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바로 읽기

밥 딜런, 아브라함의 행위에 반기를 들다

코알라 아빠 2016. 11. 17. 15:30
본문이미지
 
시대적 메시지를 전한 미국의 음유시인 밥 딜런

 

201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노래하는 시인 '밥 딜런'. 가수로서 이 상을 수상한 것은 그가

처음이다. 도박사들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가장 유력한 수상자로 예상했지만 빗나간 것.

 
스웨덴 한림원은 밥 딜런의 수상 이유로 "위대한 미국 음악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표현을

창조해 냈다"고 평했다. 노벨상위원회는 “밥 딜런은 귀를 위한 시를 쓴다. 그의 작품은 시로

옮겨놔도 완벽하다”고 말했다. 

 
1960년대부터 자유, 평화, 인권 등 시대적 ‘저항의 메시지’를 노래로 읊조린 포크락 싱어송

라이터이자 음유시인인 그의 가사들은 신랄하면서도 예리해서 그를 히피 세대의 대변인으로

자리매김 하며 대중음악인 포크 가사를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이다. 

 

유대계인 그의 본명은 ‘로버트 앨런 지머먼’ (Robert Allen Zimmerman)이다. 1962년 음반

<밥 딜런>으로 데뷔한 이래 반항과 자유, 사랑과 평화의 상징으로 세계 팝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저항음악은 그의 음악 인생 전체를 봤을 때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포크와 블루스, 컨트리송과 로큰롤, 재즈, 가스펠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섭렵했다.

 
 

 

10살부터 시를 쓰다 
 
그는 1941년 미네소타에서 러시아계 유대인 자녀로 태어나 시적 감성이 조숙해 10살서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게다가 음악적 감성이 풍부했던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 리틀 리처드의

광팬으로 고등학교 시절에 로큰롤 밴드를 조직해 공연했다. 그는 특히 시인 ‘딜런 토머스’를

좋아했다. 그는 딜런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를 많이 만들고 스스로 자신의 예명도 ‘밥 딜런’

으로 붙였다.

 

1959년 미네소타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다 1961년 중퇴하고, 그 즈음 로큰롤에서 포크송과

흑인 전통 블루스로 관심을 돌린 그는 1961년 뉴욕으로 진출, 카페에서 반주를 하며 간간이

노래를 불렀는데 이듬해 컬럼비아 레코드의 눈에 띄어 첫 앨범인 "Bob Dylan"을 발표했다. 

 
본격적으로 재능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1963년에 발표한 앨범. "Blowin' In The Wind",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등의 명곡을 쏟아낸 그의 저항적인 노랫말은 당시 사회적

이슈였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저항의 표상이 되었다. 시적이면서도 정치적 깊이가 있는 가사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그의 음악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자신이 의도치 않았던 저항

가수로서의 굴레가 내키지않았는지 그는 단조로운 포크와 폐쇄적인 포크 커뮤니티를 혐오한다.

 

비틀즈와의 운명적인 만남

 

그 즈음 그는 비틀즈를 만난다. 당대의 스타였던 두 뮤지션들은 곧 서로에게 빠져든다. 특히

존 레논은 딜런의 가사에 깊은 인상을 받은 반면 딜런은 비틀즈의 로큰롤이 가진 에너지와

환희에 매료되었다. 

 

당시 비틀즈의 노래는 음악적으로는 굉장히 새롭고 강렬했지만 가사내용이 사랑 타령 등 큰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당시 음악으로 세상에 저항했던 밥 딜런의 정신세계는 비틀즈에게는

엄청난 자극이었다. 후일 레논은 “밥 딜런이 비틀스의 음악을 통째로 변화시켰다”고 고백한

바 있다. 또한 밥 딜런역시 포크뮤직의 틀에서 벗어나 락음악을 도입해 소위 '포크락' 으로

불려지는 새로운 음악세계를 선보인다.

 

유대인 밥 딜런, 아브라함의 행위에 반기를 들다

 

신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한다. 아브라함은 신께 순종해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 마지막에 신이 명령을 철회했지만. 이 이야기를 해석한 키에르케고르와

프로이트, 칼 융은 모두 아브라함의 신앙을 여러 각도에서 찬양하지만 이를 비판한 가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밥 딜런이다. 

 
유대인인 밥 딜런은 이 이야기를 20세기 미국 상황에 빗대어 ‘하이웨이 61 리비지티드’라는

노래를 작곡한다. 이 노래를 통해 종교의 절대적 힘을 빌려 미국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아브라함을 개탄한다.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미국 문화의 잔인성과 권력의 폭력성을

노래에서 드러낸다. 아브라함은 미국 역사에서 정의와 자유의 상징이지만 그는 폭력의 상징

으로 묘사한다.(출처; 신의 위대한 질문, 배철현, 21세기북스)

 

 

 

기독교로 전향한 밥 딜런, 아들의 종교 유대교를 지지하다
 
이스라엘을 방문, 순례한 적도 있는 철저한 유대인이었던 밥 딜런이 1970년대 말 기독교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가수 밥 딜런이 유대인이면서 기독교인으로 거듭나는 변신을

한 것은 큰 사건이었다. 개신교로 개종한 뒤 가스펠 앨범을 내는 등 의식적 변화 속에서도

그는 아들에게는 유대교 성인식인 ‘바 미츠버’를 치루게 하는 등 아들의 유대교 신앙생활을

지지했다. 

 

1980년대 들어 전도사 생활의 비중을 늘리면서 앨범 발표와 공연과 반전 운동을 펼치는데,

그의 ‘Knockin' on Heaven's Door‘은 일종의 복음송인 가스펠. 빌보드 12위까지 진입했던

이 노래는 ‘죽음’ ‘종말론’ ‘악행을 저지른 자가 종교적 절대자에게 귀환을 선언하는 노래’로

해석되면서 시대를 초월한 명곡으로 자리 잡았다. 1997년 로마를 방문했던 밥 딜런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한 뒤 이 노래를 불러 팝계 뉴스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복음성가 전파에 심취해 있다.

 

 

그의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원제 Chronicles)이 2010년에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다. 이밖에 <음유시인 밥 딜런>, <밥 딜런 평전> 등이 나와 있다.

 

 

 

1965년 1월1일 밥 딜런(왼쪽)과 존 바에즈가 연인으로서 런던에서 함께 공연하는 모습.

 

그의 대표곡은 ‘Blowin’ in the Wind‘와 ‘Knockin’ on Heaven’s Door‘를 비롯해

‘The Times They Are a-Changin’, ‘Like a Rolling Stone’, ‘Mr. Tambourine Man’ 등으로

이 노래들은 미국은 물론 세계 대중음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Blowin' in the wind’는

7~80년대 우리나라 학생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친구야, 바람만이 답을 안다네('Blowin' in the wind)'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사람이라고 불리울 수 있을까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를 건너야
모래밭에서 편안히 잠들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포탄이 날아가야
영원히 포탄 사용이 금지될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다네
그 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다네
 
산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서있어야
바다로 씻겨갈 수 있을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세월을 살아야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도대체 얼마나 여러 번 고개를 돌려야
보이지 않는 척 할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다네
그 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다네.

<발췌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