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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漂海錄]최부 지음 / 서인범 역 / 한길사

코알라 아빠 2019. 1. 28. 15:32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최부가 중국에 표류되었을 때의 체험을 1488년에 편찬한 책. 조선의 성리학자 최부의 시각을 통해 그려진 '표해록'은 현실적 중화인 '대명'(大明) 까지도 일정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조선도 '화'(華)의 측면에서 비교 대상을 삼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사행으로 다녀온 이의 중국 견문록인 조천록이나 연행록과는 달리 훨씬 광범하고 자유로운 필치로 중국의 현실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 성종 연간에 관인 최부 일행이 제주도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중국 정갈성 영파부 연해에 도착하지만, 그들은 왜구라는 혐의를 받고 고초를 당하고, 그 혐의를 벗고 중국 군리의 호송을 받으며 항주에서 운하를 따라 북경에 이른다. 북경에서 황제를 알현하고 요동반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한양으로 돌아온 최부가 약 6개월 동의 견문기를 일기체로 써서 임금에게 바친 책이다.

<저자소개> 최부

최부(崔溥)의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 나주 출신. 아버지는 진사 최택(崔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8년(성종 9) 진사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신종호(申從濩)와 더불어 문명을 떨쳤고, 김굉필(金宏弼) 등 동학들과 정분을 두터이 하였다.1482년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교서관저작과 군자감주부 등을 지냈다. 여러 관직을 거쳐 전적으로 있을 때 <동국통간>편찬에 참여했고, 1486년 문과 중시에 급제해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어 사가독서했다.

1487년 9월 추쇄경차관으로 임명되어 제주에 갔으나 다음 해 부친상을 당해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14일 동안 표류한 끝에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에 도착했다. 도적을 만나고, 왜구로 오인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고초를 겪었으나 관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해 북경으로 호송되었다가 귀국길에 올라 한양 청파역에 도착했다.

귀국 직후 성종의 명을 받아 <금남표해록>을 3권으로 기록했다. 이 책에는 중국 연안의 해로와 기후, 산천, 도로, 관부, 풍속, 민요 등이 소개되어 있다. 특히 최부는 수차의 제작과 이용법을 배워와 충청도 지방의 가뭄 때 활용하도록 했다. 1498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 문하인 이종준, 이구, 김굉필, 박한주 등과 함께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난했다는 죄명으로 함경도 단천에 유배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1506년 중종 즉위와 동시에 신원되어 승정원도승지로 추증되었다. <금남표해록>은 국내에서 한문과 한글본으로 간행되었고, 일본에서도 <당토행정기>나 <통속표해록> 등으로 출간되었다.



최부의 『표해록』에 나타난 조선의 선비정신

                                       - 조영록. 동국대 명예교수. 동양사학.
 

성종18년(1487) 최부는 제주 3읍 추쇄경차관으로 부임해 임무를 수행했다. 이듬해인 1488년 정월 부친상을 당해 고향 나주를 향해 출발했다가 태풍을 만나 중국 절강 연해지역으로 표류하게 되었다. 북경을 거쳐 귀국한 그는 1488년 6월 18일 청파역에서 국왕 성종의 명에 따라 표류할 때부터 귀국할 때까지 6개월 동안의 견문사실을 써서 바쳤다. 이를 마치고 성종으로부터 부의로 포 50필과 마필을 지급받아 곧장 나주로 내려갔다. 상을 당한 지 반 년이 지난 후이다.

그런데 상 중에 다시 모친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르게 되었다. 만 4년 동안 부모상을 치르고 성종23년(1492) 상경해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성종이 최부에게 내린 벼슬은 사헌부 지평이었다. 그러나 임용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사간원에서 동의하지 않아 보류되고 있었다. 사간원 대간은 4년 전 최부가 중국에서 들어왔을 때 상주였음에도 견문기를 쓴 것이 名敎에 어긋나는 행위라며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성종은 견문기를 쓴 것은 자신의 명에 따라 한 일이므로, 최부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두둔했다.

사실 최부보다 5년 먼저 제주도 정의현감 이섬이 중국 양주 지역으로 표류했던 내용을 <행록>으로 적어 올린 일이 있었다. 이때도 대간의 반대가 있었으나 성종은 승진시켰다. 이섬은 무신인 반면, 최부는 문신이고 견문기 내용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듬해인 1493년 성종은 최부를 홍문관 교리로 임명했지만, 재차 대간은 그 직책이 경연관이 된다는 점을 문제 삼아 시비가 재연되었다. 이번에는 육조와 홍문관에서 최부를 두둔하고 나섰다. 성종은 승문원 교리로 고쳐 임명함으로써 시비가 일단락되었다. 이후 최부는 홍문관 교리, 부응교, 예문관 응교를 수행했다.

연산군3년(1497) 최부는 성절사 질정관으로 10년 만에 다시 明나라를 다녀왔다. 그러나 이듬해인 1498년 무오사화를 당해 동문인 김굉필,박한주 등과 함께 붕당을 지어 국정을 비난했다는 죄목으로 장 80대에 함경도 단천으로 귀양을 갔다.

연산군10년(1504) 다시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처음에는 장 100대에 거제로 귀양을 보내며, 노(奴)로 삼는다는 처벌이 내려졌지만, 결국 참형을 면하지 못했다. 그는 처형장에서 한마디 말도 없이 담담하게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최부는 해남 정씨 사이에 딸 셋을 두었고, 함양 박씨 사이에 서자 최적을 두었다. 장녀는 유계린, 차녀는 나질, 삼녀는 김분에게 각각 출가했다. 훗날 漂海錄을 간행하고 발문을 쓴 유희춘은 그의 외손이다.

漂海錄 간본들은 임란 중에 일본을 반출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자학자 기요다 쿤킨은 1769년 일본어로 번역해 제목을 <唐土行程記>라고 바꾸어 출간했다. 기요다는 서문에서 번역간행의 동기를 "그것이 외국의 풍토에 대해서 가히 증거로 삼을 만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1965년에는 일본에 유학했던 미국인 학자 존 매스킬이 <최부의 일기 - 표해록>이라는 영문 역주본을 내놓았다.

漂海錄은 해양문학 작품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중국견문기로 분류되기도 한다. 어떻게 보든 일관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조선 선비 최부의 꼿꼿한 정신자세다. 최부는 수하 43명을 거느리고 태풍을 만나 대양에서 사투를 벌이는 가운데에서도 유교적 이치에 닿지 않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았다. 어떠한 경우라도 유교적 예에 어긋난다고 생각되는 일에 대해서는 타협을 거부했다.

예컨대 뱃사람들이 위기상황에서 天神에게 기도를 올리자는 요청을 단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국 연안에서 해적을 만났을 때, 최부로 하여금 관복으로 갈아입어 조선 관인의 어엿한 모습을 보이도록 하자는 일행의 요청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상중의 예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북경에 당도해 황제를 알현하는 과정에서도 상복 대신 길복으로 갈아입어야 한다는 明나라 예부의 요청도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은 알현시에만 잠시 길복으로 갈아입기는 했지만, 상주로서 상복을 벗을 수 없다는 이론을 내세워, 예부 측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최부는 조선인에게는 금역으로 되어 있던 강남지방을 깊숙이 여행하면서 관찰한 중국의 실상을 매우 흥미롭고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물론 그가 묘사한 중국사회는 성리학자로서의 안목을 통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중국은 華夏와는 너무나 달랐다.

당시 일본의 대명 사신은 10년마다 1회씩 해로로 지정된 영파항에 입항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들은 절강시박사의 입국수속을 거친 뒤 운하를 따라 북경으로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다시 영파로 돌아와 귀국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 중국에 체제하는 기간은 약 6개월인데, 이 기간 동안 허가된 범위 안에서 무역과 필요한 물건을 구입했다.

일반적으로 왜구는 明세종 가정(1522~1566) 연간부터 창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明 전반기에도 동남연해에는 삼엄한 방비체제를 가동하고 있었음을 최부의 표해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최부가 여행한 시기는 明효종 홍치 원년(1488)으로, 당시 최부가 기록한 중국의 상황은 정확했다. 그가 관찰한 明의 문화는 유교적 질서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강남을 여행하고 난 뒤 북경의 風情을 평가하면서 "여염 사이에서는 도교와 불교를 숭상하고 유교를 숭상하지 않으며, 상업을 숭상하되 농업을 숭상하지 않는다."며 한탄하고 있다. 또한 그가 여행을 마치고 난 뒤 明나라의 문화를 총평하면서 "강남과 강북이 공통적인 것은 상하,존비의 질서가 없으며, 귀신이나 불교와 도교를 숭상하고 상업을 중시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당시 明헌종(성화제), 明효종(홍치제) 연간은 明중기에 해당되며, 초기의 사회경제나 문물제도가 해이한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상계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초기의 성리학적 분위기에서 심학적 분위기로 점차 바뀌어 가고 있었다. 양명학,불교,도교,상업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바로 최부가 경험한 그 지역과 시대의 반영이었다.

『표해록』을 지어 올리다.

 喪人이 된 신 최부는 제주 앞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중국 구동(절강성)에 정박했습니다. 越南(항주 이남)을 지나 燕北을 거쳐 지금 6월 14일 한양 청파역에 도착했습니다. 삼가 전지를 받들어 일행의 일기를 기록해 바칩니다.
 성종18년(1487) 9월 17일.  나는 제주 3읍(제주목,정의현,대정현) 추쇄경차관(지방에 파견된 사신)으로 명을 받고 임금께 하직인사를 올린 다음 길을 떠나...

11월 12일.  제주 조천관에 도착했다.
 1488년 1월 30일.  날씨가 흐렸다. 오후에 나의 종인 막금이 나주에서 제주에 도착했는데, 상복을 가지고 와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을 알렸다.

윤1월 - 대양을 표류하다.

 1488년 윤1월 초1일.  비가 왔다. 제주목사가 새벽과 저녁에 와서 조문했다.
 윤1월 초3일.  배에 올랐다... 닻이 끊어졌다... 북풍에 밀려 배가 밀렸다. 배가 파도를 따라 오르내리며 갈 곳을 알지 못했다.
 윤1월 초4일.  대양으로 표류해 들어갔다. 우박과 태풍이 불어 크고 무서운 파도와 풍랑이 일었다. 돛이 모두 파손되었다... 익사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까지 합하면 모두 43명이나 되었다.
 윤1월 초6일.  바람을 따라 서쪽으로 가는데, 큰 물결 사이로 물체가 보였으나 크기를 알 수 없었다. 수면 위로 보이는 것은 길이가 긴 행랑 같았고, 하늘로 거품을 내뿜는데, 파도가 나부끼고 물결이 일었다. 초공이 큰소리로 말했다. "저것은 고래인데, 큰 고래의 경우에는 배를 삼키고, 작은 고래는 배를 뒤엎습니다. 서로 만나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다. 우리는 죽을 지경에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밤이 되자 바람과 물결이 다시 강해져 배의 항해가 대단히 빨랐다. 안의가 말했다. "바다에는 탐욕스러운 龍神이 있다 하니, 소지하고 있는 행장 등 물품을 던져 제사를 지냄으로써, 저희가 구원을 얻기를 청하옵니다." 내가 그의 말에 응하지 않자,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말했다. "사람이란 몸이 있은 후에야 물건이 있는 것입니다. 물건은 모두 몸 이외의 것입니다." 이에 다투어 의복,군기,철기 등을 바다에 던졌다. 나도 그것을 막지는 못했다.
 윤1월 초9일.  배고픔과 목마름이 열흘 가까이 되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추위에 손발이 저리고 마비되었다. 이때 바다 갈매기가 떼를 지어 빠르게 날아 지나갔다. 뱃사람들이 바라보고 기뻐하면서 말했다. "모래톱이 반드시 멀지 않을 것입니다."
 윤1월 초10일.  감귤과 청주조차 다 없어졌다. 마른 쌀을 씹기도 하고 오줌을 받아 마시기도 했다. 가슴이 타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옷을 빗물에 적신 다음 짜 물을 마셨다.
 윤1월 12일.  申時(오후 3~5시)에 커다란 섬에 이르렀다. 배 두 척이 우리 배를 향해 왔다. 정보가 말했다. "모든 일에는 常道와 權道가 있습니다. 청하건대 상복을 벗으시고 권도로써 사모와 단령을 착용하셔서 官人의 모습을 보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은 반드시 우리를 해적이라고 떠벌리며 모욕을 가할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천리는 원래 올바르니 하늘의 뜻을 어기고 어찌 속임수를 행하겠는가?"
 종이에 글을 써서 정보를 통해 그들에게 보냈다. "조선국 최부는 왕명을 받들어 해도(제주도)에 갔다가 부친상 때문에 급하게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는데, 여기가 어느 나라 땅인지 알지 못하오." 일행이 대답했다. "여기는 大唐國 절강의 영파부 지방이오."
 배를 정박시키고, 너무나도 피곤해 배 안에서 서로 얽혀 잤다. 2경(밤 9~11시) 즈음에 무리 20여 명이 창과 작두를 들고 우리 배에 난입했다. 소금기가 흠뻑 묻은 옷과 여러 서책들만 남기고, 모두 가져갔다. 그들은 거칠게 폭력을 쓰며 금은을 원했다. 자신들의 배로 우리 배를 끌어 대양으로 내버린 후에 달아났다.
 윤1월 13일.  다시 대양에 표류했다. 거의 얼어죽을 지경이었다.
 윤1월 16일.  우두외양에 도착해 정박했다. 육지와 잇닿은 곳이었다.
 윤1월 17일.  사람들이 배에 올라 눈에 드는 것은 작은 물건이라도 빼앗았다... 마침내 우리 일행은 비를 무릅쓰고 수풀을 해치며 달아나 고개 두 개를 넘었다. 마을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관부에 알려 주기를 청했다.
 윤1월 18일.  은둔해 선비를 자처하는 왕을원을 만났다. 그가 측은히 여기며 술을 가져오게 해서 내게 권했다.
 "우리 조선 사람은 친상을 당하면 술과 고기를 마시거나 먹지 않고, 매운 음식이나 맛있는 음식도 먹지 않는 것을 3년상이 끝날 때까지 하오."
 "당신네 나라에서도 불교를 믿소?"
 "불교를 숭상하지 않고 오로지 유학만을 숭상하오."
 여러 곳을 거쳐 20여 리를 갔는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몽둥이로 우리를 마구 때리면서 횡포를 부렸다. 매질을 당하며 엎어지고 울부짓으며 고개 두 개를 넘어 또 다른 마을로 갔다. 포봉리에 도착하자 한 관리가 軍吏를 거느리고 와서 내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는 해문위 천호 허청으로, 왜구가 침범했다는 말을 듣고, 체포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들은 심문을 마친 후 나를 별관에 묵게 하고, 나와 종자들에게 음식을 주었다.
 윤1월 22일.  파총관 설민이 물었다. "신하된 자는 나라를 생각할 뿐, 집은 잊어야 합니다. 당신은 王事로 인해 표류하고 여기에 도착했으니 마땅히 충성해야 하는데, 어찌 집만을 생각합니까?"
 "효자의 집안에서 충신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효도를 다하지 못하면서 군주에게 충성한 사람은 아직 없소."
 "당신 나라 임금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신하된 자가 임금의 이름을 가벼이 말할 수 있겠소?"
 "경계를 넘었으니 거리낄 것이 없지 않습니까?"
 "신하된 자가 국경을 넘었다고 자신의 나라를 저버리며, 행동을 달리하고 말을 바꿀 수 있겠소?"
 "내일 관원을 보내 그대들을 호송해 길을 떠나게 하겠소."
 윤1월 29일.  寧波府를 지났다.

2월 - 하늘에 천국, 지상에 蘇州와 杭州

 2월 초4일.  紹興府에 도착했다. 도로 또는 市井의 번성함, 그리고 사람과 물자의 풍성함은 영파부보다 3배나 되는 듯했다.
 관리가 말했다. "처음에 그대들을 왜선으로 간주해서 위협하고 겁탈해 사로잡아 죽이려 했소. 그대가 조선인이라면 그대 나라의 역대 연혁,도읍,산천,인물,풍속,제사의식,喪制,호구,병제,田賦,의관제도를 자세히 써 오시오. 그것을 여러 기관에서 대질해 시비를 따질 것이오."
 나는 말했다. "연혁과 도읍을 말하자면, 시작은 단군으로 唐堯의 시대와 같았고, 국호는 조선이며. 도읍은 평양으로 대대로 천여 년 동안 다스렸소... 지금은 역성혁명을 이루어 조선이 되어 한양에 도읍을 정한 지 100년 정도 되었소... 장백산이 동북에 잇는데 일명 백두산이라고 하며... 산정에는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여 리나 되며,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오. 또 동북쪽으로 흘러 속평강이 되고, 서북쪽으로 흘러 송화강이 되오..."
 "인정을 추쇄한다는 것은 무슨 말이오?"
 "제주는 큰 바다 가운데 있어 뱃길이 험한데다 멀어서 범죄자가 도망쳐 들어가는 소굴이 되었기에, 가서 그들을 찾아내는 것이오."
 2월 초5일.  소흥부는 越王의 옛 도읍으로 秦漢시대에는 회계군으로 절강 동쪽 하류에 위치한다.
 2월 초6일.  杭州에 도착했다. 강물이 굽이굽이 흘러 산을 끼고 돌아가고, 산에 부딪친 물결이 일어날 기세가 있어서 절강(浙江)이라 했다.
 적룡과 우리는 비 때문에 하루를 쉰 것을 제외하고는 때로 밤을 세워 가면서 천여 리의 땅을 지나왔다. 그런데도 진수태감 장경은 오히려 지완지죄(遲緩之罪)로 적룡을 책해 곤장을 때렸다.
 2월 11일.  고벽이 와서 말했다. "항주 서산 팔반령에 오래된 절이 있는데, 이름은 高麗寺요, 절 앞에는 옛 사적을 기록한 비석 두 개가 있으며, 여기에서 15리쯤 떨어져 있소. 宋나라 조광윤 대 고려사신이 와서 절을 세웠다고 하오. 당신 나라 사람이 남의 나라에 와서 절을 세웠다고 하니, 불교를 숭상하는 뜻을 알 만 하오."
 "이는 고려인이 세운 것이오. 지금 우리 조선에서는 이단을 물리치고, 유교를 존숭해, 사람들이 모두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경하며, 임금께 충성하고, 벗을 믿는 것을 본분으로 삼고 있소. 만약 머리를 자른 사람이 있다면 모두 充軍시킨다오."
 2월 12일.  杭州는 오대 때는 오월국(907~978)이었고, 宋고종(1127~1162)이 남쪽으로 양자강을 건너 천도했던 땅이다. 항주는 동남의 한 도회지로 집들이 이어져 행랑을 이루고, 옷깃이 이어져 휘장을 이루었다. 저잣거리에는 금은이 쌓여 있고 사람들은 수가 놓인 비단옷을 입었으며, 외국 배와 큰 선박이 빗살처럼 늘어섰고, 시가는 주막과 가루(歌樓)가 항상 봄의 경치니 참으로 별천지라 할 만하다.

 2월 13일.  항주를 떠났다. 

2월 15일.  嘉興府를 지났다. 역승 하영이 시 3절구를 지어 보내주기에 화답하니, 하영은 별도로 음식을 주며 말했다. "우리 조정의 낭중 기순과 행인 장근은 예전에 조선 사신으로 가 <황화집>을 얻었소. 당신 나라 사람들과 시를 주고받았는데, 서거정이 제일 첫머리에 나오더군요." ☞ 皇華集은 조선시대 明나라 사신과 조선의 원접사가 서로 주고받은 시를 모은 책.

 "기 낭중의 문장은 청아하고 덕망이 높아 모두들 흠모하고 있소. 지금은 어떤 관직에 있으며, 장 행인은 어떤 직무를 맡고 있소?"
 "기 낭중은 좌천되어 귀주 석천부 지부를 역임하다 죽었고, 장 행인은 죄를 지어 지금은 금의위에 充軍되었소. 서거정은 지금 어떤 관직에 있소?"
 "의정부좌찬성 직에 있소."
 "서거정은 문장가로서 역시 해동의 인물이지요."
 가흥부는 越이 吳를 물리친 곳이다. 번화함은 영파부와 같았다.
 2월 16일.  蘇州府에 도착했다.
 2월 17일.  蘇州는 옛날 吳합려가 오자서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해 도읍했던 곳이다.
 정오에 안찰어사 왕 대인과 송 대인이 역으로 와 예빈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몇 품이오?"
 "5품관이오."
 "당신네 나라는 무슨 비결이 있어서 隋,唐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소?"
 "謀臣과 猛將이 병사를 지휘하는 데 도리가 있었으며, 병졸들은 모두 충성스러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소."
 자정 무렵 달빛을 받으면서 노를 저어 북쪽으로 가니 통파정(通波亭)이 호수를 굽어보고 있는데, 옛 이름은 高麗亭이었다고 한다. 宋신종 원풍 연간(1078~1085)에 세워진 것으로, 고려의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천하에서 강남을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했고, 강남 중에서도 소주와 항주가 제일이었는데, 소주가 더 뛰어났다.
 2월 21일.  양자강에 도착했다.
 2월 23일.  양주부를 지났다. 양주위의 백호 조감이 말했다.
 "6년 전에 당신 나라 사람 이섬 역시 표류해 여기에 도착했다가 귀국했는데, 알고 있소?"
 "그렇소. 이섬이 표류한 전말을 아시오?"
 "이섬은 처음에 바람에 떠밀려 양주 굴항채에 표착했소..."
 2월 27일.  회안부를 지났다. 회음역 건너편에는 마두성이 있고, 문 밖에는 표모사가 있다. 그 북쪽에 과하교는 한신이 식객노릇을 하며 과하지욕(袴下之辱)의 수모를 당했던 곳이다.

3월 - 조운로의 격류를 헤치고

 3월 초3일.  비주를 지났다. 항주의 이북은 땅이 모두 평야로 간혹 멀리 산이 보이는데, 양자강 이북에는 구릉이 하나도 없다.

 3월 초5일.  유성진을 지났다. 협구역을 떠나 황가갑에 이르렀는데, 갑 위에는 미산만익비가 있었다. 비문은 대략 다음과 같다.
 "태조 고황제(홍무제)가 회하유역에서 즉위해 천하를 하나로 통일하고 남경에 수도를 세우고 천하를 다스렸다. 태종 문황제(성조 영락제)가 고황제의 대업을 이어받아 북경으로 천도했다..."
 3월 초6일.  漢고조의 고향인 패현(沛縣)에 도착했다. 패현의 동남쪽에 사정역이 있는데, 漢고조가 젊을 때 사수정 정장을 했던 곳이다.
 부영이 내게 말했다. "강남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 옛날에는 조운로가 없었소. 元세조 지원 연간(1264~1294) 이후에 물길이 통하는 계책을 비로소 마련했고, 明태종 대에 이르러 평강후를 두어서 통로를 관리하게 했소. 회음(강소성)을 뚫어서 양자강에 도달하게 되니, 그 일대가 연이어져서 멀리 있는 나루까지 통해 배로 건너게 되었소." → 元순제 연간(1333~1368)에 비로소 운하를 뚫고 제방을 쌓아 갑을 설치해서 조운을 통하게 했다.
 3월 초7일.  연주부에 도착했다. 연주는 옛 魯國이다. 상천포,하천포,하서집장을 지나 곡정갑에 이르렀다. 동북쪽에 아득하게 보이는 산이 있었는데, 높거나 가파르지 않았다. 부영이 그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산이 바로 이구산(尼丘山)으로 공자가 태어난 곳이오."
 동북쪽을 바라보니 높은 산이 수백 리에 뻗어 있었는데, 마치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부영이 그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산이 泰山으로 옛날에는 대종산이라 했소. 堯임금과 舜임금, 周나라 천자가 동으로 순시했던 곳이오."
 3월 초8일.  노교역을 지났다. 동쪽으로는 齊와 魯로 통하고, 서쪽으로는 거야와 연하며, 남쪽으로는 회와 楚로 뻗었고, 북쪽으로 북경에 다다르니, 사방으로 통하는 길이다.
 유 태감이 왕을 봉하고 북경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깃발과 갑옷과 투구의 성대함, 종과 북, 그리고 관현악기 소리가 江河를 뒤흔들었다. 노교갑에 이르러 유 태감이 총으로 뱃사람을 함부로 쏘아 대는 등 난폭하게 행동했다.
 부영이 내게 물었다. "그대 나라에도 이와 같은 태감이 있소?"
 "우리 나라의 내관들은 궁중의 청소와 왕명을 전달하는 일을 담당할 뿐 공적인 일은 맡지 않습니다."
 "태상황제(明헌종)가 환관을 신임했기 때문에, 환관이 중요한 권한을 가지고 近侍가 되니 문무관 모두 그에게 아첨하며 추종한다오."
 진훤이 말했다. "의술,도교,불교 중 당신 나라에서는 어떤 것을 중히 여깁니까?"
 "우리 나라는 儒術이 중요하고, 의술이 그 다음이고, 불교는 있어도 좋아하지 않으며, 도교는 없소."
 "성화황제(明헌종)는 道와 佛 두 가지 법을 가장 중시했는데, 지금 신황제(明효종)는 그것을 일절 금지시켰습니다."
 "당신 나라는 지금 大明시대인데, 모두들 大唐이라고 일컫는 것은 어찌 된 이유입니까?"
 부영이 대답했다. "唐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까닭에 습관이 되어 버렸소."
 "우리가 이 나라에 도착했을 때, 당신 나라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가리켜 대대적오야기(大大的烏也機)라 했는데, 이는 무슨 말입니까"
 "이는 일본인이 우리 쪽의 대인을 호칭하는 것이오. 이 지방 사람들은 그대들이 일본에서 왔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했을 것이오."
 3월 초10일.  개하역에 도착했다. 동북쪽에서 흘러오는 큰 강을 물으니, 사람들이 제하의 근원이라고 했다.
 양왕과 무리가 사당 안에 들어가서 향을 피우고 신에계 제사를 지내면서 내게도 절을 하라고 했다.
 내가 말했다. "산천에 제사하는 것은 諸侯의 일이고, 士와 庶人은 다만 조상에게 제사할 뿐이오. 조금이라도 분수를 넘으면 예가 아니오. 예가 아닌 제사는 사람이 아첨하는 것이므로, 신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소. 나는 우리 나라에 있을 때도 감히 산천의 신에게 절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다른 나라 사당에 절할 수 있겠소?"
 진훤이 말했다. "이 사당은 龍王寺로 영험이 있기 때문에, 여기를 지나는 자는 모두 정성을 다해 공손히 절하며 제사 드린 후에 갔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풍파의 위험을 만날 것입니다."
 "바다를 경험한 사람에게 강 정도야 대수롭지 않소. 나는 이미 수만 리 바다의 사나운 파도와 위태로움을 경험했소. 이같은 중국 내륙에 있는 江河의 물은 두려울 것이 없소."
 진훤이 양왕에게 고했다. "이 사람에게 절을 시킬 수 없고, 또 의지를 굽히게 할 수도 없습니다."
 3월 15일.  요동사람 진기,왕찬,장경,장승,왕용,하옥,유걸 등이 장사 일로 여기에 도착했는데, 우리가 온 것을 듣고 청주,엿,두부,떡을 들고 와서 우리를 대접했다. 진기 일행이 말했다. "우리 요동성 지역은 귀국과 이웃해 義가 한집안과 같습니다. 오늘 다행히 객지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 감히 약소한 물품으로써 예를 표합니다."
 내가 말했다. "그대들의 땅은 고구려의 옛 도읍지요. 고구려는 지금 조선의 땅이니 땅의 연혁은 비록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실상은 한나라와 같소... 후한 은혜를 입으니 마치 한집안 일가친척을 본 것과 같소."
 3월 17일.  양가장역에 이르렀다. 노를 저어 고성현 앞에서 유숙했다.
 내가 부영에게 말했다. "오늘 밤은 달도 밝고 바람도 좋은데, 어찌하여 가지 않습니까?"
 부영이 말했다. "그대는 이 강에 떠다니던 시체 세 구를 보았을 것이오. 모두 강도질하고 죽인 것이오. 이 지방은 계속 흉년이 들어 서로 이끌어서 도적이 된 자가 많소. 게다가 당신들이 표류해 행장이 없어진 것은 알지 못하고, 도리어 이방인이므로 반드시 귀중한 물건을 갖고 왔다고 생각해 모두 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오. 또 앞으로 지나갈 길은 인가가 적고 도적이 들끓기 때문에 가지 않는 것이오."
 "이번 행로에서 영파부의 도적을 만났는데, 평생 서로 만나고 싶지 않은 게 도적입니다."
 "대개 중국사람의 심성은 북방은 힘이 세고 몹시 사나우며, 남방은 부드럽고 온순하오. 영파의 도적은 강남인이므로 혹시 도적이 되었어도 대체로 빼앗기는 하지만 살인은 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가 몸을 보전할 수 있었소. 북방인은 빼앗고 반드시 살인해 도랑과 구덩이에 내버리기도 하고 강과 바다에 던져 버리기도 하오. 오늘 떠다니는 시체를 본 것으로 알 수 있을 것이오."
 3월 18일.  안덕역에 도착했다. 진훤이 물었다. "당신 나라에서는 손님을 대접할 때 차를 내놓습니까?"
 "술을 쓰고 차는 사용하지 않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손님을 대접할 때 모두 차를 쓰는데, 정이 두텁고 멀리서 온 사람이면 술을 쓰기도 합니다."
 내가 부영에게 물었다. "달단,타타르족이 혹시 침입해 오기도 합니까?"
 부영이 말했다. "전에는 침입이 있었지만, 지금은 변방을 구분해 진수(鎭守)가 병사와 군마를 거느리고 항상 지키고 막으니, 침범하지 않소."
 밤에 덕주를 지났다. 부영이 내게 말했다. "태상황제(明헌종 성화제)의 同母 동생이 어질고 덕이 있어 魯를 봉지로 봉하고 魯王으로 불렀는데, 덕주의 경계에서 300여 리 떨어진 땅에 있어서 그 때의 사람들이 德王이라고 칭하오."
 "덕왕은 어째서 북경에 있지 않고 외방에 있습니까?"
 "왕의 형제가 북경 안에 있어서 다른 마음을 갖는 것을 두려워해, 16세 이상이 되면 모두 왕으로 봉해 밖으로 내보내오."
 "덕왕은 산동의 관할지역에서 자기 뜻대로 정사를 펼 수 있습니까?"
 "王府와 各司의 관리가 모든 정사를 맡고, 교수관과 호위관이 있어 왕과 더불어 詩書를 강론하고, 射御(궁술과 말타기)를 사열할 뿐이오. 정사를 행하는 것은 왕이 할 수 없고, 모든 것이 조정에서 나온다오."
 3월 19일.  제남부의 양점역에 도착했다.
 3월 21일.  창주의 발부창에 도착했다. 漢나라 때의 발해군이다. 강변에서 장대 위에 사람의 머리를 매달아 사람들에게 보이고 있었다.
 부영이 말했다. "저것은 강도의 머리요. 이 지방에는 예로부터 도적이 많고, 사람을 겁탈하고 죽이는 일이 허다하오."
 "회하를 지난 이후부터 병부,형부,이부 등 각 사관원 선박의 왕래가 끊이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지금 천자(明효종 홍치제)께서 고명한 덕이 있어, 조신이 이전에 행한 일을 밝혀 작은 과실이 있는 자는 모두 관직을 낮추고 좌천시켰소. 下路 중에 석패(錫牌)를 차고 돌아가는 자는 모두 좌천되어 고향으로 내려가는 朝士요."
 "조신들 중에는 좌천되는 사람이 많은데, 어찌 환관들을 물리치지 못하고 그들 마음대로 행세하게 합니까?"
 "환관 중에도 죽음을 당하고 좌천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소. 지금 운하로 京師로 가는 자는 모두 선제의 사신으로 파견되어 직무를 마치고 돌아가는데, 돌아가면 관직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오."
 "지금 천하가 다시 堯舜 같은 군주를 얻어, 현인을 기용하고 사흉(四凶)을 쫓아내 조정이 깨끗해지고 천하가 안정되었으니, 축하할 일 아닙니까?"
 "맞소. 우리 황제께서 멀리하는 자는 소인과 환관이오. 매일 친히 경연을 열고 閣老,學士들과 더불어 詩書를 강론하고 정사를 논하기를 부지런히 힘쓰고 있소. 유교를 숭상하고 도를 중시하는 뜻 역시 지극합니다."
 3월 23일.  정해현을 지났다. 내가 부영에게 말했다. "水車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부영이 말했다. "그대는 어디서 수차를 보았소?"
 "지난번 소흥부를 지날 때 어떤 사람이 호수 언덕에서 수차를 돌려 수전에 물을 대고 있었는데. 힘은 적게 쓰고 물은 많이 퍼 올리니, 가뭄을 당했을 때 농사에 도움이 될 만합니다."
 "그것을 만드는 방법은 목공이 아는 바이며, 나는 상세히 알지 못하오... 수차는 단지 물을 대는 데 사용할 뿐이니 배울 것이 못 되오."
 "우리 나라는 논이 많고 자주 가뭄을 겪습니다. 만약 그 제도를 배워 우리 나라 사람을 가르쳐서 농사에 도움을 준다면 당신에게는 한마디의 수고이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이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드는 방법을 깊이 궁리하기를 바라며 미진한 것이 있으면 여러 수부들에게 물어 명확히 나에게 가르쳐 주시오."
 "이 북쪽 지방은 모래가 많고 수전이 없으므로 수차가 소용없으니 수부들이 그 제도를 어찌 알겠소? 내가 잠시 생각해보겠소."
 밥을 먹는 동안 부영이 간략하게 기계의 형태와 운영방법을 말해주었다.
 

3월 24일.  천진위를 지났다.

3월 25일.  부영이 말했다. "절강삼사에서 그대들이 표류한 일을 상주한 표문에는 본래 京師에 도착해야 할 기한이 4월 1일이오. 내가 표문을 받들고 가는데 기한 내에 도착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이 역에서 역마를 타고 먼저 경사로 향할 것이오. 훗날 병부 앞에서 서로 만나도 함부로 읍례를 해서 아는 척해서는 안 될 것이오. 새 천자의 법도가 엄하기 때문이오."
 3월 26일.  큰 바람이 불어 모래바람이 하늘에 가득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뗏목을 탄 도적 10여 명이 우리 배에 와서 겁탈해 맞붙어 싸웠다.
 진훤이 말했다. "이처럼 도적이 멋대로 때리고 노략질을 하니, 당신 무리를 나누어 각자가 서로 도적을 경계해 조심해서 밤을 보내십시오."
 천진위 이북은 흰 모래가 평야에 아득히 깔려 있었다. 광활한 들에는 풀이 없으며, 오곡도 자라지 않고, 인가도 드물었다. 曹操가 오환(烏丸)을 정벌할 때 장수를 파견해 호타하로부터 노하와 사하로 들어가게 한 곳이 바로 이 땅이다. → 오환은 본래 東胡다. 漢나라 초기 흉노의 모둔선우에게 멸망당했다. 살아남은 부족이 오환산에서 거주해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짐승을 잡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207년 조조가 오환을 평정해 대부분이 선비의 여러 부락에 예속되었고, 북위의 화복통일 이후에는 점차 漢민족에 융합되어 다시는 동양사에서 그들의 집단적인 활동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3월 28일.  북경 옥하관에 도착했다.
 3월 29일.  우리는 차례로 시랑,상서,낭중,주사가 있는 관청을 방문했다. 낭중 등이 물었다. "그대가 데라고 온 사람 중에 죽은 사람은 없는가?"
 "우리 43명은 바다와 같은 황제의 은혜에 힘입어 모두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그대의 국왕은 책을 좋아하는가?"
 "우리 국왕은 하루에 네 번 儒臣을 접하시며 학문을 좋아하고 남의 장점 취하기를 즐겨 하십니다."
 저녁에 우리 말을 잘 아는 하왕이라는 자가 와서 말했다. "당신 나라의 하책봉사인 재상 안처량 등 24명이 여기에 와서 40여 일을 머물다가 지난 3월 22일에 돌아갔습니다."
 단 7일 차이로 본국의 사신을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통한의 일이었다.

4월 - 황제로부터 상을 받다.

4월 초3일.  이상이 와서 말했다. "나는 조선어 通詞입니다. 당신 사정은 당신 나라의 재상 안처량이 이미 자세히 알고 돌아갔습니다."
 4월 초6일.  유구국(琉球國) 사람 진선과 채새 등이 떡과 음식을 풍성하게 준비해와 나와 종자에게 대접했다. 이때 유구국 사신인 정의대부 정붕 등 25명이 공물을 바치는 일로 후관에 머물렀다.
 4월 초8일.  국자감 생원 양여림,왕연,진도 등이 흑두건을 쓰고 청색의 둥근 옷깃의 옷을 입고 와서 내게 물었다.
 "당신 나라의 학생들도 이런 복장을 하는지요?"
 "幼學(벼슬하지 않은 儒生)이 비록 멀리 떨어져 있는 시골이나 궁벽한 마을일지라도 모두 입소."
 "당신 나라에서도 經書에 힘씁니까?"
 "우리 나라의 과거는 經書에 정통한 자를 뽑기 때문에 학도들은 四書五經을 깊이 연구하오. 오로지 한 가지 경서에만 힘쓰는 자는 유자의 반열에 낄 수 없소."
 4월 초10일.  이서가 와서 전해주었다. "당신들이 환국할 때 탈 거마(車馬)와 관문(關文)이 왔습니다. 여기에 오래 머물지는 않을 겁니다."
 4월 12일.  우리 말을 잘 아는 이해라는 사람이 내게 말했다. "나는 사신을 따라서 당신 나라에 갔다 오기를 여섯 번이나 했습니다. 서거정 재상은 잘 계십니까?"
 4월 16일.  내가 손웅에게 물었다. "빈 여관에 머물면서 하는 일 없이 머문 지 보름 정도 지났소. 언제 귀국하게 되는 거요?"
 ​손웅이 말했다. "예부에서 상주해 내릴 상을 청한 이후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오."
 "내가 대국에 도움을 준 적이 없는데 어찌 상을 받을 수 있겠소? 바라는 것은 일찍 고향에 돌아가서 노모를 뵙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장사 지냄으로써 해야 할 효도를 마치려고 하오."
 4월 18일.  판사리 왕환이 패자(牌子)를 가지고 와서 나를 불렀다. 패에 씌어 있었다. "조선표해이관 최부는 급히 예부로 나오도록 하라."
 예부에 나아갔다. 주객사 낭중 이괴 등이 내게 말했다. "내일 아침 조정에 들어가면 상으로 의복을 지급받게 될 것이니, 吉服으로 갈아 입어야 할 것이오. 일을 마치면 즉시 되돌아올 것이오."
 "상중에 吉服 입는 것은 합당치 않소. 상복 차림으로 조정에 가는 것도 옳지 못하니, 대인께서 예제를 잘 살펴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주시오."
 "상 받을 때는 당신의 吏로 대신 받도록 하고, 모래 황제의 은혜에 사례할 때는 몸소 절을 해야 하니 참가하지 않을 수 없소."
 4월 19일.  예부의 서리 정춘,왕민,왕환 등이 와서 정보 등 40여 명을 불러가서 나는 혼자 옥하관에 머물렀다. 정보등이 대궐에 들어가서 상을 받아 왔는데, 주로 옷가지들이었다.
 이상이 정보에게 말해 내게 알렸다. "그대의 상관에게 알려서 내일 아침에 吉服을 입고 황제의 은혜에 사례하도록 하시오."
 관직이 서반인 서씨가 와서 정보 등이 관대를 갖추었는지 점검하고, 숙배절차 의례를 가르쳤다.
 나는 정보를 시켜 이상을 찾아가서 나의 뜻을 알리게 했다. "친상은 정성을 다해야 하는데, 화려한 옷을 입는다면 효가 아니오."
 이상이 말했다. "예부상서 대인과 의논했는데, 이 상황에서 친상은 가볍고 천은이 중하니, 숙배의 예를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사한 의복을 입고 오기를 틀림없도록 하십시오."
 4월 20일.  이상이 와서 말했다. "관복을 갖추고 입궐해 황제의 은혜에 사례해야 하니,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상을 당해 비단옷을 입고 사모(紗帽)를 쓴다면 마음이 편하겠소?"
 "당신이 빈소 곁에 있다면 아버지가 중하겠지만, 지금은 여기에 있으니 황제가 계실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국의 예제는 재상이 상을 당해 황제가 사람을 보내 부의를 하면 비록 초상 중이라도 반드시 吉服을 갖추어 입고 입궐해 拜謝한 연후에 다시 상복을 입습니다. 대궐 안에 최복(衰服)을 입고 들어갈 수 없으니, 이는 형수가 물에 빠지면 손을 잡아 꺼내 주는 것과 같은 權道입니다."
 나는 할 수 없이 정보 등을 거느리고 이상을 따라 장안문에 이르렀으나, 차마 吉服을 입지 못했는데, 이상이 몸소 나의 상관을 벗기고 사모를 씌우면서 말했다. "당신은 지금 이 문에서 吉服을 입고 들어가서 사은의 예를 행하고 마친 후, 다시 이 문으로 나와 상복으로 갈아입는 잠깐 동안 뿐이니, 하나만을 고집해 융통성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추세에 밀려 吉服을 입고 대궐로 들어갔다...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린 후에, 다시 나와서 상복으로 갈아입고 옥하관으로 돌아왔다.
 4월 21일.  백호 장술조가 와서 말했다. "나는 당신을 요동으로 호송할 사람입니다. 병부와 關文이 나왔으니, 2~3일 내에 떠날 것입니다."
 4월 23일.  明태조 홍무제는 남경에 도읍을 정했다. 남경은 곧 금릉으로 六朝(吳,東晉,宋,齊,梁,陳) 諸王이 도읍했던 곳이다. 明태종 영락제는 북평부로 천도해 북경으로 했으나, 남경의 치소는 이전 그대로였다. 북경은 元나라 大都의 성이었다.
 옥하는 옥천산에서 발원, 황성의 대궐 안을 지나 도성 동남쪽으로 나와 대통하가 되고, 고려장(高麗庄)에 이르러 상건하와 함께 백하로 들어간다.
 북경은 우(虞) 유주 땅이다. 周나라 때는 燕과 계(葪)의 경계로 삼았으며, 후위(386~534) 이래로 오랑캐 풍속이 성했다. 요(遼)나라(907~1125) 때에는 남경이 되었고, 金나라(1115~1134) 때는 중도가 되었다. 元나라(1206~1368) 때는 대도가 되었다. 민간 풍속이 모두 오랑캐의 것을 이어받았다.
 지금 明나라가 옛날 오랑캐의 풍속을 씻고 왼쪽으로 옷을 여미던 것을 한족의 풍속으로 바뀌게 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도교와 불교를 숭상하고, 유학은 숭상하지 않으며, 장사를 업으로 삼고 농사에는 힘쓰지 않았다.
 4월 24일.  백호 장술조와 그의 아들 중영이 수레 석 대를 구해왔다. 나는 말을 타고, 종자들은 수레 또는 나귀를 타고 옥하교에서 숭무문과 통주 신성과 구성을 지나 노하역에 도착했다. 넓은 들을 지나는 동안 민둥산이 북쪽 10리 밖에 있었는데, 모습이 마치 흙더미 같았다.
 4월 27일.  어양역에 이르러 사은사를 만났다. 해질녘에 지중추 성건, 서장관 윤장,최자준,우웅,성중온 등을 만났다. 그들은 이미 요동 동팔참에서 안처량 행차를 만나 표류사실을 알고 있었다.

5월 - 산해관을 지나 요동으로

5월 초1일.  난주 지방에 이르렀다. 중국에서는 난주를 商나라의 고죽국이라 하고, 우리 나라의 이첨(1345~1405)은 해주를 고죽국이라고 하는데, 두 설이 같지 않으니, 아직까지도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 고죽국 위치는 난하 주변임.
 5월 초2일.  난하(灤河)에 이르렀다. 난하는 장성 북쪽의 개평에서 발원하는데, 북방 여러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합류해, 아래로 흘러 정류하가 되어 바다로 들어갔다. 우리는 배로 7~8리를 지나 칠하를 건넜다. 칠하는 비여하와 합류해 영평부성 서남쪽을 둘러싸고 흘러 난하로 들어갔다. 그런 까닭으로 호성하라고 이름했다. 백이와 숙제의 묘가 호성하의 언덕 위에 있었다.
 5월 초7일.  산해관을 지났다. 산해관 밖에 망향대,망부대가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기를 秦나라가 장성을 쌓을 때 맹강녀가 이미 죽은 남편을 찾았던 곳이다.
 5월 14일.  소릉하를 건넜다. 40여리를 더 가서 대릉하를 건넜다.
 5월 16일.  광녕역에 이르러 성절사신을 만났다. 성절사 참판 채수, 질정관 김학기, 서장관 정이득,민림,채년 등을 만났다. 이들에게 고향소식을 들었다. 사신이 내게 말했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 양자강 이남을 직접 본 사람이 근래에 없었는데, 그대만이 두루 보았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소?"
 5월 23일.  요양역에 이르렀다.
 5월 24일.  우리 말에 능통한 계면이라는 승려가 내게 와서 말했다. "소승은 본래 조선인 혈통인데 소승의 부모가 도망쳐 온지 이미 3대가 되었습니다. 이 지방은 조선의 경계와 가까운 까닭으로 조선인 거주자가 매우 많습니다... 이 지방은 옛날 고구려의 도읍으로, 중국에 빼앗겨 예속된 지 천 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고구려의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어 高麗詞를 세워 근본으로 삼고, 제례를 올리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근본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했다. "당신은 淸淨, 즉 불교의 무리로 속세를 떠나 있는 자로 마땅히 산중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 승관을 쓰고 속인의 행동을 하면서 여염 속을 출입하는가?"
 "소승이 산에 들어간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 관리가 불러서 왔습니다. 대행황제(明헌종 성화제)가 불법을 존경하고 숭배해 큰 사찰이 천하의 반이고, 승려가 일반 민호보다 많았습니다. 신황제(明효종 홍치제)가 동궁이었을 때부터 평소 승려의 무리들을 싫어해서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제거하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지금 조칙을 천하에 내려 새로 지은 사찰이나 암자는 모두 철거하도록 하고, 도첩이 없는 승려는 조사해 환속하게 하는 영이 성화보다 급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삼당의 대인이 吏를 시켜 소승을 불러 오늘부터 절을 부수고 머리를 기르게 했으니, 승려들은 어느 한 곳에서 한 몸을 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곧 사찰을 철거해 민가로 만들고, 청동불상을 헐어 그릇을 만들어 머리 깎은 이들을 점차 軍伍에 충당하려는 것이니, 홍치제의 행함이 대단히 훌륭한 데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대들이 일찍이 축원하기를 '황제폐하 만만세'라고 했으니, 그대의 축원이 이와 같았으므로, 대행황제의 불교숭상이 이와 같았다. 사찰과 승려의 번성함이 이와 같았으나 대행황제의 수명이 중년도 안 되어 갑자기 붕어했으니, 그대들이 힘써 축원한 것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모든 것이 抑佛의 순리를 따를 것이라는..."
 말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계면이 사직하고 물러갔다.
 5월 27일.  오새가 와서 말했다. "총병관이 타는 말 43필과 짐 싣는 말 15필을 골라서 당신들이 본국에 돌아가도록 호송하게 했소."
 5월 28일.  요동은 옛날 우리 고구려의 도읍이었는데, 唐고종(650~683)에게 멸망해 중원에 소속되었다가, 발해 대씨(699~719)의 소유가 되더니, 후에는 遼와 金, 그리고 胡元에 병합되었다.
 5월 29일.  요동으로부터 여정에 올랐다. 요동성을 지나 올량합관, 태화문, 안정문을 지나고, 우리 조선관에 이르렀다. 유하아,탕하아,두건참,낭자산을 지나서 현득채리에 이르러 쉬웠다. 어둠을 틈타 마을 사람이 나의 모갑을 훔쳐 달아났다. 상자 속에는 사모와 낭패, 그리고 강남 사람으로부터 받은 시고(詩藁)가 있었다. 오새가 내게 말했다. "소홀히 간수하는 것은 도적에게 도적질을 가르치는 것과 같으니, 누구의 허물이겠소?"

6월 - 압록강을 넘어 한양으로 돌아오다.

 6월 초1일.  날씨는 맑았고, 일식이 있었다. 아침에 분수령에 이르렀다. 통원보를 거쳐, 이해둔을 지나는데, 마을 사람 하나가 말했다. "어젯밤에 천호 마총이 거느리는 호송군인이 먼저 여기에 도착했는데, 호랑이가 타고 온 말을 잡아채서 상처를 입혔습니다."
 6월 초4일.  압록강을 건넜다. 목사가 군관 윤천선을 파견해 나를 강변에서 위로해 주었다. 석양이 질 무렵 배로 난자강을 건넜다. 압록강과 난자강은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합류한다. 삼경에 재촉해 의주성에 들어갔다. 성은 협소하고 무너져 내렸으며, 마을도 쇠퇴하니 심히 한탄스럽다.


<역자소개>

서인범 - 동국대 사학과. 일본 도호쿠大  <대명병제사의 연구>로 문학박사. 동국대 사학과 교수. <명대의 운하길을 걷다> 등.

<역자후기> - 위대한 기록을 남긴 최부와의 만남.

 1989년 최부의 후손인 최기홍 선생이 번역한 <금남 표해록>에 소설가 이병주가 "역사를 전문으로 하는 학자들이 이만한 걸작을 완역하지 않았을 만큼 게을렀다는 사실을 깊이 반성하고 자책해야 할 것이다."라는 따가운 질책을 했다. 이병주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하멜표류기>와 더불어 <표해록>을 3대 여행기로 들었다.
 明淸시대 使行들이 중국에 가서 보고들은 견문과 선진문물에 대한 기록을 朝天錄 혹은 燕行錄이라고 한다. 현재 발굴된 407건의 연행록이 북경까지의 사행기록인 데 반해, 漂海錄은 해상에서 표류하다 중국의 강남지역에 표착한 뒤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온, 색다른 서술을 보여 준다.

 

목 차 

최부의『표해록』에 나타난 조선의 선비정신|조영록 
『표해록』을 지어 올리다 
윤1월_대양을 표류하다 
2월_하늘에 천국, 지상에 소주와 항주 
3월_조운로의 격류를 헤치고 
4월-황제로부터 상을 받다 
5월_산해관을 지나 요동으로 
6월_압록강을 넘어 한양으로 돌아오다 
발문|유희춘 
『漂海錄』願文 
최부의 가계와 생애 
표류한 43명의 명단 
위대한 기록을 남긴 최부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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