚시질을 한다. 도롱이에 삿갓만 쓰고 강바람을 맞으며 낚시질을 한다.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앉아 있는 낚시꾼은 유종원 자신이다. 그는 영주에서 10년을 견뎠다. 견디는 시간동안 공부하며 시를 썼다. 시를 쓰는 시간은 기다림의 시간이다. 언 강을 깨뜨리고 늘어뜨린 낚싯줄에 물고기가 걸리기를 기다리듯 시는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의 끝에서 강설같은 대어(大魚)가 낚였다. 10년의 기다림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옛 그림이나 시에 등장하는 어부는 대부분 생업으로써 낚싯줄을 드리운 진짜 어부가 아니다. 가짜 어부다. 그들은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앉아 빈 말로 어부가 되고 싶다고 고백한다. 찬물에 짚신이 젖어 동상이 걸리면서도 물을 떠날 수 없는 고생스런 어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들에게 어부는 관념적인 은둔의 세계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고려 말의 문장가 이곡(李穀:1298-1351) 강천모설도(江天暮雪圖)에 제하다라는 시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먼지 자욱한 도성 거리 한낮의 뜨거운 태양(九陌紅塵午日烘)

문 닫고 그림 보니 한없이 생각이 펼쳐지네( 閉門看畫意無窮)

어느 때나 외로운 배에 이 몸을 싣고 가서(何時着我孤舟去)

강천의 저녁 눈발 속에 혼자 낚시해 볼거나(獨釣江天暮雪中)

 

순 엄살이다. 그가 바라는 낚시는 잠시 휴가 가서 즐기는 고상한 취미생활이다. 유종원이 지향하는 낚시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유종원의 강설을 들먹거리며 자신과 같은 취향이라며 반색을 한다. 유종원이 들으면 서운할 말이다. 그의 낚시질은 과시형 은둔이 아니다. 강제된 유폐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잃지 않으려는 고독한 자기확신에의 실천이다. 유종원은 영주에서 10년을 보내고 다시 유주자사(柳州刺史)로 파견되어 마흔 일곱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변방을 전전하며 백성들을 위해 고심하느라 취미생활로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던 관리였다. 자기보다 더 먼 황폐한 땅으로 떠나는 친구 유우석을 위해서는 유배지를 바꾸어 주도록 진정서를 낼 정도로 의리 있는 사람이었다. 한유(韓愈:768-824)는 유종원의 묘지명에 이렇게 적었다.

선비는 어려울 때 비로소 그의 절개와 의리를 알 수 있다.”

 

유배를 가 본 사람만이 유배 간 사람의 마음을 안다

유종원의 추위를 학산(鶴山) 윤제홍(尹濟弘:1764-?)이 그렸다. 그렸다기보다는 유종원과 겨울 강변에서 나눈 대화를 전해주는 느낌이다. 그림은 한쪽으로 쏠려 있다. 전경에는 바위틈 사이에서 자란 두 그루 소나무가 서 있고, 뒤로는 허물어질 듯 눈을 뒤집어 쓴 가난한 집이 육중한 바위를 의지해 들어앉아 있다. 저 멀리 눈 덮힌 산자락에도 영세한 집들이 나무 뒤에 숨어 강바람을 피한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 속에 움직이는 물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강 위에 떠 있는 조각배조차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사람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만큼 고요하다. 윤제홍은 붓을 내려놓을 때까지 흔들리는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듯 붓질이 흐릿하다. 지푸라기에 먹을 묻혀 겨우겨우 그린 듯 간신히 윤곽선만 드러날 정도다. 그림에 비해 제시는 지나치게 반듯하다. 아니라고, 흔들리는 사람은 화자(話者)인 유종원이 아니라 전달자인 자신의 마음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유종원의 싯귀절은 예서로 적었다. 조각도로 판 것처럼 또박또박 새겼다.

대사간을 지낸 윤제홍은 19세기에 활동한 문인화가로 이색화풍(異色畵風)의 시조로 불릴 만큼 참신하고 담백한 그림을 그렸다. 특히 손을 붓 삼아 그리는 지두화(指頭畵)에 뛰어났다. 그는 노론계 인사들 뿐만 아니라 여항문인(閭巷文人)들과도 폭 넓게 교유할 만큼 열린 사고의 소유자였다. 여러 신분의 화가들이 그린 고산구곡시화병(高山九曲詩畵屛) 4(四曲) <송애(松厓)>를 그린 사람이 윤제홍이다. 그의 정치적인 여정은 결코 편안하지 못했다. 38세에 사간원 정언(正言)이 된 이후 77세까지 7차례에 걸쳐 복직과 파직을 되풀이할 정도로 부침이 심했다. 그는 굴곡이 심한 관로의 마디마디에서 방점을 찍듯 그림을 그렸다. 가는 곳마다 붓을 들어 기행사경도(紀行寫景圖)’를 남겼다. 청풍에서는 <한벽루> <옥순봉>, 제주도에서는 <한라산> <방선문>을 그리며 자신의 감회를 담았다. 그런 사람의 손에서 <한강독조도(寒江獨釣圖)> 같은 흐릿한 작품이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화풍은 정갈하다. 이 작품이 가짜가 아니라면 윤제홍이 자신의 개성을 버리고 유종원의 시에 녹아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배 때문에 유종원은 시를 건지고 윤제홍은 그림을 얻었다. 그들이 붓을 들어 시 쓰고 그림 그린 뜻이 은거에 대한 관념적인 환상이었다고 왜곡된다 해도 그들은 괘념치 않을 것이다.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충분히 고통스럽고 암담하고 행복했으므로 더 이상 미련도 아쉬움도 없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운명처럼 독자적인 길을 걸어간다. <한강독조도>도 예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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