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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빵바구니' 우크라이나의 비극! 우크라이나 내전

코알라 아빠 2018. 12. 7. 17:02

우크라이나는 서방세계와 러시아 사이에 끼인 전략요충지로 국토의 절반이상이 비옥한 흑토로 덮여 있다.

수도는 키예프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한다. 면적은 약 60만㎢로 한반도의 2.733배이다. 인구 약 4,400만명(세계 33위)

GDP
약 1,263억9,000만 달러 세계 58위.

우크라이나
요약정


비옥한 들판


따라서 과거부터 러시아가 눈독 들인 땅이었고, 실제 러시아제국이 우크라이나를 오랫동안 지배했다.

전 세계 흑토지대의 25%가 우크라이나에 몰려 있다. 흑토에서의 농사는 비료가 필요 없다. 땅에 영양분이 많아 

'토양의 왕'으로 불린다. 2011년 우크라이나는 세계 3위의 곡물 수출국이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빵바구니 (bread basket of Europe)'로 불리기도 한다.


이런 풍요의 상징으로 우크라이나 국기는 푸른 하늘과 끝없는 들판을 의미하는 상단 파란색과 하단 노란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크림반도 전장터의 우크라이나 국기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축복의 땅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항상 주변 강대국들에게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아시아의 전략요충지 한반도 운명과 비슷했다.

결국 이 나라는 숙명적으로 수백 년 동안 주변국의 침략에 시달렸다.



역사박물관의 우크라이나 전쟁화


숱한 전쟁통에 이곳 여인들은 침공한 이민족들에게 끝없이 짓밟혔다. 이런 이유로 '세계 최고의 미녀 = 

우크라이나' 라는 낭설까지 생겨났다. 실제 지하철 안에서 필자보다 키가 작은 여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도 키에프를 포함하여 우크라이나  전국토에서 독일-소련군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수도 키에프에서 조금만 눈을 크게 뜨면 곳곳에서 전쟁유적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기념관, 

아프칸전 전사자 추모기념탑, 크림반도전쟁 전시관, 역사박물관의 코사크기병군단 등등.


게다가 키에프 중앙역사내 위장망이 쳐진 여행장병대기실은 오늘날 이 나라가 처한 안보현실을 잘 보여준다.





키예프 중앙역사(상)와 여행장병안내소 위장망(하)


1950년 한국전쟁 때도 수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소련 군복을 입고 참전하기도 했는데, 전쟁기념관에는 북한정부가 

우크라이나출신 군인들에게 준 훈장ㆍ표창장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한글로 된 북한정부 표창결의서, 인공기와 북한

주민사진, 미그기 앞의 우크라이나 조종사 모습 등 한국전쟁 관련 자료들이 다수 펼쳐져 있다.





북한의 표창결의서(상)와 북한내의 참전기념탑(하)


또 다른 대외전쟁 전시관은 아프카니스탄 전쟁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1979-1988년의 소련의 아프칸 침공전쟁에서 또다시 우크라이나인들은 숱한 목숨을 잃었다.


1991년 구소련체제가 해체될 때까지 우크라이나인들의 국가정체성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거대한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해체된 이후 현 러시아와 구소련연방 국가들간 분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추측컨대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현 연방국가들은 공산체제하에서는 마지못해 모스크바정권에 순종했을 것 같았다.


2014년 우크라이나는 크림반도 영유권을 두고 러시아와 또다시 피 튀기는 혈전을 치루었다.


결과는 러시아군의 압승! 

 

결국 크림반도는 러시아영토로 다시 편입되었다.





크림전쟁시 파괴된 장갑차(상) 수십 발 피탄된 우크라이나군 지프형 차량(하)


1991년 미국ㆍEU국가들은 우크라이나가 보유한 핵무기를 러시아에 반납 혹은 폐기토록 신생 정부를 설득했다.


그리고 이 나라들은 "우크라이나 안보는 우리가 책임진다"라고 확약했다.


약속대로 우크라이나 핵무기는 모두 사라졌다.


더구나 이 정부는 대폭적인 국방예산 삭감으로 순식간에 우크라이나 군대는 와해되었다.


탱크ㆍ항공기는 고철로 변했고, 군사장비의 수리부속품은 고갈되었다.


장병사기는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국민들은 자기 나라에서 전쟁이 사라진 것으로 착각했다.


2000년대 우크라이나 정국은 불안정했고 경제는 엉망이었다.


드디어 크림반도 친러시아계인들은 구 소련시절을 그리워 했다.


"차라리 우크라이나보다 러시아에 다시 붙으면 우리 삶이 훨씬 좋아질 것이다"라고 크림반도 거주민들은 생각했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에서야 비로소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국가다.


1940년대 소련의 스탈린은 의도적으로 크림반도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에 많은 러시아인들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원주민 타타르족들을 시베리아 변방으로 강제이주를 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시 이들이 히틀러에게 협조할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은 연해주의 한인들이 일본군에게 협조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다.


이런 이유로 한인 20만 명을 강제로 중앙아시이로 이주시킨 정책과 유사했다.





한인들의 강제이주 열차 탑승 전경(상) 중앙아시아 이주 한인들의 초기 생활(하)


의심 많은 한 독재자로 인해 약소국 국민들은 이리저리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2014년 크림반도 전쟁!


도시, 공항은 불타고 내전으로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죽어갔다.


민간복장으로 은밀하게 투입된 다수의 러시아 특수부대원들이 우크라이나군 포로가 되기도 했다.


포로들은 자신이 러시아 정규군이라고 밝혀도 러시아정부는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키예프 크림전쟁 전시관 (상)/ 빨간 머리의 러시아특수부대 소속 여군포로(하)


당시 푸틴은 크림반도전쟁은 내전이었고, 주민 자치투표에 의해 합법적으로 러시아에 합병되었다고 강변했다.


현재까지도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지역은 내전중이다. 이곳 역시 친러시아계 주민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뒤늦게야 우크라이나는 자주국방의 교훈을 뼈저리게 느꼈다.





크림전쟁기념관 입구 러시아군 불발로켓탄(상)/ 전사장병 사진이 부착된 기념관벽(하)


안타깝게도 미국ㆍEU도 러시아 경제제재 운운했지만 군사적 개입은 일찍부터 포기했다.


결국 자국을 지킬 최소한의 자위력을 갖추지 못하면 강대국과의 갈등에서 약소국은 짓밟힐 수밖에 없다.


한반도 주변 강국들과 한국 사이에 미래 국익충돌 요인은 무엇일까?


독도ㆍ서해EEZㆍ 이어도 등의 문제에 관심 갖고 있는 국민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설익은 "평화 놀음"이 과연 자손만대까지 전쟁 없는 시대를 보장해 줄 것인가?


살벌하고 냉정한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보다 차가운 가슴으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지혜를 우리는 키워야 될 것 같았다.



우크라이나 내전(2014년 ~ 현재)

 

1783년에 크림 칸 국이 러시아 제국에 의해 정복당하면서 크림반도에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등의 슬라브족이 들어오기 시작해

구 크림 칸 국의 다수파였던 크림 타타르족 인구는 서서히 감소했다. 당시 크림은 슬라브계 민족과 타타르인 외에도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독일인 등이 살면서 러시아 제국내의 다민족 지역이기도 하여 20세기까진 러시아인은 다수파가 아니었다.

 

크림은 러시아 제국시절에 러시아 낭만주의의 중심이기도 해서 소련시절에도 휴양지로서 사람들의 각광을 받았다. 크림은 1921년에

크림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이 되었는데,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스탈린에 의한 크림 및 타타르인의 강제이주가 진행되어

자치공화국이 폐지되는 1945년까지 러시아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가운데서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1954년에 니키타 흐루시초프의 지도하 소련의 주도로 크림 주의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크림반도로 귀속되었다. 그러나 당시엔

이것을 그냥 상징적인 의미로 보았다. 왜냐하면 두 나라 모두 소비에트 연방에 구성된 공화국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련이

존재한 마지막 해인 1991년의 주민투표로 크림은 1945년 이전의 자치가 부활했다. 

 

1992년 5월 5일에 우크라이나 공화국 크림 주 의회는 우크라이나에서의 독립을 결의하여 <크림 공화국>을 선언했다. 우크라이나

의회는 5월 15일에 독립무효를 결의했지만 흑해함대의 기지로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크림에 대해 러시아는 독립을 지지하여

5월 21일에 크림의 우크라이나 이관을 정한 1954년의 결정은 위헌이라는 의회결의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러시아는 독립을 선언한 체첸 공화국에 대해 1994년부터 무력진압에 들어가면서(제 1차 체첸 분쟁), 한편으로 자국은

체첸의 독립을 금지하면서 우크라이나에서 크림의 독립은 지지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라는 국제적 비판이 높아지자 러시아는

크림 독립운동의 지원을 없던 것으로 했다.

 

그 결과, 크림 내에서 독립운동은 구심점을 잃어 점차 조용해졌고, 우크라이나도 러시아에 적대적인 민족주의 정당의 활동이

둔화되면서 크림 의회도 우크라이나 공화국 내의 자치공화국이라는 것을 인정하여 1998년에 크림 자치공화국 헌법을 제정당했다.

또, 이 시기에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대립에 더해 크림 타타르인의 고향복귀와 권리회복에 관한 문제도 발생했다.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붕괴로 인해 크림으로 귀환을 허가받은 크림 타타르인은 서서히 크림 자치공화국으로 돌아오면서

1990년대엔 전 인구의 10~20%에 도달했다. 그들의 선조 토지반환 소송 및 이슬람으로의 회귀는 정착해있던 러시아인들과

마찰을 불러 일으켰다.

 

2008년에 모스크바에서 유리 루시코프 시장은 흑해함대 건설 제 225주년 기념식에서 <크림의 귀속변경은 위헌이며, 세바스토플은

군사도시로서 독자적인 지위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 정부는 <1997년의 세바스토플 기지대여 계약에 의해

귀속은 정당하다>며 반론에 나서 루시코프의 우크라이나 입국을 금지함과 동시에 기지대여 계약을 2017년으로 끝맺는 것을 검토했다.

 

우크라이나는 조지아와 함께 2008년 NATO 정상회담에서 장래에 가맹할 것을 약속했는데, 러시아 하원은 우크라이나가 NATO에

가맹할 경우 모든 우호조약을 파기할 것이라고 압력을 걸었다. 그러던 와중, 2014년 2월 18일에 우크라이나에서는 수도인 키에프에서

친러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측근의 뇌물수수와 부패혐의에 대한 탄핵을 주장하는 시민 봉기가 일어났다.

 

우크라이나는 오랜 기간동안 공무원의 뇌물과 횡령으로 인한 경영관리의 부실과 경제성장의 정체, 통화가치 폭락으로 인한 시장에서

자금조달이 어려워지자 유럽연합과의 관계개선에 나서, 자금을 제공받는 대신 개혁에 의한 자유화를 추구한다는 협정을 맺었다.

당시,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이 협정에 서명할 의사를 표시했지만 최종적으론 서명을 거부했다.

 

이것은 후에 유로마이단이라 불린 항의시위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그 사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러시아와 수십억 달러의 투자협정을

체결했다. 우크라이나의 치안부대는 시위진압에 나섰지만, 시위활동은 더욱 거세져 키에프 거리에서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러시아로 도망쳐 우크라이나로 귀환하지 않았다.

 

잠정정권의 발족에 부정적이던 러시아는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망명을 쿠데타에 의한 것이라 보고, 우크라이나로의 군사개입 움직임을

시사했다. 잠정적으로 발족한 신정권은 EU협정의 서명과 사법, 정치, 재정, 경제개혁에 합의하여 IMF는 개혁실행의 조건으로 180억

달러 이상의 융자를 약속했다.

 

키에프에서 일어난 유로마이단 시위대와 경찰대의 충돌모습.

키에프에서 일어난 유로마이단 시위대와 경찰대의 충돌모습.

 

 

 

우크라이나의 정국불안과 친러시아계 지역으로 경제투자에서 소외되어 상대적으로 박탈감이 강했던 크림 자치공화국에서는 이를 기회로

우크라이나에서의 완전한 독립 혹은 러시아로의 귀속을 희망하게 되었다. 허나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탄핵 후, 임시로 우크라이나 대통령

직에 올랐던 올렉산드로 투르치노프는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의 일부이며, 분리를 <심각한 위협>이라고 경고했다.

 

새로이 우크라이나 수상으로 등극한 아르세니 야체누크도 <크림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우크라이나의 일부이다>라고 천명했다. 그리고

크림 자치공화국의 독립시도와 주민투표 등은 모두 위법이라고 규정했다. 이 때문에 크림에 살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본국에 대해 치안의

유지와 분리주의자의 위협에 대해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크림 자치공화국은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복귀와 러시아의 경제적 지원을 요구했다. 크림 정부는 야누코비치를 우크라이나의 합법적인

대통령으로 인정하면서도 그의 도덕적 책임은 비판했다. 인터폴의 수배명단에 오른 야누코비치는 로스토프에서 개최한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도둑놈들이 나라를 훔쳤다면서 러시아에 대해 군사개입을 요구했다.

 

한편, 러시아 하원의 CIS 문제담당위원회는 레오니드 슬루츠키를 단장으로 크림 자치공화국의 수도인 심페로폴을 2월 25일에 방문하여

<만약 크림 자치공화국 의회 혹은 주민이 러시아와 함께 할 것을 희망한다면 러시아는 이 요청에 대해 고려할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들은

상황을 살핀 후 조속히 손을 쓸 것이다>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또, 러시아가 참가하는 크림 지역의 주민자치투표에 대해 아직 성급하다고 발언했다. 후에 슬루츠키는 크림의 보도진에게

크림에서 주민의 러시아 연대를 획득하기 위한 과정에서 벌어진 단순한 오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만약 러시아의 동포가 위험에

직면한다면 당신들은 우리들이 여기를 떠나지 않을 것임을 알아주기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2월 25일의 크림 의회에서 슬루츠키는 야누코비치가 우크라이나의 합법적인 대통령이라는 성명을 냈다. 이 날 러시아 하원은

러시아에서 이탈하지 않는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인들이 러시아와의 연대를 구축하기 위한 방책을 발표했다. 2월 26일에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제 2 육군사령부와 서부 군관구에 대해 경계태세 명령을 내렸다.

 

외신들의 군사작전 의혹에 대해 러시아의 국방장관인 세르게이 쇼이구는 우크라이나의 불온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2월 27일에 러시아 외무성은 크림 반도의 러시아계 주민들에게 러시아 시민권을 부여하는 신헌법 초안을 정부에 제출했다. 이에 서구

유럽측과 우크라이나는 도발적인 행위라며 중단을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위기해결을 위한 합의서라며 이를 거부했다.

 

2월 28일에 러시아의 SNS에서는 우크라이나로 향하는 지원병 모집운동이 일어났다. 푸틴 대통령은 EU 수뇌부와의 전화회담에서

<현저한 폭력의 증가를 용인할 수 없는 중대한 지경에 이르렀고 우크라이나의 정상화 필요성을 느낀다>고 전달했다. 러시아 의회는

러시아인과 흑해함대의 안전보장을 위해 크림에서 군대의 한정적인 파견에 찬성했다.

 

3월 2일에 모스크바에서는 2만 7천명 규모의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개입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1만 5천, 크라스노다르에서는 1만 2천명이 군집해 집회는 러시아 국영방송국을 통해 보도되었는데, 이는 사전에 러시아 정부가 용인한

시위였다. 

 

3월 4일에 크렘린궁의 기자단에 대해 푸틴 대통령은 만약 우크라이나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러시아가 맺은 조약을 체결하지

읺는 새로운 나라>라면서 정세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발표했다. 푸틴은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언급하며 혁명결과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고 그것은 이전과 단절된 새로운 국가가 창설되는 것이라고 술회했다.

 

하지만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과거부터 댓가를 지불하지 않았다고도 말했다. 러시아의 정치가는 이미 14만 3천명의 우크라이나인

난민이 러시아에 있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외무성은 러시아에서 난민이 증가하고 있다는 주장에 반론했다. 우크라이나 외무성의

정보제작부 담당관인 예브헨 페레비니스는 러시아가 크림에서의 행동을 정당화하기위해 국제사회를 기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월 19일에 러시아 외무성은 유로마이단 혁명을 <갈색 혁명>이라고 불렀다. 갈색은 나치당 돌격대의 제복색으로 나치당의 권력장악을

빗댄 의미이기도 했다. 3월 18일에 푸틴은 크림 자치공화국 수상, 최고회의 의장, 세바스토플 최고의장을 모스크바로 불러 10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크림 및 세바스토플 특별시의 러시아 연방가맹에 관한 조약>에 조인했다.

 

러시아 의원 대부분이 지켜보는 가운데 4명이 조약문서에 사인을 마치자 러시아 국가가 흘러나와 러시아의 애국심을 획책하는

연출로 대회장의 흥분은 절정에 달했다. 조약 후 푸틴 대통령은 <크림의 러시아로의 복귀>에 관한 연설을 크렘린 궁에서 46분간에 걸쳐

연설했다.

 

푸틴은 연설 중 <크림은 고대 그리스의 케르소네소스가 있던 땅으로, 블라디미르 1세가 세례를 받은 토지다, 이것은 크림이 정교도

고유의 땅>이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영웅도시 세바스토플 및 발라클라바, 케르치 같은 러시아의 역사상 성지가 크림에 있는 것과

동시에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크림 타타르인이 공존한 역사를 지닌 크림은 다민족국가 러시아의 축소판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푸틴은 <러시아 혁명 후, 스탈린에 의한 크림 타타르인의 강제이주를 불공정한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 후 1954년의 흐루시초프에 의한

크림의 우크라이나 귀속변경은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 대기근에 대한 배상으로서 고위관료의 밀실논의에 의해 실행되어진 것으로

주민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이어서 <1991년의 소련붕괴로 탄생한 15개 공화국은 독립국가연합으로서 모이는 것을 기대했지만 실현되지 못한 채 크림은 한 자루

감자포대처럼 우크라이나에 건네지고 말았다. 그 후 보리스 옐친 정권하의 경제적 혼란 속에서 크림은 러시아로 복귀한다는 말을

꺼내지도 못한 채 우크라이나에 잔류하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푸틴은 <1999년에 푸틴 정부가 수립되고 2000년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크림과 흑해의 국경에 관한 협상을 진행했지만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우크라이나의 경제는 악화되어 오렌지 혁명이 일어나고 2014년엔 폭동으로 성립한 신정부가

러시아어를 공용어에서 제외하는 언어법을 만들어 배외주의적 정책으로 나섰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은 크림의 러시아계, 크림 타타르계 주민이 궐기하고 독립을 원하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푸틴은 연설하며

우크라이나의 잠정 정권을 비판하며 <크림의 독립은 정통성이 있으며 러시아는 이를 편입하는 형태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발언했다.

 

또 푸틴은 <러시아의 크림합병은 서방에 의한 코소보 독립과 같은 것으로 유고슬라비아의 알바니아인에게는 용인되면서 왜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인과 크림 타타르인에겐 인정하지 않는가? 이전 독일의 통일시 영국의 대처는 반대하고 프랑스의 미테랑은 위기를 표시했는데

러시아는 성실히 대응했다. 이에 독일은 크림의 편입을 러시아의 통합이라고 이해한다고 대답했다>고 했다.

 

푸틴은 <크림의 편입은 민족자결의 원칙에 기초한 것으로 국제법과 UN안보리가 말하는 판례에도 부합하는 것이다>라며 정통성을

주장했다. 그 한편으로 <코소보 문제시 NATO는 공습을 했고 아랍의 봄 당시에 리비아를 공격한 서방측은 러시아를 늘 비판하는데

그들은 국제법을 준수하면서 평화적인 분쟁해결에 나섰었나? 아니다. 코소보와 크림은 다르다는 미국은 힘을 신봉하며 미국만은

특별하다라는 일국예외주의를 멈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푸틴은 미국과 서방의 민족문제 대응을 비판하면서 <러시아처럼 국제법을 준수하는 나라는 없다>고 발언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일체성을 존중하지만 정치적 야심으로 나라를 동서로 분단하는 우크라이나의 정치가는 다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NATO 가맹을 토의했다는 일은 피하면서 <세바스토플에 NATO의 함선이 정박하는 것을 러시아는 용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친러시아계 무장세력이 장악한  슬랴반스크 지방의회 건물의 모습.

 

 

2014년 2월 26일에 푸틴 대통령이 지시한 러시아군으로 확인되어진 친러시아파 무장세력은 크림 반도의 주도권을 서서히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크림 반도에서는 러시아로의 합병에 관한 국민투표가 진행되어, 그 결과 83%의 투표자 중 96%가 찬성하였다.

하지만 이 국민투표는 EU, 미국,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의 크림 타타르인에 의해 위헌,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난받았다.

 

3월 17일에 크림 의회는 우크라이나에서의 독립을 선언하고 러시아로의 병합을 제창했다. 3월 18일에 러시아와 크림 자치공화국은

<크림과 세바스토플 편입에 관한 조약>을 서명하고 21일에 비준하여 러시아의 새로운 2개의 연방구성원으로 발족했다. UN총회는

국민투표가 무효이며 러시아에 의한 크림 병합은 위법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3월 20일에 편입에 관한 조약이 러시아 하원에서 비준되고 21일에는 연방원(상원)에서 비준되어 크림과 세바스토플은 사실상

러시아령이 되었다. 2014년 4월 1일부터 약 3천명의 주민이 크림 반도에서 도망쳤는데, 이들 80%는 크림 타타르인들이었다. 이전인

3월 1일과 6일에 걸쳐 친러무장세력은 도네츠크 주의 도네크츠 정부청사를 점거햇지만 우크라이나 보안청에 의해 퇴각했다.

 

3월 13일에 도네츠크에선 잠정정부파와 반정부파의 폭력충돌이 일어났다. 4월 6일에 약 1~2천명의 친러파 세력은 도네츠크에서

집회에 참가하여 우크라이나에서의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를 요구했다. 그 후 200명의 분리주의자와 친러파 세력이 정부청사로 난입해

문과 창문을 부수었는데 정부당국자는 일요일이라 부재중이었다.

 

분리주의자는 임시의회가 정부당국에 의해 개최되지 않을 경우, 러시아로의 병합을 묻는 국민투표를 외치며 국민의 권한에 의해

모든 지방의원을 무시하며 4월 7일 정오에 일방적 관리조치를 선언한다고 했다. 이 날 분리주의세력인 <도네츠크 공화국>의 지도자는

도네츠크 주의 러시아 연방병합에 관한 국민투표를 늦어도 5월 11일까지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들은 평화유지를 위한 병력파견을 푸틴 대통령에게 의뢰했다. 4월 12일에 방탄복과 전투복, AK소총을 장비한 복면 무장세력은

슬랴반스크의 집행위원회 건물과 우크라이나 보안청 사무소를 점거했다.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인 아르센 아바코프는 이 무장세력을

테러리스트라고 판단해 우크라이나 특수부대에 의한 건물탈환을 발표했다.

 

경찰서와 정부청사의 분리주의 세력에 의한 강탈은 도네츠크, 클라마토르스크, 골로프카, 마리우폴리, 에나키에보를 포함한 여러

도시에서 발생했다. 우크라이나 잠정 정권의 투르치노프 대통령은 건물탈환을 향한 전면적인 대테러작전을 개시하도록 명령했다.

4월 16일에 클라마토르스크의 무장세력은 우크라이나군 장갑차를 탈취하여 우크라이나군을 슬라뱐스크 외곽으로 몰아냈다.

 

4월 16일 밤에 약 300명의 친러파 무장세력은 무리우폴리의 우크라이나군 부대에 회염병을 던지는 등의 공격을 가했다. 우크라이나의

아바코프 외무장관은 <우크라이나군이 발포하여 3명의 습격자를 사살했다>고 발표했다. 4월 17일에 정전협정을 체결했지만 도네츠크

주의 정부청사 점거는 끝나지 않았고, 마리우폴리의 친러무장세력은 <이 협정발표에 배신감을 느낀다>라고 발표했다.

 

결국 4월 23일에 정전선언은 슬라뱐스크에서 분리주의자들이 검문소를 습격하면서 깨졌다. 유럽안전보장 협력기구(OSCE)는

슬라뱐스크의 시 청사, 우크라이나의 보안청 건물, 경찰서는 자동화기로 무장한 세력에 의해 요새화되어 항의자도 없는 침묵의 도시로

변했다고 보고했다.

 

4월 24일에 우크라이나군은 슬라뱐스크에 대해 공격에 나섰는데, 우크라이나 잠정 정부는 4월 25일에 슬라뱐스크를 완전히 봉쇄하고

대테러작전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파의 충돌과 대치는 이어지고 있는데 2018년 1월 18일에

우크라이나 최고의회는 동부 2주를 재통합을 위한 점령지, 러시아를 침략국으로 규정하며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동부해방을 위한

군사행동을 인정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크림반도를 둘러 싼 일련의 사태는 친러파 주민들과 러시아군에 의한 무력으로 인해 크림 반도와 세바스토플의 러시아 귀속으로 끝났지만

아직도 우크라이나 동부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친러분리세력과 우크라이나 정부간의 충돌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러시아는 크림의

편입과 우크라이나 동부 내전에 관여의혹으로 서방의 경제제재를 받았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분업관계였던 서부의 산업(특히 군수산업)을 잃으면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중국은 대립중인 양자간을

어느 누구도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뒤로 지원하며 경제적 곤궁에 처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쌍방에 고성능 무기와 기술을 빼내려고 했다는

의혹을 사고있다.

 

한편, 2014년 7월 17일에 말레이시아 항공 17편이 네덜란드를 출발해 자국으로 돌아가던 중, 우크라이나 영공에서 발사된 SA-11 부크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는 사건이 벌어져 280명의 탑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사건에 대해 러시아측은 우크라이나

군이 발사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고, 우크라이나측은 친러파 무장반군이 발사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출처 : 앤드류 보윈 <돈바스의 혼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개입>, 사진은 라이센스가 필요없는 무료공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