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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소로스

코알라 아빠 2019. 2. 3.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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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펀드매니저가 되기까지3. 파운드화 공매도4. 영향력5. 기부 활동6. 개인적인 면들7. 재귀성 이론8. 암호화폐 투자

1. 개요[편집]

George Soros
헤지펀드의 대부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 헝가리어로는 Soros György(쇼로시 죄르지)라고 한다. 홈페이지[1] 런던 정경대를 졸업했다. 20세기 최고의 펀드매니저이자 현대 금융사의 신화적 존재이자 진정한 이 시대의 과부제조기[2]인 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 회장.

2011년 7월 25일 81세의 나이로 펀드매니저 은퇴를 발표했다. 물론 그가 투자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다. 투자금을 모두 투자자들에게 돌려준 후 가족 펀드(개인 재산)의 형태로 여전히 자금을 운용 중이다. 2015년 중국 버블 붕괴로 소로스의 가족펀드(개인재산)에서 대규모 손실을 봤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다(...).

워렌 버핏과 동갑이며, 미국의 정치권을 등에 업고 태국 홍콩은 물론이고 영국이나 일본, 한국 등 동맹국들에게까지 환투기 공격으로 국가를 휘청거리게 하는 방식으로 치부하며 경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제3세계 국가의 빈민이나 좌파 운동가들을 돕는 방식으로 이용해 정치적 수단으로 삼는 양면적 행보 때문에 사악한 구세주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97년 IMF 사태 당시에는,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통화 폭락의 주범으로 공공의 적 취급을 받던 것과 대조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우는 대통령 당선자 신분의 DJ가 지난날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일에 호감을 보이며 투자 요청을 승낙,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헐값에 나온 한국의 기업을 거두어들여 사옥을 매각하고 고배당과 유증으로 돈을 챙긴 후 매각하고 철수해 1천억여원을 챙겼다.

2. 펀드매니저가 되기까지[편집]

193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유대인 변호사[3]유대인이 또였던 아버지 슬하에서 유복하게 자랐지만 나치가 유럽을 장악하자 죽음의 위협 속에 살았다. 이후 1947년 동구가 공산화 되면서 런던으로 이주. 런던 정경대(LSE)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복수 전공으로 <열린사회와 그 적들>로 유명한 칼 포퍼밑에서 철학을 공부[4]한 뒤, 52년에 졸업했다. 소로스는 평생 자기를 포퍼의 추종자이자 제자라고 소개했고 실제 포퍼가 만든 '오픈 소사이어티 재단'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기도 했다. 당연히 포퍼는 갑부가 돈을 대 주니 좋아했지만 실제 소로스가 돈을 번 방법 자체가 자유 경제 체제의 헛점을 파고 들어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포퍼를 난감하게 하는 방법들이었기에 애써 좋아하는 티를 내지는 않았다. 소로스는 대학을 다니면서도 철도역의 짐꾼, 여행 세일즈맨, 은행의 수습사원으로 어려운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리고 지금이야 손꼽히는 갑부이고 악마같은 헤지펀드계의 대부로 알려져 있지만 소로스 본인이 돈을 벌기 위해 펀드매니저계에 뛰어든 것은 순전히 런던 정경대에서 심취해 버린 철학을 공부하는 데 경제적 제한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스스로 나중에 포장을 위해서 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소로스가 펀드 매니저로 뛰어들 때 그가 목표했던 액수는 50만 달러로 이 정도면 철학 공부하는 데 밥걱정 안 하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제 이 업계에 뛰어 들고는 전설이 되었다그 모든 것이 바뀌었다. 

졸업 후 몇 년 간 고생을 하다가 런던에 있는 한 투자은행[5]에 견습 사원으로 취직하면서 금융업계에 발을 디디게 된다. 1956년 미국으로 이민 간 소로스는 리서치 헤드 일을 하면서 뛰어난 주식 종목 선정 능력으로 월가에 자리를 잡아갔으며 1969년 4백만 불 규모의 작은 헤지펀드를 만들어 운용하면서 펀드매니저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알프레드 윈슬로우 존스[6] 스타일의 롱숏 전략을 사용하며 소로스는 탁월한 투자 감각과 재귀성 이론을 바탕으로 한 통찰력으로 훌륭한 성과를 냈다.[7]

1973년, 소로스는 짐 로저스[8]와 함께 그의 역사적인 헤지펀드인 퀀텀 펀드(Quantum Fund)를 설립하면서 자신의 투자 인생의 본격적인 막을 올리게 된다.

3. 파운드화 공매도[편집]

1990년영국은 유럽 내 단일통화권 구축을 위해 만들어진 과도기적인 체제인 ERM(환율조정메커니즘)에 가입한다. 이에 따라 파운드화는 독일 마르크화 대비 상하 6% 밴드 내에서만 움직이도록 고정이 되었고[9] 밴드에서 벗어날 정도의 변동성이 발생할 경우 영란은행이 즉각적으로 개입해서 파운드화 가치를 안정시킬 의무가 생겨났다.

같은 해 독일 통일 이후, 독일은 동독 발전을 위해 천문학적인 투자를 단행하게 되고 막대한 화폐가 풀리면서 인플레이션을 방어하기 위해 분데스방크(독일 연방은행)는 2년 동안 10차례나 금리를 인상하는 초강수를 두게 되었다.[10] 자연히 마르크화는 강세를 나타냈고[11] 파운드화의 가치를 밴드 내로 유지하기 위해 영란은행 역시 금리를 인상할 수 밖에 없었다.[12] 그러자 독일만큼 튼튼하지 못했던 영국경제로 인해 실업률은 두자릿수까지 치솟았고 경기는 얼어붙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영국은 ERM 탈퇴 대신 영란은행이 열심히 파운드화를 매수하며 파운드화 하락[13]을 방어했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소로스와 드러켄밀러[14]를 비롯한 영민한 헤지펀드 매니저들은 가능한 모든 자금을 동원해 파운드화의 공매도에 나섰다. 이번에도 자존심 강한 영국은 단기금리를 10%로 인상하며 파운드화 방어에 나섰으나 시장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항복, 1992년 9월 16일 ERM을 나가게 된다. 그리고 파운드화는 수직으로 고꾸라지기 시작했고 소로스를 비롯한 헤지펀드 매니저들은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렸다.[15][16] 결국 패배한 영국정부는 유로화 전환을 포기했다. 이러한 공격방법이 왜 위험한지 간단하게 설명하면 일단 이 방법의 핵심은 공매도라는 방식의 위험성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해 공매도를 통해 2000원으로 1파운드화를 사는 과정 없이 미리 빌렸다치고 팔아놓고 나중에 파운드화가 1000원으로 떨어졌으니 차익에 해당하는 천원을 지불하라는 방법인데 문제는 파운드화가 천원으로 떨어지려고 하면 당하는 쪽에서 눈앞에서 엄청난 손해를 보는게 뻔히 보이기 때문에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죽자사자 달려든다. 비록 영국 정부의 상황을 꿰뚫고 있었기에 가능한 방법이었지만 엥간한 곳에서는 씨알도 안먹히고 손해만 보다 끝나는 경우가 많다.

사실은 정확하게 말해서 이 영란은행을 공격하는 작전의 입안자는 드러켄밀러였으며 그가 입안한 계획을 검토하고 허가를 내준 이가 소로스였다. 영란은행에서의 엄청난 타격은 엄청난 성공을 불러일으켰지만 이후 드러켄밀러의 작전들로 인한 손실(특히 1998년 롱텀캐피탈 파산이 직격탄이었다)이 계속되자 둘은 갈라서게 된다.

4. 영향력[편집]

1993년 소로스가 금광을 개발하는 미국의 광산업체의 주식을 매수했다는 소문이 나자 월스트리트의 펀드매니저들이 앞다퉈 관련주식을 매수해 전세계적으로 금이 폭등했다.

1996년 1월 도쿄의 세미나장에 나타난 그가 "일본 주가가 비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라고 한마디 하자 닛케이 주가는 폐장을 앞둔 막판 10분동안 270포인트 이상 급등했다.

하지만 2000년 4월 퀀텀펀드가 기술주(IT버블)에 묶여 50억달러를 순식간에 날리자 그는 "헤지펀드의 시대는 갔다"고 선언했다. 이후에는 안전한 투자를 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 이후에는 파생상품이나 통화투자는 하지 않고 주식이나 채권에만 투자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우리 소로스가 달라졌어요2010년 퀀텀펀드를 해체하고 개인재산만을 운용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중국 증시를 중시하여 중국 주식(특히 공상은행과 상하이자동차)에 엄청난 투자를 했지만 2015년 중국 증시 폭락으로 엄청난 손실을 보고 2016년의 포브스 발표에서 갑부순위 100위 밖으로 밀려나는 굴욕을 겪은 바 있다. 

중국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중국 공산당과의 꽌시가 탄탄하다는 평이 많다. 중국 주식에 투자했던 이유. 그러나 2019년, 조지 소로스가 다보스포럼에서 이례적으로 시진핑을 비판했다. 시진핑은 중국의 시장 개방을 반대하고, 팽창주의 정책을 벌리고 있다. 그런데 이 정책이 미중관계가 냉전이 아닌 '열전', 즉 진짜 전쟁으로 벌어질 수도 있다며 시진핑의 태도 변화를 촉구한 것이다

물론 소로스에 대한 영향력에 대한 이야기는 과장된 면도 없지 않다. 과거 그가 헤지펀드의 거물이었던건 사실이지만, 마치 그가 독단적으로 영국 파운드화를 공격하고, 홀로 아시아의 수많은 나라를 금융위기(1997년 태국말레이시아, 그리고 대한민국의 외환위기)로 몰아넣은 것처럼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 당시 아시아 국가들과 영국에는 수많은 문제(금융)와 경제에 거품이 있었던게 사실이고 그러한 부분을 소로스는 간파하고 수익으로 연결시킨 것이다.하지만 돈이 많던 소로스가 영향력을 가지고 사람들이 소로스를 따라하메 금융위기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며 소로스가 아니였다면 거품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의외로 외환위기 당시 한국에서는 큰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의외로다 imf를 빠른 시간에 극복하고자 헐값에 팔린 기억과 빌딩들을 먹튀로 수천억을 벌었다태국 바트를 공격하여 짭잘한 수익을 올렸기에 비슷한 전략으로 대한민국 원도 공격해 봤지만 때마침 한국인들이 어마어마한 양의 금을 쏟아내서 그냥 손 털고 나와버렸다고....[17]

금융위기 때 그가 헤지 펀드계의 스타 매니저여서 특별히 부각된 점은 주의해야 할 사실이다. 실상 돈이 될 것 같다고 판단되자 피냄새 맡은 상어떼마냥 미친듯이 달려든 각국의 거대 은행, 여타 헤지펀드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이들이 더 큰 혼란을 불러왔다.소로스가 하는 행동은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하기 때문이다.

위에 서술된대로 소로스도 인간인지라 당연히 투자에 있어서 많은 실수를 맛보았고, 기술주 거품 때는 정말 골로 갈 뻔한 적도 있었다.

그 영향력 때문에 각종 창작물에서도 은근슬쩍 캐릭터를 차용하기도 한다. 

희대의 불쏘시개 작가 김진명의 소설 "하늘이여 땅이여"에서는 한국에서 주식투기[18]를 하려는 헤지펀드 매니저 딕슨의 배후자인 아서라는 인물이 있는데 사전에 그의 계획을 돕는 조지라는 캐릭터가 바로 이사람에서 따온 듯. 그사람의 이력[19]이나 대화내용[20]을 보면 100%다.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만화책에선 조지 솔라스라는 이름을 가진 유대인 금융재벌이 나오는데 누가 봐도 조지 소로스 이름에서 따온 듯. 이 작품에선 악의 축같이 나오지만 정작 신디케이트라는 비밀 세계 조직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인물로 나온다.

5. 기부 활동[편집]

소로스는 2010년도 포브스의 발표에서 미국부자순위 14위를 차지했다. 동시에 2002년 비즈니스위크의 발표에 따르면 5억 3600만달러를 기부금으로 내놓아서 6위의 기부가로 선정되었다.

소로스는 1989년에 민주주의·인권 운동을 목표로 하는 '오픈소사이어티재단(Open Society Foundations, OSF)'을 만들고, 매년 꾸준히 수억달러를 기부하였다. 그런데, 2017년에는 한방에 180억 달러 (약 20조원)을 기부했다. 2017년 소로스의 재산 추정치는 약 27조원인데 자기 재산의 70%를 기부한 것이다. 나이들고 아파지니 기독교에 심취해 기부했다는 소문이 있다. 이번 기부를 포함해 지금까지 이 재단에 320억달러(약 35조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이 통큰 기부로 인해서 이 재단은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에 이은 두번째 큰 규모의 재단이 되었다. 관련기사

6. 개인적인 면들[편집]

소로스는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79년 자선단체 오픈소사이어티펀드를 설립해서 옛 동구권의 체제전환을 위해 매년 3억달러를 지원하기도 했다. 취미는 테니스이며 오랫동안 뉴욕 맨해탄의 조그만 원룸 아파트에서 살았고 재혼후에 아내가 임신했을 때 비로소 뉴욕 5번가의[21] 2층맨션으로 옮겼다. 하지만 최근의 여러 구설수에 오른 행동을 보면 이런 자선활동이나 검소한 생활은 다 자기 이미지 관리를 위한 언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자기보다 52세나 어린 브라질 탤런트 출신의 옛 애인한테 소송을 당했는데, 옛 애인의 주장은 소로스가 뉴욕 맨해튼의 190만달러짜리 아파트를 자기 대신 새로운 여자친구에게 줬다고 하며, 아파트를 놓고 말싸움을 벌이던 중 소로스가 침대에서 자기 얼굴을 때리고 목을 졸라 질식시키려 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기사

물론 저 옛 애인이란 사람도 단순히 애인이었던 이유로 소로스에게 거액을 뜯어내려 하는 속물적인 목적이 보이는지라 저 아파트를 준다는 약속이나 소로스의 폭행 및 협박 등의 주장은 액면 그대로 믿긴 어렵지만, 적어도 80이 넘은 소로스의 나이에 20대의 연예인 미녀를 애인으로 두고 있었다는 것은 서양 기준으로도 별로 보기좋은 모습은 아니고, 더구나 저런 연예인 미녀를 애인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애인을 만족시켜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상당히 사치스런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기에 평소의 검소한 생활이란 것도 언플로 꾸민 거짓 이미지일 가능성이 크다. 링크 실제로도 이런 일들이 발생했다.

미국 민주당에 막대한 정치자금을 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는 공화당을 지지했으나 앞 이름이 같은 부시의 삽질을 보다못해 오바마와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도 반이민정책을 주요 정책골자로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에 반대하여(소로스 본인이 이민자니까)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한 바 있다. 

한국에서는 앞서 설명한 IMF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최규선 게이트의 주인공인 최규선씨의 주선으로 김대중과 자주 만남을 가졌으며 대표적인 거부로 알려진 알 왈리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자, 마이클 잭슨과 함께 화상회의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한 바 있다.

헝가리 출신인 만큼 헝가리 정재계와도 깊은 친분관계를 맺고있고, 헝가리가 민주화 된 이후로 중부유럽대학을 설립하면서 꽤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오르반 빅토르와 친분이 깊었다. 하지만 2010년대 재집권 이후로는 오르반 빅토르가 1기 집권때와는 다른 노선을 띄고 권위주의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조지 소로스와는 매우 험악한 사이가 되었다.

7. 재귀성 이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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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스에 의하면 주식시장은 과매도와 과매수를 거쳐서 결국은 평균에 근접해나간다고 한다. 이를 소로스의 재귀성 이론 혹은 자기암시 이론이라고 부른다. 그래프를 보면 알겠지만 초기 급락장에서 수익이 극대화되며, 데이트레이더들의 기본 이론도 대부분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 이론은 평균분산그래프같은 경제학적 측면과 군중심리와 같은 인문학적 측면이 같이 있는데, 조지 소로스가 젊은 시절에 철학을 전공한 것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게 일반적인 견해다. 재귀성 이론은 두가지 요소가 전제되어 있는데, 하나는 특정물에 대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특정물을 어떻게 다루려는지에 대한 조작이다. 소로스는 인식과 조작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사람들의 편향성이 더욱 강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편향성을 소로스는 '자기암시'라고 정의내렸는데 이렇게 강해진 자기암시는 현실과 자기암시의 간극이 더이상 지속될 수 없을 때 반전되어 사라진다고 한다.

소로스는 파운드공매도 이후 많은 주목을 받았고 상품이나 환율시장에서는 몇차례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주식시장에서는 곤란을 겪었다. 이에 대해 시골의사 박경철은 소로스의 성공은 성공이 확실한 차익거래에서 레버리지를 일으켜 큰 수익을 낸 데 있지, 재귀이론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라고 평한 바 있다.

8. 암호화폐 투자[편집]


2018년 4월 6일, 공식적으로 암호화폐 투자에 나서겠다고 발언했다. 그의 첫 거래는 코인베이스에서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공식 트위터에 코인베이스 가입 절차를 인증하는 모습이 올라왔다.(출처필요) - 사실확인안됨

[1] 사실 부모님이 모두 에스페란토를 적극 사용해 에스페란토가 모국어(!)인 사람인데, 이 경우는 게오르게 소로스, 만약 g에 발음 표기를 한다면 줴오르줴 소로스라고 읽을 것이다(에스페란토에는 y가 없다). 사실 소로스는 원래 성이 아니다. 나치 시절 유대인 탄압을 피해 슈바르츠라는 이름을 소로스로 바꾼 것이므로 발음 자체는 크게 의미는 없다. 본인이 직접 참여한 자서전(본인이 쓰지는 않은)에서 밝힌 바가 있다. 어차피 미국에서는 소로스라고 부르니까[2] 농담이 아니다. 이 사람이 몇몇 나라의 통화를 공격해서 무너뜨린 끝에 수많은 사람이 자살했고 그 부인들은 전부 과부가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고베 대지진 당시 일본이었고, 이 때 화끈하게 데인 일본이 그 다음 공격에 반응한 것이 바로 일은포이다.[3] 당시 부다페스트는 유다페스트라고 불릴 정도로 유대인이 많이 살던 지역이었다.[4] 잘 안 알려졌지만 소로스는 인문학 예찬론자이다. 어느 정도냐면 자기가 펀드매니저가 안 됐으면 철학자가 됐을 거라고 인터뷰에서 말했고, 자신의 투자 이론인 재귀성 이론을 정립하는 데 철학이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할 정도다.[5] 헝가리 이민자가 설립한 회사였다고 한다.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다 다만, 투자 은행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것만 해도 요즘 한국에서 4대 대기업 들어간 것보다 더 어려운 취업을 해낸 것으로 봐도 된다.[6] 1949년 세계 최초로 헤지펀드를 설립한 사람이다.[7] 대표적인 예로 1970년대 초반의 부동산 투자 신탁(REIT) 투자를 들 수 있다. 소로스는 REIT의 붐과 버블 붕괴를 정확히 예측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8] 상품 투자의 귀재라 불리는 유명한 매니저이다.[9] 경제 규모에 따라서 달랐는데 작은 국가의 경우 2.5%였고 영국은 큰 경제력을 지닌 국가였기 때문에 6%로 비교적 밴드의 범위가 컸다.[10] 현재 연준의 금리결정을 위한 회의는 일년에 8차례이다. 2년이면 16차례인데 그 가운데 10번의 금리인상이라면... 후덜덜한거다.[11] 금리 인상 -> 자금 유입 -> 해당국 통화 강세[12] 금본위제에서도 각국의 금리 변화의 동조화 현상이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금리 변화는 각국의 경제 사정과는 무관하게 가는 경우가 빈번했다.[13] 실업률 치솟고 경기가 나빠지니 당연히 파운드화는 떨어지는 게 정상이다.[14] 이 당시 소로스의 펀드를 위탁운용하던 매니저, 이 사람도 장난아니다. 소위 천재.[15] 그 해 소로스의 수익률은 무려 68%. 파운드화 매도를 통해서만 무려 11억 달러(약 1.2조원)의 수익을 올린 것이다.[16] 참고로 요샌 이렇게 베팅하는 헤지펀드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러한 스타일은 언뜻 보면 상당히 멋있고 화려해보이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다. 예를 들어 소로스의 경우 1987년 블랙 먼데이 당시 한 주간 8억 4천만 달러(9200억원)의 손실을 봤으며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움IT버블 붕괴 때에도 역시 천문학적인 손실을 맛보았다. 2000년대 들어서 대형 기관투자자들의 헤지펀드 투자가 늘어나면서 자연히 헤지펀드들의 투자 스타일 역시 (안정형으로) 바뀌고 있다.[17] 소로스와는 관계가 없지만 헤지펀드들이 원화를 공격할 기회가 다시 한 번 찾아왔는데, 그때는 왕의 남자의 점심시간 도시락 폭탄 사건으로 손 털었다. 이 이후로 미국은 한국을 환율조작 감시대상국으로 보고 정부의 환율방어 정책에 심심하면 딴지를 걸고 있다.[18] 여담으로 이 주식투기는 한국인 여대생의 증권사 해킹과 일본인 대학교수의 주식자동매입 프로그램, 그리고 큰손급 개인주식투자가의 투매에 의해 역관광당한다(...)[19] 위에서 설명된 태국 바트화 공격 이야기가 등장한다.[20] IMF때 한국에서 벌기는 커녕 한국인들이 도와달라고 하는 바람에 명성도 유지해야 했기에 곤란했다고 한다.(...) IMF위기 당시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조지 소로스 등과의 친분을 언급한 내용과 연결된다.[21] 뉴욕의 네 구역 중 제일 잘나가는 맨하탄에서도 제일 잘나가는 곳으로 명실상부한 최중심부이다. 한국으로 치면 강남역이나 삼성역 부근 최중심부로 이사간 것과 같다. 뭐가 검소하단거야 그냥 평범한 지름신인거 같은데? 다만 언플의 성격이 강하지만 소로스가 다른 미국 거부들에 비해 검소한 편인건 맞다. 미국 갑부들은 한국 재벌들 생활을 상상하면 안 될 정도로 호화롭게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