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 I

魚父辭(어부사)- 굴원(屈原)

코알라 아빠 2020. 11. 17. 18:31

굴원(屈原)의 魚父辭(어부사)

 

屈原旣放 굴원기방                   굴원이 이미 (관직에서) 쫒겨나

游於江潭 유어강담                    강과 호수를 떠돌아 다닐 때

行吟澤畔 행음택반                   시를 읊으며 연못 가를 거닐고 있었다.

顔色憔悴 안색초췌                   안색이 초췌하고

形容枯槁 형용고고                      몰골은 야위었다.

漁父見而問之曰 어부견이문지왈     어부가 보고 묻기를         

子非三閭大夫與 자비삼려대부여      "그대는 삼려 대부(재상)가 아니시오? 

何故至於斯 하고지어사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이곳에 온 것이오?"

屈原曰 굴원                      굴원이 이르기를

 

擧世皆濁我獨淸 거세개탁아독청     "세상이 모두 흐린데도 나 혼자 맑았고

衆人皆醉我獨醒 중인개취아독성     모든 사람이 다 취해 있어도 나 혼자는 멀쩡했는데

是以見放 시이견방                     이리하여 보시다시피 쫓겨났다오"

 

漁父曰 어부왈,                         어부가 말하기를,

聖人 성인                                  "성인은

不凝滯於物 부응체어물,              무엇에든 엉기거나 막히지 않으며

而能與世推移 이능여세추이.         세상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할 수 있다오.

世人皆濁 세인개탁,                      세상 사람이 모두 마음이 흐리다면 

何不淈其泥 하불굴기니                        어찌하여 진흙탕 물을 흔들어

而揚其波이양기파.                         그곳에 파도를 일으키지 않았소?

衆人皆醉 중인개취,                    모든 사람들이 모두 취했다면

何不餔其糟 하불포기조                 어찌 그 술지게미를 먹지 않으며

 이철기리                     그 지게미 물이라도 마시지 않았소? 

何故深思高擧 하고심사고거,           무슨 까닭으로 생각은 깊게 하고 행동은 고상하여

自令放爲 자령방위.                       스스로 쫓겨나도록 만들었소?"

屈原曰 굴원,                            굴원이 말하기를,

吾聞之 오문지.                             "내가 듣기로는

新沐者必彈冠 신목자필탄관,            '새로 머리 감은 자는 반드시 관을 털고,

新浴者必振衣 신욕자필진의.           새로 목욕한 자는 반드시 옷을 턴다'고 했거늘

安能以身之察察 안능이신지찰찰,       어찌 깨끗한 몸에

受物之汶汶者乎 수물지문문 자호.      더러워진 물건을 댈 수 있으랴?

寧赴湘流 녕부상수                    차라리 상수(동정호로 흘러가는 강)에 몸을 던져

葬於江魚之腹中 장어강어지복중,       강 물고기의 밥이 될지언정, 

安能以皓皓之白 안능이호호지백,       어찌 깨끗하게 흰 것을 

而蒙世俗之塵埃乎 이목세속지진애호.  어지러운 세속의 먼지로 뒤덮이게 하랴?"

 

漁父莞爾而笑 어부완이이소,              어부가 빙그레웃고는

而去          고예이거.                   노로 장단 맞춰가며 떠나면서

乃歌曰 내가왈,                               노래부르기를

滄浪之水淸兮 창랑지수청혜,             '창랑의 물결 맑으면

可以濯吾纓 가이탁오영.                   내 삿갓 끈 빨 수 있을 것이고

滄浪之水濁兮 창랑지수탁혜,             창랑의 물결 흐리면

可以濯吾足 가이탁오족.                    내 발 정도는 씻을 수 있으리니...' 

遂去不復與言 수거불부여언               마침내 가버리니 더는 함께 말을 나누지 못했다.

 

潭; 못 담. 吟; 읊을 음, 澤; 못 택, 畔; 밭두둑 반 憔; 수척할 초, 悴; 파리할 체

枯; 시들 고 槁; 마를 고 閭; 마을 려, 醒; 깰 성 凝; 엉길 응, 滯; 막힐 체,

推; 밀 추()  淈; 흐릴 굴,  泥; 진흙 니 揚; 날릴 양, 餔; 새참 포, 糟; 지게미 조

歠; 마시다, 핥아먹다 철, 釃; 술 거를 시(묽은 술 리) 振; 떨칠 진, 察; 볼 (찰)

安能; 어찌 ~할 수 있겠는가. 汶; 더러울 , 赴; 나아갈 부, 湘; 강 이름 상,

皓; 흴 호, 蒙; 어릴 몽, 塵; 티끌 진, 埃; 티끌 애 莞; ()골 완 爾; 너 이,

鼓; 북, 두드릴 고, 枻; 도지게 설, 노 예 濯; 씻을 탁, 纓; 갓끈 영

 

굴원(屈原) (

(병) Qu Yuan (웨) Ch'ü Y üan(BC 343 ~ 289). 이름은 평(平). 원(原)은 자. 정치가이자 애국시인인

그는 경 양쯔 강[揚子江] 중부 유역의 대국 초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났다. 이 때는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이 극심했던 시기 중 하나인 전국시대 중반이다. 당시 중국의 정세는 기원전 4세기 중엽 상앙을

기용하여 세계 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개혁 중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법치주의제도'를 통해 국가의

면모를 일신한 진나라가 부국강병을 이루어 전국 7웅 중 가장 강력한 무력을 갖춘 때이다.

 

이러한 진나라와 국경을 접했던 초나라는 진나라의 남진정책에 대응, 화친을 통하여 국가의 안전을

기하자는 친진파(親晉派)와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동방의 강국 제나라와의 합종을 통해 연합

전선을 펴자는 친제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굴원은 제(齊)와 동맹해 강국인 진(秦)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 시대의 가장 극적인 인물 중의 하나인 '장의'의 이간책에 말려든 초회왕은 굴원이 애써

성사시킨 초제동맹을 파기하고 친진정책을 취했는데, 이는 곧 장의에게 철저히 농락당한 셈이다.

 

이 결과 초회왕 진나라에 들어가 억류당한 후 죽임을 당하고 초나라의 왕위는 친진파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친진정책을 극렬하게 반대했던 굴원은 추방되었는데, 이 어부사는 그때 쓴 작품이다.

그가 몇 십년 간 강가를 배회하며 초나라의 국력 회복을 기원하며 부른 시가들은 '초사'라는 장르로

정립되어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초사가 중국 문화에 차지하는 위치는 4언체의 '시경'으로

시작된 중국 시가가 5언체의 한대악부로 발전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으며, 당나라 때 들어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된다.

 

회왕이 죽은 뒤 큰아들인 경양왕(頃襄王)이 즉위, 막내인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재상)이 되었다.

굴원은 회왕을 객사케 한 자란을 백성들과 함께 비난하다가 또 다시 모함을 받아 양쯔 강 이남의

소택지(沼澤地)로 추방되었다. 이후 진나라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500년여에 걸친 도성(영성)이

함락되고 그 잔존세력이 지금의 하남성 진현으로 이주하자, 초나라의 운명이 다했음을 절망한

굴원은 '회사(懷沙)'라는 시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멱라수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는 유배지에서 무속적 민속의식을 관찰하고 그의 작품에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설들을 수집했다.

처음 회왕에게 내쫓겨 유배되었을 때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장편 서정시 〈이소 離騷〉를 써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이'는 '헤어지다'의 뜻이고 '소'는 '근심'이라는 뜻이니 이소란 곧 '근심

으로부터 멀어지다'라는 뜻.〈이소경 離騷經〉은 후세 사람들이 그를 높여 부르는 이름이다.

 

"이것은 위로 당우(唐虞) 3후(三后)의 성왕을 법을 들어 말하고, 아래로는 걸(桀)·주(紂)·예(羿)·

요(澆)의 패망함을 들어 말함으로써 군왕이 깨닫고 정도(正道)로 되돌아가 다시금 자기를 불러줄

것을 기원한 것이다."

이는 왕일(王逸)과 주자(朱子)의 〈이소경〉 서문의 한 토막이다. 굴원은 그토록 애타게 자기의

충정을 노래하다가 한 번 용서받은 바 있었으나, 다시 참소를 받아 경양왕에 의해 멀리 양쯔 강

남쪽 강남지방으로 내쫓기는 몸이 되었는데, 그는 절망감으로 강가를 하염없이 거닐며 시를

읊조리다가 〈회사(懷沙)의 부(賦)〉를 마지막으로 고결한 성품을 그대로 간직한 채 돌을 안고

미뤄 강[汨罷江멱라강:지금의

창사[長沙]에 있는

 汨水]에 몸을 던졌다.

 

중국에서 음력 5월 5일에 벌어지는 유명한 용선(龍船) 축제(단오제)는 이 애국시인의 유체를 찾던

놀이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굴원의 작품들은 고대 중국의 명시선집인 〈초사 楚辭>에 실려 있다.

이 시집은 후세 시인들이 굴원의 전설적인 삶에 대해 쓴 글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한부(漢賦)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굴원의 죽음에 대한 현대적인 의미는 첫째, 아무리 밑에서 옳은 길로 지도자를 인도해도 지도자가

무능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고 둘째, 그럼에도 충신이나 애국자는 지도자의 무능이나 박해에도

불구하고 나라에 대한 충절을 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굴원이 죽고 100여 년 후, 韓왕조 시대 때 

비슷한 처지의 '가의'라는 사람은 굴원을 애도하여 '조굴원부'라는 시를 남겼다. 이 시의 내용은, 

'세상에는 받들 나라가 많기도 많기도 한데 하필이면 충심을 몰라주는 나라에 있다가 멱라수에

몸을 던졌느냐'교 반문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중국에서는 그 지역 주민들은 굴원이 죽은 날 강에 떡을 던진단다. 그것은 충절지사 굴원의

시체를 물고기들이 먹지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 후대 사람 공자는 굴원의 시를 무척 좋아했는데

난세에 어디서나 반드시 굴원 같은 인물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두되는 철학적 물음: 뱃사공이 옳은가? 굴원이 옳은가?

 

대개 우리네 부모님들은 '앞서지도 말고 뒷서지도 말고 딱 중간만 가라'고 자식들을 훈육했다.

속담에도 '모난 돌이 정 맞느다'라고 했듯이...그런 관점에서 보면,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뱃사공의 편을 들 것이다. 다만 공자는 굴원 편을 들었다.

 

여세추이 [與世推移] '

세상

 변하 대로 따라서 변함'을 의미. 여세부침 (與世浮沈--)도 같은 뜻 
'여세추이하다'는 표현은 '세상 돌아가는 형편대로 그렇게 따라서 살아가겠다'는 뜻이죠.

참으로 기회주의적인 가치관이죠. 그렇다고 그런 인생관이 '나쁘다'는 가치론적 철학을 말하려는 게

아니고요, 이런 삶 저런 삶이 있으니 핏대 올려가며 싸울 필요가 없다는 뭐...@#$%^&*(저도 헷갈립니다)

(아래 독일 시인 칼 붓세의 시 주제가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죠.) 그래도 뭐 보편타당한 삶이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 아닐까요? 남들 하는대로 그럭저럭 살아가는...'용가리 통뼈'도 아닌 주제에...

 

산 너머 저쪽(皮岸의 나라) (Über den Bergen)- 칼 붓세 

 

산 너머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기에

아, 남을 따라 행복을 찾아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되돌아 왔네.

산 너머 저쪽 하늘 더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