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관련

[스크랩] 지도로 보는 간단한 중국 역사

코알라 아빠 2018. 12. 26. 16:33

<한글판 중국지도>

 

 

<오늘날 중국의 영토>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가짜 중국 역사 지도>

 

 삼국시대 수도(위: 낙양->허창), 촉:성도, 오: 건업)

 

 <지도로 보는 간단한 중국역사>

<아래 지도  : 우리가 흔히 아는 가짜 삼국지 지도 : AD3-4세기> 

 

이 지도는 한대의 영향력이 미치던 영토로 착각해서 그린 것이다. 한족이 직접 지배한 영역이 아니다

 

<그림 : 진짜 삼국지도, 실제 한족이 지배한 영역> 어째서 그러한가?

 

또는 다른 지도(^^)

 

 

 

삼국의 영토는 한대의 영토를 기초로 하고 있다. 한대의 영토 중에 한족이 직접 지배한 영토가 삼국지의 무대가 된다. 기타 지역은 아직 한화되지 않은 이민족이 살던 곳이다. 중국이 분열되면 당연 독립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림 : 중국의 고대 상(은)나라-주나라-춘추전국시(BC7-BC4세기)

-진나라(BC3세기)-한나라(전한) 영토>

 

오리지날 한족 영토

 

원래는 <하-은-주-한>으로 간다고 하지만 <하>의 유적은 아직 발견된 적이 없다. 그 전에 고조선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기록상으로만 존재한다. 처음 중국은 하나라에서 시작하니 <화하족>이라 불렀다. 그리고 동쪽의 <동이족>과 결합해서 <한족>이라 부른다. 중국을 한족이라 부르는 것은 한나라를 그 시작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나라의 수도는 낙양과 장안으로 화하족의 중심이다. 그러나 중국 문명은 황하에서 시작되었고 동이족의 영토다.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것으로 한자가 처음 만들어 졌다.

그러니 동이족이 바로 한족이다

 

<그림 : 중국 북쪽의 지명>

 

<우랄 알타이 어족>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 <우랄 어족>과 <알타이 어족>으로 나뉜다. 그 알타이가 알타이 산맥에서 나온 것이다. 우랄은 우랄 산맥에서 나온다. 우랄은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해 준다. 알타이는 아시아의 중앙에 있다.

 

<그림 : 중국 춘추전국시대 BC7-BC4세기, <진/한>통일 전의 영토>

이 영토가 한나라의 영토가 된다.

 

 

요동은 고조선의 영토로 추정되지만 연나라의 공격으로 평양으로 후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요동이 진나라때 중국 영토에 속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은 만리장성의 끝이 요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영토는 나중에 고구려에 의해서 수복된다.

 <연/제/초>는 동이족의 영토였다.

반면 <진/위/한>은 화하족의 영토였다.

이곳에 낙양과 장안이 있다. 이 수도는 주나라때부터 당나라까지 수도로 쓰인다.

 

<그림 : 중국 고대의 주변 민족>

                                          .

 

중국의  <진대 BC 3세기>는 유럽의 <알렉산더>시대에 해당된다.

           <한대 BC3세기-AD3세기>는 유럽의 <로마>에 해당된다

중국에서 흉노가 사라질 무렵 유럽에선 훈족이 나타나서 로마를 멸망시킨다.

중국에서 돌궐이 사라질 무렵 서쪽에선 투르크 왕국들이 생기며 동로마를 멸망시킨다. 몽고족이 동서를 왔다갔다 할 수 있다면 과거 흉노와 돌궐이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과거에는 기마 유목민의 군사력이 최강이었다.

로마도 훈족에게 조공을 받쳤고, 한나라도 흉노에 조공을 받쳤다.

 

<그림 : 흉노족의 이동> 기록을 좇아서 찾은 추정 위치

 

중국에서 이미 동서로 흉노족이 갈라진 기록이 나온다.

서쪽에서 조금만 더 가면 바로 유럽이다.

 

<그림 : 고대의 우리나라 민족 이동 경로 추정>

우리민족을 북방 기마민족이라 가정할 경우

 

우리 민족을 북방 유목민 중의 어느 한 종족으로 가정한 경우 민족 이동 경로이다.

중국인이 맥족이라 부르던 종족이 직계조상으로 추정된다.

몽골과 고구려의 관계는 몽골의 신화에서 발견되는 유사점으로 추정한 것이다.

코리(=구리=구려=고려=Corea=Korea)족고주몽과 같은 활솜씨가 좋은 자에 대한 전설이 있다. 하나의 부족이 둘로 갈라지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나중에 몽골에서 징기스칸이 나온다.

 

<그림 : 중국 한대의 동북아 종족>

 

여기서부터는 이미 알고 있는 역사의 세계이다. 한나라는 고조선을 멸망시켰고, 한반도에 한4군을 두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건국되는 과정에 있다.

기마 문명은 서쪽 터키지역에서 중앙 아시아 초원지대와 한반도 신라와 가야까지 걸쳐있다. 아주 옛날 하나의 조상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한반도와 일본에도 원주민이 있었다.

결국 한반도와 일본은 원주민과 기마유목민의 혼혈이라고 봐야 한다.

특히 한반도는 <기마유목민+한족+원주민 = 한민족>이 된다.

 

<그림 : 한나라와 고구려>

 

고구려가 막 태어나고 신라/백제/가야/왜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상태이다

우린 우리 역사를 한나라의 기록을 통해서만 볼 수 밖에 없다.

고조선의 역사를 중국 기록에서 찾았듯이 고구려의 역사도 중국 기록에서 찾게 될 것이다. 우리 민족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그림 : 한나라 때의 지방 명칭> 

중원의 주요 주(소국)의 명칭이다.

 

조조는 청주병을 거느렸다.

청주는 산동반도이고 동이족의 땅이었다. 

 

<그림 : 전한-후한-황건적 봉기 AD 3세기 현황> 

 

여러 곳에서 다발적으로 일어난 조직적인 반란이다. 황건적의 난이 아니라 황건민중봉기이다. 중국은 종교단체로 인한 반란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최근 파룬궁(법륜공)이란 기수련 단체도 수난을 겪고 있다. 로마도 기독교계 지휘관의 승리로 기독교가 국교가 되었다. 종교란 위험한 것이다.

 

<그림 : 삼국지 AD 3-4세기의 영웅출생지>

 

서부/북부 유목민 출신 또는 그 문화 영향을 받은 영웅은 항상 악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중국인은 북방 기마민족을 아주 싫어 한다.

중국 한족은 그들의 정통성을 한나라와 촉한(유비)에서 찾는다.

그러나 위나라(조조)가 중국의 정통을 계승한 나라다. 단지 북방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무시한다.

 

동탁/여포/이각/곽사가 삼국지에서 그렇게 오래동안 나올 수 있던 것은 강력한 군대 덕분이다.

 

<그림 : 삼국지 초기 3세기 군웅들의 위치>

 

<그림 : 삼국지 1차 대전 = 관도대전 초반, 원소 vs 조조>

 

 

<그림 : 삼국지 관도대전 후반, 조조의 추격, 오환족과의 전투

 

<그림 : 삼국지 관도 대전 후반, 조조의 추격 마무리>

 

<그림 :  관도 대전 당시의 주변 민족>

 

여기 나오는 오환족은 거란족의 땅과 일치한다.

선비족이 중원으로 들어가면 그 빈 땅은 누가 차지하게 되는가?

어느 한 순간 돌궐(투르크)이라는 나라가 동방에서 시작된다.

 

<그림 : 삼국지 관도 대전의 결말, 조조의 영토> 사실상 중국의 통일 달성

 

사실상 삼국지는 여기서 끝난다. 조조가 중국을 통일한 것이다.

조조가 차지하고 있는 영토는 중원이라고 부르는 노른자위땅이다.

이곳에 태산(중국 황제가 제사지내는 곳)이 있다.

 

<그림 :  삼국지 2차 대전 = 적벽대전, 조조 vs 손권>

 

<그림 : 삼국지 적벽대전 후반, 조조퇴각

 

<그림 : 삼국지 적벽대전 결과 손권 오의 영토>

 

모든 도시들이 황하와 양자강 주변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강을 통해 배로 물자를 수송하고 이동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또한 강 주변에 물이 풍부하여 농사짓기 좋기 때문이다.

형주땅은 적벽 대전 결과로 유비가 먹었으나 촉으로 이동하고 나서 

오에 빼앗기고 만다.

 

<그림 : 삼국의 성립>

 

이렇게 하여 명목상 삼국이 성립된다.

단지 요동에 미친 연나라가 하나 있다.

 

<그림 :  1차 요동전쟁 237년, 고구려 /위 연합 vs 연>

 

유주의 장관이던 관구검이 237년~238년, 권신(權臣) 사마의(司馬懿)의 명령으로 고구려와 협력하여 연나라를 자칭한 공손연(公孫淵)이 점령하고 있는 요동을 정벌했고, 안읍후로 승진했다.

 

<그림 : 2차 요동전쟁 244년>

고구려 vs 위(관구검)=> 고구려(동천왕)의 굴욕

 

244년 고구려에 2차로 침입하여 수도 환도성을 점령하였고 동천왕(東川王)은 옥저로 도망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강한 저항을 받아 멸망시키지 못하고 군대를 물렀다.

 

고구려 초기에는 군주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전쟁에 참전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관구검은 고구려의 동천왕을 맞아 처음에는 고전했지만 결국 그를 물리쳤다.

 

이후 환도성을 공략하며 고구려의 전국토를 유린하지만 남옥저 부근에서 고구려 장수 유유와 밀우의 활약에 막히며 부장 왕기(현도태수)가 사살되는 등 피해를 입으며 위나라로 후퇴했다

  

처음엔 고구려-위 연합이 연나라를 깬다. 그 후 고구려와 위나라가 한 판 붙는다.

이 그림을 보고 느낀 것이 의외로 오래전에 중국인들이 한반도에 까지 들어와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 고구려는 멸망직전까지 간다.

 

<그림 : 제갈량의 남만 정복> 베트남까지는 가지도 못했다.

 

당시 남만이란 양자강 이남 사람을 뜻한다.

당시 동이족이 중국 동해안 평지사람들을 나타내듯이

남만은 양자강 이남 사람들을 나타낸다.

중국인들의 영토는 크지 않았다.

 

<그림 : 제갈량의 소설상의 행군로>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됨.

 

<그림 : 제갈량의 실제 예상 행군로>

 

제갈량이 놀았던 지점은 촉땅 남부 지금의 운남성 정도이다.

그러나 소설이나 게임에는 베트남까지 간 것으로 나와 있다.

남만은 베트남이 아니다.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맹획을 7번잡았다 놓아 주긴 뭐하니 그냥 힘으로 눌렀다. 그게 중국 방식이다.

 

그 다음이 제갈량과 강유의 북방공격이다.

별로 성과 없는 소모전만 벌이다가 제갈량이 죽는다.

강유 또한 전쟁만 벌이느라 국고를 탕진하게 된다.

 

위나라는 실속이 없는 전쟁을 피하려고 촉과 오를 남겨 놓는다.

그러나 사마씨가 晉나라를 세우면서 새 왕조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촉과 오를 통일하게 된다.

 

<그림 : 晉의 오나라 정벌  4세기> 간단한 촉 정벌후 대대적인 오나라 공격

 

이로써 삼국지의 시대는 끝난다. 촉과 오는 아주 쉽게 무너진다.

이로써 나라가 망하는 것은 2가지 외에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권력층의 부패와 외부의 강력한 힘이다. 

 

<그림 : 삼국의 통일 서진 4세기, 사마씨의 나라 분열, 8왕의 난과 당시 5호의 위치>

 

통일한 나라를 사마씨들이 망친다.

8왕의 난으로 서로 싸우고 있을 때 북방 기마민족 5종족이 중국을 쳐들어 온다.

 

강/저는 지금의 티베트와 위구르 족속의 위치에 있다.

위구르는 백인종과 몽골종의 혼혈이다.

서쪽의 터키가 백인종과 몽골종의 혼혈이다.

이렇게 넓은 곳을 이동할 민족은 기마유목민 밖에 없다.

선비/흉노/갈은 중국에 흡수되어 이미 사라진 종족이다.

이때부터 5호 16국(5 종족이 16개의 국가를 세우고 망하는 어지러운 세상)시대다.

 

<그림 : 5호의 침입으로 줄어든 중국 영토>

남쪽으로 쫓겨간 중국인들

<서진 263-316><5호16국 4-5세기><남북조 5-6세기>

 

이 때 중국인들이 양자강 이남으로 내려가 양자강 이남이 중국 영토가 된.

양자강 이남에선 오나라의 건업/남경이 수도가 된다.

이 지역 사람들의 말과 북방 중국어의 말이 다르다.

한국/일본/대만의 한자 발음은 남쪽 중국어와 비슷하다.

 

<그림 : 삼국 통일 후의 서진 시대>

아직 북방에 있을 때

 

<그림 : 5호의 침략후 동진 시대>

남으로 쫓겨간 때

 

<그림 : 북방민족의 5호 16국 시대 : 5세기>

 

드디어 북방 민족의 시대가 열리며 중국인의 굴욕의 시대가 왔다.

북족의 어지러운 종족들이 하나로 통일되어 간다.

이들은 결국 수나라와 당나라를 만들게 된다.

 

수/당 왕조는 북방민족(선비족)의 황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한족으로 동화한다.

그래서 육체는 유목민의 씨앗이나 정신은 한족이 된다.

 

 혼란한 시기에 고구려는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게 된다.

그러나 통일이 된 후에 우리에겐 불행이 시작된다.

<남북조시대 5-6세기> 

 

 이 나라를 통일한 나라가 7세기 수나라(선비계)이고 고구려와 2차 대전을 벌인다.

결과 수나라가 망하고 다시 8-9세기 당나라(모계가 선비계)가 통일을 하고 역시 고구려와 2차 대전을 벌인다.

 

 1차는 패배, 그러나 2차에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한반도의 삼국시대는 끝나게 된다.

 

그 전에 나당 연합이 백제를 멸망시키면서 왜는 일본으로 독립하게 된다.

 

북쪽은 고구려의 후속국인 발해가 서면서 국제는 <당-발해-신라-일본>이 성립된다.

이 때부터

한국은 신라의 후손으로 갈리며

발해는 청나라로 이어지고,

일본은 독자의 길을 가게 된다.

 

 이 때 중국에 잡혀간 고구려인들이 서쪽으로 남으로 흩어졌다.

그래서 이상한 곳에 가면 한국어와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쪽으로 간 사람들 중에 고선지장군이 있어 서양에 종이를 전해주게 된다. 

 

<그림 : 북방 기마 유목민의 복수, 수(7세기)/ 당(8-9세기)-요(10-12세기)/

  금(12-13세기)남송시대             원(13-14세기)남송 시대

 

고구려는 발해로 이어진다. 발해는 거란(요)에 망하고

당은 5대십국으로 멸망되고 나중에 금이 서게 된다.

그리고 몽고에서 징기스칸이 나오면서 원을 세우고 다시 중국을 압박하게 된다.

 

 이로써 중국의 자존심은 <漢-唐-明>3개의 나라만으로 좁혀진다.

기타 중국의 다른 나라에선 중국의 자존심을 찾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통신-고려-이씨조선-한국>으로 이어진다.

 

북방의 우리 친척은 <고구려-발해-금/원-청-중국>으로 이어진다.

 

고려는 원나라와 많은 문화적인 교류가 있고, 왕족 간의 결혼이 있었다.

그러나 서로간에 못할 짓을 많이 해서 원수지간이 되었다.

고려가 원에 협조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이 청에 협조를 했다면?

 

원은 일본을 침략하다 카미카제(신의 바람)을 만나서 모두 침몰한다.

그리고 이 징기스칸 덕분에 서양은 고려의 금속활자기술을 받고, 중국의 화약을 받게 된다. 4대 발명품이 모두 서양으로 넘어가게 된다. 왜 4대 발명품인가?

서양을 과학시대로 이끌고 최강의 군사력을 가지게 만들었다.

먼저 동로마가 투르크의 대포에 멸망하는 아픔을 겪는다.

 

<그림 : 중국의 자존심 회복, 명나라 14-17세기)>

 

원나라가 망하고 몽고족은 북쪽(=북원=>티무르왕조)으로 도망간다

그리고 명나라가 서게 된다. 

그리고 우린 조선이 된다.

명나라와 조선은 망국적인 사상으로 살던 국가들이다.

명나라 황제중에 정상적인 놈이 없었고, 조선도 참으로 이상하게 답답하게 살았다.

 

일본이 이 때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명은 후금(만주족 =청)과의 전쟁에서 지게 된다.

 

타타르가 도망간 몽골족인가? 지금의 타타르족은 러시아 쪽에 살고 있다.

지금 몽고족은 할하족이라 한다. 몽고가 이러하게 광대한 영토를 얻었는데

그 옛날 <흉노=훈, 돌궐=투르크=터키>가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고대의 고조선이 기마유목민족이라면 그런 넓은 영토는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총이 나오기 전에는 기마유목민의 전투력이 전세계 최고였던 것 같다.

 

<그림 : 다시 북방 기마민족의 세계로, 청나라 17세기-20세기>

 

앞에서 말했듯이 <고구려-발해-금-후금-청-중국>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통신-고려-조선-한국>으로 이어진다.

일본은 <가야/백제/왜-일본>으로 이어진다.

 

청나라가 한 일이 재미있다.

북방 몽골족이랑 통혼을 하고 몽고족도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 한족과는 통혼을 하지 않았다.

몽고족과 고구려 후손들이 서로 같은 족속으로 생각했단 뜻이다.

 

그리고 중국의 영토를 엄청나게 넓혀주어서 지금 중국인들에게 큰 선물을 남겨 주었다. 결국은 한족으로 동화되어 통혼이 되고 언어도 사라져버렸고

청은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며 그 힘을 잃어 버린다.

몽골은 나중에 독립하게 된다.

 

 동북공정은 이 청나라 역사(고구려~청)를 숨기는 것이다.

 청=현대중국=고구려의 후손=고구려인은 중국인!?

고구려는 중국과 한국을 연결하는 고리다.

 

<그림 : 청나라가 한족과 북방기마유목민을 구분하던 경계>

 

청나라도 처음엔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중국은 자신들의 뿌리를 한족에만 두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한중일이 모두 형제처럼 지낼 수 있게 된다.

 

<그림 : 청나라가 준 선물, 동남쪽 영토>

 

무협지에 잘 나오는 반청복명의 근거지가 대만이었다.

당시 대만 원주민을 명나라 잔류병이 쳐들어가서 대만이 결국 중국 영토가 되었다. 청이 이 반군을 섬멸하면서 대만이 중국영토가 된 것이다.

 

삼국지 게임에 나오는

<남만/산월/강족/오환>중에서 푸젠/광둥에 있던 산월도 없어진다.

 

그 다음일은 잘 알고 있는 2차 세계 대전, 장계석-모택동 전쟁, 한국(6.25)전쟁 등이 있다. 장계석이 역시 대만으로 도망가서 대만은 또 중국의 영토가 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민족간의 전쟁으로 서로 밀리고 밀려서 형성되었다.

훈족에 밀린 게르만족이 로마로 들어가서 로마가 망했다.

게르만족은 원래 유목민이었다. 동쪽에서 밀리면서 서쪽으로 이동해 간 것이다.

 

 

 

정리하자!

 

역사에서 보듯이 나라가 망하는 것은 국민들이 문란해서도 아니고, 왕이 홀로 타락해서도 아니다.

 

주로 집권층(귀족/권력집단/장관/경찰/군인/공무원)의 타락이 주 원인이다.

또 다른 원인은 강력한 힘에 의해서 망하는 경우이다 

 

90%의 사실 + 10% 거짓말 = 100% 사실이다. 

모든 역사기와 종교와 소설에서 사용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우린 진실을 알지 못한다

삼국지 소설은 거짓말이 너무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100%사실이라고 착각한다.

 

2. 중국인 교과서에 등장하는 과장된 뻥 지도

 

기원전1046년 ~ 기원전 256년에 존재했던 주나라.

현재 중국을 이루는 근간이 되는 국가이다.

봉건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했다.

동북지역에는 고조선이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周나라-춘추시대(BC7-BC4세기)

전국시대 BC4세기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6년에 존재했던 진나라. 

춘주전국시대를 거쳐 중국 최초의 제국시대를 연다

蓁나라 BC3세기

기원전 206년 ~ 기원후 220년까지 약 400년 동안 중국대륙을 지배했던 한제국이다.

중국 민족인 한족의 유래가 되기도 하였다.

중국 역사상 가장 강대한 국가 중 하나였다.

한나라는 동북지역의 맹주였던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베트남, 몽골, 일본, 중앙아시 등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강대한 제국이었다.

(西)漢 BC 3세기-AD3세기

 

한나라가 멸망한 후 삼국시대(3세기)를 거쳐  

중국 삼국시대(魏,吳,蜀) 3세기

 서진(4세기) 다시 중국을 통일하지만

 西晉 4세기

 

중국은 곧 한족이 아닌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중 가장 강력한 부족이 흉노, 선비, 저, 갈, 강의 5개 부족이었다. 5호16국시대(4-5세기),

5호16국시대입니다....前晉/東晉 (5세기)

 

남북조시대(5-6세기)

각 부족들은 독자적인 국가를 건설하고 중국대륙을 지배한다

남북조 시대(6세기초) : 北魏/南濟

남북조시대(6세기말): 北周,北濟/(남)陳

 

중국의 이민족을 통합하여 수나라(7세기)를 건설하지만 그 영향력은 미미했다.

결국 수나라는 동북지역을 장악한 고구려제국을 침공했지만 패배하고 내부분열로 멸망한다

隨나라(6-7세기).. 突厥(서돌궐, 동돌궐) 

618년~907년까지 존재했던 중국의 가장 강대한 2번째 국가였던 당제국이다.

건국당시에는 당 북쪽지역에 있던 돌궐의 신하국가로 복종하지만

돌궐제국이 분열하면서 당제국은 돌궐을 정복한 후 고구려를 정복한다

고선지 장군이 서쪽으로 진출하여 아랍제국과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당제국은 국제적인 국가였으며,

당시 최강대국 중 하나였지만 현대 중국에 비하면 그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당나라(7-9세기)  

황소의 난으로 당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지고,

각지의 절도사들이 스스로의 영토를 다스리기 시작한다.

이 때를 오대십국시대(10세기)라고한다.

당나라 멸망 후 70년이 지나 오대십국을 통일한 것은 후주=>송나라였다

 

송나라(10-13세기)의 태조 조광윤이 중국을 통일했지만

송나라는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문관을 과도하게 대우한다.

이 때문에 서쪽의 서하와 동쪽의 요나라(10-12세기)에게 재물을 바치며 평화를 유지한다

나라(10-12세기)/송 

 

그러나 요나라 이후 발흥한 금나라(12-13세기)가 송나라의 수도였던 개봉을 침공하여

황제를 사로 잡으며 송나라는 남쪽으로 쫓겨난다.

남송은 금나라의 압박에 시달리지만 송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낸 금나라

현재의 신장 자치구에 살고 있던 타타르의 공격을 받아 남쪽에 신경을 쓸 수 없어

평화가 유지된다. 

 

金나라(12-13세기)/ 남송!!

 

이후 몽골이 발원하면서 균형은 급격히 깨지고,

몽골과 연합한 송나라는 금나라를 멸망시킨다 

그러나 금나라의 영토를 탐낸 송나라가 개봉을 점령하면서 몽골과의 조약을 위반하고

결국 1276년 몽골의 장군 바얀에게 수도를 점령당하며 송나라는 멸망한다.

몽골은 세계 최대의 제국이 되었고, 중국도 몽골의 영향력하에 들어선다.

몽골 제국에 편입되었던 중국 지역은 몽골의 직계 후손이었던 쿠빌라이의 세력하에 편입되고

몽골제국의 일원으로 "다이온 이케 몽골 울루스(대원대몽고국) 13세기"로 불리우게 된다.

여기어 울루스몽골의 지역정권을 의미한다.

이 때 현대 중국의 영토의 기초가 세워진다.

元나라(13-14세기)

 

러나 중국지역을 지배하던 몽골제국은 내분으로 인해 국력이 약해지고

명의 주원장에 의해 북쪽으로 쫓겨나게 된다

 

원나라를 북쪽으로 밀어낸 명나라(14-17세기)

북쪽으로 밀려난 몽골(=북원=타타르)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고,

이 전쟁은 청나라에의 몽골과 명나라 모두 멸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명나라는 마지막 한족이 세운 국가로 이후 중국은 다민족 국가가 된다

明나라(14-17세기)시대.  과장이 좀 심하네요...

 

현재 중국 영토의 기초를 다진 것은 청제국(17-20세기)이다.

청제국은 몽골의 국가였던 북원(=타타르)을 멸망시키고,  금나라, 몽골의 후예임을 자처한다.

 

청제국은 현재의 티베트, 위그루 지역, 동북지역을 모두 점령하며

중국 지역의 이민족을 모두 통합하여 현대 중국의 기초를 마련하게 된다.

 

몽골(내몽골자치구), 위그루(신강 자치구), 티베트 등은

건륭제(1735~1795)에 들어서야 편입되었고,

결국 뒤늦게 중국지역에 점령당한 지역에서 현재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淸나라시대(17-20세기) 만주족들에게 고마워해라 이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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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시대>

  • 삼황오제(三皇五帝)
  • 삼황- 복희(사냥법, 불)/염제신농(태양신,농업)/황제헌원(집,옷,글자,천문,의료술 전파)
  • 오제- 황제헌원의 5대자손: 소호금천/전욱고양/제곡고신/제도당/제
  • 요순임금(堯舜) : 삼황오제의 마지막 두 임금으로 후대에는 태평성대를 뜻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 황제의 반대세력 : 치우(풍백,우사)

<역사시대>

<先秦시기>는 진나라 이전의 시기를 가리킨다.

  • (商) (기원전 17세기 - 기원전 11세기 중반) :은허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 은(殷)이라고도 부르며, 한때 신화로 인정되다가 은허의 유적 발굴 이후 존재가 확실하게 인정되었다.
  • (周) (기원전 1050년 경 - 기원전 256년) : 본래 상나라의 제후국이었으나, 상나라 말기의 폭압으로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통치한 나라이다.

<춘추 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 (기원전 770년 - 기원전 221년)

 

  • 춘추 시대 : 여러 주나라의 제후국들이 주왕실을 존중하고 각자의 세력을 다투던 시기. 이 시기 동안 세력이 강한 제후중에 주왕실의 이름으로 천하를 호령한 다섯 개의 제후국을 춘추 오패라고 부른다.

 

  • 전국 시대 : 주왕실에 대한 충성마저 약화되기 시작한 시기로, 진, 한, 제, 위, 조, 연이라는 전국 육웅이 차례로 왕을 칭하고 오로지 천하 통일을 위해 질주하였다.(초는 춘추시대 후반기부터 왕호를 칭하였음)

<秦漢 시기>

 

  • 전한(前漢) (기원전 206년 - 서기 9년) : 진(秦)은 무리한 통치와 폭압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멸망이되며 뒤이어서 중국을 통일한 왕조는 한나라(전한-유방, 수도: 장안)이다 한나라는 200년 넘게 유지된 중앙집권적 통일국가이다. 서양 세계의 중국의 이름을 최초로 알린 나라이기도 하였다.

 

  • (新) (9년 - 23년) : 전한의 외척 왕망이 전한을 전복시키고 황위를 찬탈하여 세운 나라이나,급격한 개혁이 민중의 호응을 얻지못하여 각지의 반란으로 오래 가지 못하였다(15년간 유지)

 

  • 후한(後漢) (25년 - 220년) : 전한의 후예(광무제, 수도 : 낙양)가 계승한 국가로, 통일국가를 다시 유지하였으나,무제이후 황권은 환관들과 외척들로 인하여 크게 약화되었다.

 

<삼국 시대>(三國時代) (220년 - 280년)

  • (魏) : 후한의 황제로부터 직접 제위를 물려받은 국가로 중원 지역을 차지하였다.             

    (조조/낙양-허창)

  • (蜀) : 후한 황실의 후예(유비)가 계승하였으나, 세력권은 서남 지방(수도: 성도)에 한정되었다.
  • (吳) : 독자적인 세력(손견/손책,손권)으로 장강 이남(수도: 건업)을 차지하였다.

<魏晉 시기>

  • 서진(西晉) (265년 - 316년: 후한 황실의 제위를 물려받은 위나라의 제위를 다시 물려받은(사마염) 국가이다. 초기부터 황실 분란인 팔왕의 난 등으로 혼란스럽다가, 흉노족의 전조에게 멸망당한다.

 

  • 십육국 시대(十六國時代) (316년 - 439년) : 서진의 멸망 이후 서진이 있던 자리에 16개의 국가가 들어서 패권을 겨뤘다. 전조, 후조, 전진 등이 한때 큰 세력권을 과시했으나 결국 북위로 통합된다.
    • 비한족 : 전조(前趙)·후조·전연(前燕)·후연· 남연, 관중(關中)에 있던 전진(前秦)·후진·서진 및 하투(河套)의 하(夏), 사천(四川)의 성한(成漢), 하서(河西)의 후량·북량·남량.
    • 한족 : 북연, 하서(河西)의 전량(前涼), 서량

 

  • 동진(東晉) : 서진 황실을 계승한 국가로, 세력권은 주로 장강 이남으로 한정되었다. 서진의 영토를 되찾으려 여러 차례 노력했으나 모두 실패한다.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439년 - 589년)

 

  • 북조 : 양자강이북지역의 16국시대의 혼란이 북위로 통일되어서 계승되어진 시대임

     

  • 남조 : 양자강 이남지역의 동진을 계승한 국가들이 이어진 시대임
    • (宋)=유송(劉宋)
    • (齊)=남제(南齊)
    • (梁)
    • (陳)

<隋唐 5代 시기>

  • (隋) (581년 - 618년: 북주의 외척인 양견에 의해 건국된 국가로, 남조의 진을 멸망시키고 통일을 달성하나, 무리한 원정과 세금으로 인해 일찍 멸망하였다.

 

  • (唐) (618년 - 907년: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등장한 통일국가(이연/이세민)로,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을 활성화시켜 국제적인 문화를 이루었다.
    • 무주(武周) (690년 - 705년: 당나라의 황후이던 측천무후가 조정을 장악하고 아들인 당의 황제를 황태자로 격하시키고 세운 국가(15년간 유지). 측천무후의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으로 공포 정치를 펼쳤으나, 인재 중심의 정치 역시 펼쳐서 백성들의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宋元 시기>]

 

  • (宋) (960년 - 1279년)
    • 북송(北宋) : 5대 10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등장한 통일 국가(조광윤)이나, 요나라에 의해 베이징 이북의 많은 지역을 빼앗기고, 요나라와 서하에 사실상의 조공을 납부하며 별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요나라 뒤에 등장한 금나라에 의해 화북 지방을 빼앗긴다.
    • 남송(南宋) : 북송의 황실을 계승한 국가로, 몽골 제국과 함께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몽골 제국을 계승한 원나라에게 멸망당한다.

 

  • (金) (1115년 - 1234년: 요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여진족 (완안)아골타(신라왕족의 후예)가 요나라를 전복하고 세운 국가로,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북 지방을 차지한다. 그러나 몽골 제국에게 시달리다가, 몽골 제국과 남송의 연합군에 멸망당한다.

 

  • (元) (1271년 - 1368년) : 만주,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동유럽까지 지배한 몽골 제국의 적장자인 쿠빌라이 칸이 몽골고원, 만주, 화북을 아우르는 지역의 한족식으로 세운 국가로,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의 통일 왕조가 된다.

 

<明淸 시기>

  • (明) (1368년 - 1644년) : 원나라를 몽골 고원으로 쫓아내고 건국된 한족(주원장)의 통일 왕조이다. 초기에는 외국과 교류하며 선진 문물을 과시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임진왜란 등 외부 원정의 부담과 문화 침체로 쇠퇴하다가 멸망한다.

 

  • (淸) (1616년 - 1912년) : 금나라의 후예인 만주족(누루하치)이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운 통일 왕조이다. 초기에는 만주족과 한족의 차별 정책을 시행했으나, 전체적인 제도 및 왕조의 분위기는 명나라와 유사하였다. 양무 운동을 통해 근대 국가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신해 혁명으로 멸망한다.

 

<제정 폐지 이후>

청나라를 무너뜨린 중화민국은 공화국을 선포하지만, 위안스카이가 공화국을 폐지하고 제정을 선언하면서 제정을한때 시행되나 위안스카이사후 공화정으로 복귀되나 , 화북의 군벌시대, 남쪽의 중화민국으로 잠시 양분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천두슈마오쩌둥을 주축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이 농민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중화민국은 화북의 군벌들을 제압하는 데 공산당과 협력하는 한편으로, 공산당을 견제하기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을 펼쳤다. 공산당 역시 세력확장을 위해 중화민국과 협력하는 한편으로 소련 등과의 접촉을 계속 시도하였다. 1930년대 일본의 중국 침략 때에도 중화민국과 공산당은 협력과 경쟁을 반복했으며, 1949년을 기점으로 지금과 같은 두 개의 국가가 성립되었다.

 

1. 중국의 고대  문화

 

 1-1. 고고학 성과와 중국 고대 문명의 형성
   중국 고대 문명의 발생은 동아시아세계가  문명의 길로 들어서는데 실마리를 열었다. 과거  중국의 고대문명은 황하유역에  국한해 발달한  것으로 이해되었고, 황화문명이란 용어가  사용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 분야에서의 눈부신 성과에 힘입어 황하 유역  이외의 양쯔강일대를 비롯하여 동북부, 서북부 일대에서도 원시문명이 발달했으며, 은과  주는 이를 바탕으로 보다 성숙한 청동기문명에 이르렀다고 이해되고 있다.


   한편 전설상으로  전해지던 夏왕조에 대해서는  그 실재가  추정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 실체는 해명되지 않고 있다.  殷과 그 뒤를 이은 周왕조는 성읍국가 또는 읍제국가  등으로 불리는 많은 자치세력들의  연맹체라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주왕조는  이들 세력들을 제후로 책봉하여 황실과  묶는 봉건제도를 발전시켜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특히 주왕조에서 각각의 성읍국가는 지배신분인  國人과 피지배신분인 庶人들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각기 씨족공동체를 유지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1-2. 춘추.전국시대의 문화
    春秋.戰國시대는 봉건제도가  이완되면서 주가 지방에 대한  통제수단을 상실하고, 성읍국가를 단위로  한 각지의 제후들이 자립하여  경쟁하던 시기이다. 제후국가들의 대립에 따라 전쟁이 격화되는 혼란기라는  측면도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서로의 경쟁  가운데 기술의 발전을 통한 경제적 발전과  급격한 사회변화가 진행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기반으로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관료조직을 갖추고 영토 내의 평준화된 인민을  모두 지배하는 전제군주 중심의 고대국가가 자리잡기에 이른다.


    춘추.전국시대의 변화를 주도한 요인에 대해서는  전쟁의 격화에서 찾는 연구자들도 있으나 철기의 보급으로 인한 생산기술의  발달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철기의  보급으로 잡곡생산을 주로 한   황하 일대에  旱地농법이 정착했을 뿐 아니라 수공업의  발전이 일어났으며, 이를 기반으로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全 중국적인 유통이 촉진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문화의 동질화 과정을 촉진함으로써 통일의 기반을 축적하는데 기여할 수  있었다. 농업의 발달은 아울러 씨족공동체를 해체하고 개별적인 가족단위의 소농경영을  가능하게 하여, 이후 가족이 생활의 주요한 단위로 자리잡았다.
 
 1-3. 秦.漢제국의 사회와 문화
    戰國 가운데에서도 비교적 후진적이었던 진은  개혁에 성공함으로써 강력한 고대국가를 이루고 다른 열강들을 압도하여  최초의 통일제국을 성립시킨다. 진 제국의 성립은 동시에 황제지배체제의 등장을  의미한다. 진은 통일제국의 유지를 위해 중앙집권적인 지배를 지향, 전국에  걸쳐 郡縣制를 강력히 추진했으나, 각지의 향속과 마찰을  빚고, 무리한 토목공사와 함께 진왕조의  단명을 초래했다. 이후 내란을  수습하고 재통일을 이룬 한대에는 봉건제를  가미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중앙집권이  일시적으로 후퇴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제시기에는 황제지배체제가 안정되고, 흉노 등 이민족에 대한  압력과 함께 대외적인 팽창이 본격화되기도 했다.


    한대에는 향촌사회에  존재하는 민간질서의 자율적인  요소를 인정함으로써 황제지배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는데, 거대한  제국의 통치를  위해 민간질서와 국가권력이 타협하는  방식은 이후 前漢代  全般에 걸쳐  나타났다. 계층분화가 덜 이루어진 전한  초기의 향촌사회에서는 연장자들인 父老들을  중심으로 민간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안정이 지속되면서 호족들이 출현하면서 향촌질서를 주도하는 경향이 현저해졌다.
 
 1-4. 諸子百家의 사상과 한대 유교의 발전
    춘추.전국은 사회.경제적인 발전을 배경으로 인간의  자유로운 사유가 개화하여 가치에  대한 논의가 폭넓게 전개되었다.  이를 주도한 것이  교양을 통해 관료로의 길을 찾던 새로운 인간형인  士들이었고, 제자백가의  사상은 이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가족윤리로부터 출발하여 孝를 강조하고  명분을 중시하면서 자신의 완성을 통한  사회의 개량을 추구한 인본주의자들인 儒家. 

-유가와 대립하여 공리주의적 가치관을  내세우며 만민평등의 겸애를 주장하고  그 실천방법으로 현자에 의한 하향식 통제를 제시한  墨家.

-기존의 가치관을 인위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배격하면서 인위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삶을 찾고 자연과 합치할 것을  주장한 道家.

-개개의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보고 법치를 통한 철저한 군주 중심의 지배에 의해 부국강병을  이룰 것을 주장한 法家는 제자백가 중 가장  중요한 학파였다.

 

제자백가의 사상은 논쟁의  치열함에도 불구하고, 논의가 사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에서,  정치지향적이고 지배자의 논리 위주였다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진.한의 통일과 함께 다양한 학파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조건은 사라진다. 그리고 사상의 통일이 요구되어, 전한 말에  이르면 가족윤리를 핵으로 한 향촌질서에 적합했던  유가가 황제지배를 수용함으로써 지배이념으로  자리잡아, 이후 지배층이나 지식인의 교양형태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테두리가 되었다.

 

2. 魏. 晉. 南北朝 및 隋.唐 제국의 역사
  2-1. 위.진.남북조의 역사전개
    황건적의 농민봉기를 계기로  후한이 멸망한 이후 중국은 3국을  통일한 西晉의 단기간을 제하면  오랫동안 분열상태에 놓인다. 이 시기에는  문벌 귀족이 대두하고 북방민족이 중국에 침투하여 귀족과 문화적  융합을 이룬 사실이 주목된다.


    삼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구품중정제가 실시되자 종래 향촌  사회에서 여론을 장악하고  있던 호족들이 고위관료로  중앙에 진출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다. 이들은 주요관직을 독점하면서  혼인관계 등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배타적으로 유지하는 계층으로 전환하여 문벌귀족의 성립을  보게 된다. 문벌귀족은 당말까지 지배층으로 존속한다.


    후한부터 변방에 이주하고 있던 북방민족 가운데  흉노는 중국의 내분을 틈타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이어서 다른 북방민족들도  중국에 침입하여 화북일대는 이들의  각축장이 된다. 그중 鮮卑계통의 북위가  화북일대를 통일하여 강남의 다른  왕조들과 대립하는데, 이를 남북조시대라  칭한다. 북조에서는 기존의 한족  문화와 호족문화가 융합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융합현상은 수 및 당 초기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남조의 존속은 후진지역이었던 강남의 개발이 촉진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한편 3국  이후에는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되고 도교가  성립하여 민간에 널리 확산되었다.  극가권력도 이를 수용하여  통치에 이용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반면에 지배이념으로서의 유교는 위축되는 현상을 보였다.


  2-2. 수.당의 재통일
    남북조의 분열에 종지부를 찌고 중국을 다시  통일한 수는 법령을 정비하고 과거제를 실시하며, 대운하를 건설하는 등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개혁을 시행하여 제국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수왕조는 지나친 토목공사의  폐단에 고구려 원정의 실패가 겹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속에서 단명하고 말았다.


    통일제국을 재건한 당은  문벌귀족의 통제에 어는 정도  성공하고 신흥관료들이 등장하여 문벌귀족  중심의 사회에 부분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또한 초기의 잦은 정쟁에도  불구하고 여러 왕조에 걸쳐 누적되어 온  법령을 정비하고 3성 6부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조직을 완성하는 등 내치에 안정을  이루었다. 또한 당은 외부로는 돌궐을 분쇄하면서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는 한편 도호부를 설치하여 주변민족에 간섭하는 기미정책을  통해 동아시아의 세계제국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安史의 반란을 계기로  기미체제는 완전히  해체되고 반란을 방지코자 내지에 설치했던  절도사들이 이후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립하면서 당왕조를 약화시켰다.


    수.당 제국은 均田制를  실시하여 소농민의 안정을 꾀하였다.  租庸調의 수취체계는 균전농민의 확보  위에 유지되었다. 그러나 안사의 반란을  계기로 균전제가 붕괴하고 대토지를 소유한 장원이  본격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당은 빈부의 차이에  따라 차등을 두어 조세를 부과하는  兩稅法으로 전환하였다. 이는 중국사에서 중대한 분기점을 이루는 사건이었다.

 

3. 宋.元.明.淸의 시대
  3-1. 송대의 경제발전과 문화
    당의 멸망 이후 5代 10國의 분열기를  거쳐 들어선 송왕조에서는 병권을 장악하고 문신 우위의  관료체제를 유지하여 황제의 권한을 강화했다.  또한 과거제가 개혁되어 문벌귀족이 몰락했다. 이를  배경으로 문신관료를 지향하는 사대부가 등장한다. 이들은  유교적 교양과 능력을 출세의 수단으로  삼기때문에 송대 사회는 비교적  개방적인 분위기를 이루었다.  사대부는  불교와 도교로부터 영향받아 유가사상에 형이상학의 측면을 보완하고  지배이념으로서의 유교의 위치를 회복했다. 이렇게 성립된 송학은  남송시대의 주희에 이르러 주자학으로서 완성된다. 송대는 학문의 발달을 비롯한  문화의 開化가 두드러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송대에는 경제발전도  두드러졌다. 당 중엽 이래  이앙법(모내기)을 비롯한 미작농법의 개선이  행해져 송대에는 농업생산의 비약적인  증대가 이루어졌다. 또한 농업 및  수공업의 발전을 기반으로 유통이 확대되었다.  당시의 경제발전은 강남지방이 주도하여, 송대부터 경제중심지는  강남으로 이동했다. 번영하는 도시를 중심으로 잡극 등 서민문화가 개화한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3-2. 북방민족의 대두와 정복왕조
    송의 등장과  함께 동아시아세계에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거란.여진.몽고족 등 북방민족이  성장하여 중국중심의 국제질서를 위협하고  일부는 중국에까지 진출하여 정복왕조를 세운 사실이다.


    거란은 요를 건설한  뒤 화북의 북부인 연운 16주를 차지하여  송을 압박했다. 요를  멸망시킨 여진족은 금을 세워  북송을 무너뜨려 강남으로  쫓아낸 후 화북일대를 차지했다.  금을 정복하고  제국을  세운 몽고는 남송을  정복한 후 원왕조로 이름을 고쳐 全 중국을 지배하는 정복왕조로 자리잡았다.

 

    요.금.원 및 이후의  청 왕조는 정복왕조로서 이민족적인  문화와 독자적인 통치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漢족이  절대다수인 농경민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중국문화에  동화되어가는 과정을 공통적으로 겪고,  명실상부한 중국왕조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3-3. 명.청 시대의 정치전개
    명은 원을 축출한 뒤 몽고풍을 배제하면서  원말 반란으로 피폐해진 향촌사회를 재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명대에는 황제에의  권력집중이 두드러졌는데 내각이라는 친위적 형태의  관직이 등장했다든가 환관이 전횡했다는  사실도 이와 관련이 있다. 대외관계에서는 영락제의 원정만이  예외적일 뿐, 대체로 폐쇄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와 함께 몽고와 왜구의 지속적인 침입에 시달렸다.


   명 중반부부터 새로운  지배층으로 紳士층이 등장했다, 이는  과거 지망자가 증가하면서 과거제가  확대되고 학교제도가 결합하여 나타난  현상으로, 신사층은 20세기 중반까지 향촌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중앙정부의 부패가 게속되는  가운데 명은 만주족의 청에  멸망했다. 중국지배 이전부터 중국문화에  친숙했던 청은 중국문화의 옹호자를  자처하는 동시에 신사층과 결탁하여 안정된 지배체제를 갖추었다.  청은 군사력을 이용하여 광범한 영토를  지배하는 정복왕조로서의 특성을  보였다. 한편  황제권이 강화되는 추세는 계속되어 청에서 고도로 성숙된 황제통치를 보이기에 이른다.
 
3-4. 명.청 시대의 경제와 사회
    종래에는 유럽 세계의  비약적인 근대화과정과 비교하여 비슷한  시기에 해당하는 명.청시대의  사회가 정체되어  있었음을 지적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에  의하면 명 중기 이래 중국에서도 경제적인  발전과 사회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수리전의  확대와 상품작물의 증가, 그리고 이를  토대로 직물업 등 수공업이 발달하고  경제중심지가 분화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원거리교역이 증대하여 全 지역이  시장망으로 연결되었다. 다만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근대세계로의 진입이  지체되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신사층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하는 동시에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의식이 성장했다. 명말  빈번하게 일어났던 抗租抗糧운동과 도시의 民變은 이러한 변화를 알게 해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4. 중국 근현대사
  4-1. 서양의 침입과 중국사회의 변화
   청대의 중국은  전근대로서는 고도로 성숙한 사회에  이르렀으나 근대세계로 진입하려면 서양의  침입이라는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기다려야  했다.


  건륭(乾隆, 1736-1795) 중기 이후 서양과 이루어진 대외무역을 보통 광동무역체제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청과 무역을 하려는 서양국가는 광동의 광주(廣洲)라는 항구에서만 교역할 수 있었다. 이는 청의 경제, 정치, 군사적 필요와 서양의 무역상의 필요에 의해서 탄생된 무역제도이다.


   동인도회사를 앞세운 영국은 이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은을 중국에 결재해 주어야 했기때문에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식민지 인도에서 나는 아편을 중국으로 밀수출하기 시작, 급기야 아편전쟁을 일으킨다. 중국이 허울만의  잠자는 호랑이 임을 알아차린 미국과 프랑스는 호혜평등원칙을 내세워 조약체결을 요구해왔다.


  이리하여 아편전쟁에 패배한 중국은  내부로는 전근대적 사회구조를 청산하고  외부로는 국민국가로 전환하여 세계질서에 편입해야 한다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불평등조약이라는 장치를 통한 제국주의열강의  간섭과 이권침탈로 중국은 半식민지같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아울러 황제  중심의 전제적 지배구조 역시 완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열강의 침입으로 지배권력이 약화된 틈을 타 강남에서는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나 청왕조에 중대한 타격을 가한다. 1850년부터 1864년까지 일어났던 태평천국운동은 대표적인 근대민중운동으로 아래로부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의 시작이었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방분권화경향이 일어나는 한편  신사층의 영향력이 증대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후 청왕조에서는 洋務운동을 추진하여  기존의 지배체제를 유지한 채  서구식의 부국강병을 달성하려 하였다. 양무운동은 군사,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려는 초보적인 자강운동이고, 이 운동은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시작되고 중체서용에 그 이념적인 바탕을 두고 있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그 성과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
 

  4-2. 근대 중국의 개혁과 혁명
    청 왕조 중심의  양무운동이 한계에 부딪힌 후 중국의 장래에  대한 위기의식이 심화되는 가운데 신사층 지식인 사이에  입헌을 추구하는 개혁운동이 출현했다. 그 결과  강유위의 주도 아래 무술변법이 추진되었다. 변법운동은 의회개설같은 제도개혁을 실시하여 강력한 주권국가로 나아가는 자강운동이다. 그러나 개혁파의 지지기반이 약했고 입헌운동에 회의적이었을 뿐 아니라 개혁으로 권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보수파의 반격으로 결국 1백일동안 진행되던 무술개혁은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의 쿠데타로 그 막을 내렸다. 


    한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민중 사이에 확산되면서  서구화에 대한 반발의  형태로 표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반기독교운동의 형태를 띠고 산발적으로 전개되다가 의화단운동에 이르러 정점에 달하게 된다.  반기독교적 민족운동이었던 의화단운동은 청을 부흥시키고 서양을 멸하자는  부청멸양 의 구호를 내걸고 천진과 북경으로 진출하면서 기독교도와 선교사들을 살해했다. 이에 서태후 등 청정부의 보수파는 열강에 선전포고를 했으나, 오히려 영국, 미국, 프랑스 등 8개 연합국은 자국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공동 출병하여 북경을 점령하니, 의화단운동도 끝났다. 이 결과 중국 내의 보수정권의 기반은 더욱 취약해졌고 제국주의국가들은 무역업과 은행업에 투자하면서 생산에도 뛰어들어 중국에 대한 경제적 지배를 확대해 갔다.
 
  4-3. 20세기 1/4 시기의 중국
  한편 무술변법의 실패 이후 입헌운동을 추진하는 세력 이외에  진보적인 지식인을 중심으로 청  왕조를 배격하는 혁명운동이 나타나 여러 계층에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그 결과  신해혁명(1911)이 일어나 청왕조가 무너지고 황제  지배가 소멸되는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전근대적인 사회구조를 청산하거나 제국주의열강의 간섭으로부터 자립을  이루지는 못한 채 다시 침체의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중국은  원세개에 의한 독재통치를 거쳐  군벌할거의 상태로 들어갔다. 당시 지방에서는 신사층의 영향력이  존속하는 가운데 일본의 압력은 증가해 가고 있었다.


    1920년을 전후하여  지식인 사이에 전근대적인 제도.가치를  배격하는 신문화운동이 전개되어 학생들을 중심으로 의식의  개화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본격적인 반군벌  반외세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으니, 5.4운동은(1919) 그  산물이었다. 또한 산업화의 진행으로 노동자층이  형성되어 사회의 주요세력으로 대두했을 뿐 아니라 농민들 사이에서도 의식의 진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5.4운동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중국공산당의 창당과 중국국민당의 결성이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하면서 지식인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현실적인 안목에서 보게 되었고, 군벌과 제국주의 지배 하에 있는 중국을 구할 수 있는 가능한 이념으로 받아들여 1921년 중국공산당을 창당하게 된다.


  손문을 중심으로 한 중화혁명당도 비밀조직의 성격을 공개정당인 중국국민당으로 개칭, 남경을 중화민국의 수도로 정하고 삼민주의에 입각한 국민정부를 구성했다.
  반군벌  반외세의 목표 아래 양자사이에 제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북벌을 통해 군벌세력의  제거를 꾀하게 된다. 
   
  4-4. 내전의 전개와 중공의 승리
    손문을 계승한 장개석의  주도 아래 북벌이 이루어져  국민당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공산당과 결별하고  군벌의 진압도 타협을  통한 불충분한 것이었다. 국민당정부는 북벌과정에서 공산당과 결별을 선언, 공산당원에게 철저한 탄압을 가했다. 대체로 도시의 부르주아나 농촌의 지주계급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국민정부는 극우적인 반공주의 편에 서게 되고 공산당은 지하로 숨을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 진압을 통한 국내안정을 앞세운 장개석에  대해 공산당은 도회지 공격 등의 실책을  거듭하다 결국 농촌을 근거지로 하는 모택동노선이 자리잡았다. 농촌지역에서  공산당의 근거지가 비약적으로 확대되어  종전 직후 재개된 내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 공산당이 중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특히 장개석이 소련과 단절한 대신 미국, 영국 등 자본주의 국가들과 제휴를 꾀하여 좌파 이외의 당원에게도 불신감을 주었다. 이는 미래의 농민혁명을 예측하지 못한 결과였다.


  국민정부 시기는 정부에서나 민간차원에서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제한된 범위지만 발전을 이룰 수 있었으나, 내외적으로 여러가지 장애에 부딪혔다. 국민당 정부의 통치는 금융의 근대화라든가 근대적  교육의 보급 등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지주층이 중요한 지지기반이었던 국민당으로서는 농촌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일본의 군사적  팽창에 대처하지 못한 것이 중대한 약점으로 작용했다.


  공산당은 정강산을 근거지로 강서 소비에트를 세우고 세력을 키웠지만 장개석은 총 5차에 걸쳐 토벌전을 전개했다. 소비에트는 타격을 받기 시작했고 혁명본거지를 서부 내륙지방으로 퇴각시키기 위하여 연안(延安)에 이르는 대장정을 개시했다.


  만주사변 이후 항전의 요구가 고양되는 가운데  서안사건이 일어나(1936) 이를 계기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항일연합전선이 형성되어 제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으며, 더 나아가 노구교사건을 계기로 국민정부는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로서 항일전을 수행했다.중국은 다시 내전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2차대전의 종전 이후 내전에서 공산당에게 패한 국민당은 대만으로 철수하고, 공산당은 토지개혁을 통한 소유의 균등화로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확립하고, 외국 및 국민당의 자본을 몰수해 국영경제를 확립했다.
  1958년에 시작된 대약진운동은 공업의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자발적으로 대중을 동원하고, 농촌의 토지공유제를 기본으로 하는 인민공사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즉 농업의 생산증대와 공업의 근대화를 통한 사회주의건설이 목표였다. 순전히 인민들의 노동력으로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시작된 대약진운동은 식량을 증산시키리라는 낙관론 속에서 진행되었으나 공업의 미약한 기초와, 1959년과 1960년의 식량위기로 전후 3년간 약 1천 5백만 명의 아사자를 내면서 파국적인 상황을 맞이했다. 이후 이를 거울삼은 조정책은 개인의 생산의지도 고려하는 쪽으로 움직여갔고 이는 부분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1966년부터 본격화된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이 사망한 1976년까지 지속되면서 중국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 혁명을 주도한 모택동의 의도는 당, 정부, 군대, 사회에서 반혁명게급을 타파하고 이를 통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부단한 계급투쟁이 필요하다는 계속혁명론에 입각하여 유소기나 등소평과 같이 실용주의를 추구하던 반대파를 제거했고, 지식인과 학생도 농촌과 공장으로 보내 노동에 참가하도록 했다. 희생자가 1백만명에 가까울 정도로 파괴적이었던 문화대혁명은 현대 중국에 대재앙을 가져온 것으로 종결되었다. 모택동이 사망한 뒤, 그를 추종하던 4인방이 잠시 득세했지만 곧이어 권력은 등소평을 중심으로 한 실용주의자들의 손에 들어갔다.

 

 

출처 : 내마음의 보석상자 : 화광동진(和光同塵)
글쓴이 : 대륙철도횡단열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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