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바로 읽기

스탈린도 유대인?

코알라 아빠 2019. 3. 6. 16:02

스탈린의 풀네임은 조셉 비사리오노비치 쥬가슈빌리다. 

(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Джугашви́ли )

그런데 그루지아 말로 슈빌리(shvili)란 ~의 아들이라는 뜻이며 쥬가(Djuga)란 유대인을 말한다.
즉, 쥬가슈빌리는 유대인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 조시프 다비드 쥬가슈빌리는 전형적인 유대인식 이름이다. 한편 그는 혁명기간 중 "코흐바"라는 가명을 사용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유대인의 반로마 운동을 이끌던 사람의 이름이다.
또, 러시아인과 그루지아 인들은 이름을 바꾸지 않지만 오직 유대인만이 이름을 바꾼다.

스탈린의 모친 에카테리나는 가정부였고, 그녀가 일하던 지역의 유지인 유대인 다비드 파피세니도프는 스탈린의 진짜 아버지로, 스탈린이 집권하던 중에 파피세니도프는 종종 크레믈린에 들리곤 했다.


스탈린의 아내들은 세명 모두 유대인이었다.

첫째 부인 에카테리나 스브니츠는 야코프를 낳았다. 둘째 부인 카드야 알레비야는 바실리와 스베틀라나를 낳고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셋째 부인 로자 카가노비치는 소련의 공업화를 주도하던 인물 중 한명인 라자르 카가노비치의 동생이다.

1967년 미국으로 망명한 스탈린의 딸은 새엄마의 사촌으로 라자르 카가노비치의 아들인 미하일과 결혼했으며 그녀는 평생 네번 결혼했는데 그중 세명이 유대인이었다.


몰로토프도 유대인과 결혼했으며 그의 처남은 코네티컷에서 무역업을 하던 샘 카르프다.

몰로토프는 유대계 혼혈로 그의 딸 스베틀라나는 스탈린의 아들 바실리와 약혼했었다.


소련의 독재자였던 스탈린은 히틀러보다 더한 인물로 유대인 혐오주의자였지만 유대인들을

철저하게 이용했고 한편으론 탄압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소수민족 대량 학살과 정적 제거,붉은 군대내의 대규모 숙청을 아무런 꺼리낌없이 자행했습니다.

소련의 태생부터 그러했지만 권력층의 상당수가 유대인이었던 소련에서 평소 그가 그토록 

혐오하던 유대인에 의해 1953년 3월 1일에 스탈린이 피살되고 3월 5일에 스탈린의 사망이 

외신 보도됩니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다릅니다. 히틀러는 민족우월주의자였죠. 아리아인으로 그가 생각하는 사람에 부합되지 않으면 도태시킵니다. 반면 스탈린은 자신의 권력에 반대한 자들을 학살한 거고요.

러시아 및 국제 노동운동의 지도자. 고리시(현 그루지야)에서 농민 출신의 구두 수선공 아들로 태어나 그 지방의 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5세에 혁명운동에 참가하였고, 그 때문에 신학교에서 추방되었다. 1901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위원으로 피선되고, 1903년 체포되어 3년의 유형을 선고받았지만, 유형지에서 탈출하였다(그는 그 후, 1908년, 1910년, 1912년, 같은 해, 1913년 등 6회에 걸쳐 체포되어 유형에 처해졌지만, 그때마다 탈출하였다.). 러시아 제1차 혁명시기에는(1905~1907) 자카프카즈에서 활동하였다.

그 동안에 「무정부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를 신문에 발표(1906~1907). 혁명 후의 반동 시대에는 바쿠에서 활동, 3번의 검거ㆍ유형ㆍ탈출 후에는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였지만 거기에서도 2번 검거되었다.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를 1913년에 잡지에 발표. 6번째로 검거된(1913) 후,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탈출. 같은 해 5월에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이 되고 종래부터의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논쟁을 계속하였다. 레닌의 사후에(1924) 당 서기장이 되었다. 트로츠키주의와의 투쟁에서 승리하고 이것을 당내에서 숙청. 제8회 소비에트 대회에서는 스탈린에 의한 신헌법이 채택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 독일의 침략에 대응하여 군(軍) 총사령관으로서 조국방위 전쟁을 수행하였다. 1938년에 발표하였던 『소연방 공산당 소사』에서 「사적 및 변증법적 유물론」을 썼는데, 이것은 소련 철학계뿐 아니라 세계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사후,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1956)에서, 스탈린에 의한 '개인 숭배'가 초래했던 해악(害惡), 그리고 그가 수행하였던 정치적 과오나 이론적 결함이 비판되고 공개되었다.


정권을 위한 숙청 작업이 그 당시 공산주의하에 진행이 되었습니다


정신발달장애인들을 특별하게 목표로 하여 학살을 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노선과 다른 사람은 반대로 장애인이나를 불문하고 학살을 하였다는 시각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ㅡ스탈린에 대하여 ,,,,,,


러시아. 그 한없이 넓으면서 차디찬 땅은 예부터 냉혹하고 잔인한 독재자의 손에 큰 변혁을 겪고는 했다. “뇌제”라 불리던 이반 4세는 차르 체제를 수립했고, 표트르 1세는 러시아를 서구 제국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거대한 근대 서구 제국이면서도 여전히 봉건적 굴레와 악습을 다 벗지 못한 채 모순과 혼란을 품고 있던 러시아에는 또 한 차례의 대변혁이 요구되고 있었으나,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들에서는 그런 변혁을 이끌 만한 강력한 지도자를 찾을 수 없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병약한 몸으로 개혁을 추진하다가 암살당했고, 뒤를 이은 알렉산드르 3세는 근본적 문제 해결 없이 탄압만 거듭했다. 그리고 니콜라이 2세는 변혁을 주도하기에는 기량도 대담함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이런 가운데 지식인과 민중의 불만은 점점 과격한 정치운동으로 나타났고, 그 중에서도 가장 과격한 집단이 볼셰비키였다.


모든 반정부 활동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차르를 피해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주로 서유럽 국가들에 망명해 활동하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런던 대회에서 레닌이 보다 과격한 노선을 들고 나와 온건파와 분열한 후, 그들 스스로를 부르게 된 별명이다. 이들은 마르크스의 기본 노선대로 먼저 부르주아 혁명을 달성한 다음 순차적, 평화적으로 정권을 획득한다는 입장은 러시아에서는 절대로 비현실적이라 보았고, 소수의 직업혁명가들이 당분간 권력을 독점, 후진적인 사회를 이끌고 가는 “전위정당”을 구성할 것, 그리고 봉건왕조와 지배계급에 맞서 폭력혁명으로 정권을 일시에 쟁취할 것을 주장했다.


“다수파”라는 뜻인 이름과 달리, 본래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그룹에서도 소수였으며 러시아 본토에는 거의 지지자가 없었다. 하지만 난국을 전환화려는 속셈으로 차르가 추진한 개혁, 그리고 전쟁은 오히려 이들을 태풍의 눈으로 떠올려 주었다.


개혁을 요구하던 시민을 대량학살했던 1905년 1월의 ‘피의 일요일’을 계기로, 누르면 누를수록 민중의 압력이 더욱 거세지는 것을 본 차르는 결국 그해 10월 30일 이후 근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도입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선조가 물려준 절대 황권을 포기할 의사가 없었다. 눈가리고 아웅 식의 제도개혁에다 친정부적인 대토지 소유 귀족들을 노골적으로 밀어 주는 정책이 거듭되자, 본래는 개혁의 주역이었어야 할 자유주의자와 온건개혁파는 설 땅을 얻지 못했다. 그 대신 지나치게 과격하다 하여 민중에게도 외면되어온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착실히 커져갔다. 


'세상 바로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오니스트의 맨얼굴  (0) 2019.07.19
서간도, 북간도, 연해주 위치  (0) 2019.04.19
세계 유대인과 시오니즘  (0) 2019.03.06
히틀러가 유대인을 증오하게된 이유  (0) 2019.03.06
조지 소로스  (0) 2019.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