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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 철학, 스콜라 학파

코알라 아빠 2016. 10. 5. 11:42

중세의 기독교 교회나 수도원에 소속된 학교(schola)에서 학승()들이 공부했던 학교 철학의 의미.

주제는 신앙의 근거로서의 가톨릭의 신학상의 교의()를 이론적 매개를 통해 입증하고 설명하려한

것인데, 결국 '신학의 시녀'로서 교회 공인의 교의를 합리화하고 옹호하는 철학이다. 중세봉건사회의

이데올로기 상의 지주를 이루었다. 여기에 사용된 바로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있다.

스콜라 철학[ Scholasticism ]


스콜라 철학은 대강 3개의 시기로 나누어지는데, 플라톤, 신()플라톤파 철학의 영향에 입각한 초기

(9~13세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근거로 하는 중기(14~15), 가톨릭파와 개혁파가 대립하는 후기

(15~16세기)이다. 19세기에는 가톨릭 교회 내의 각 파를 통일하려는 시도로서 신(新)스콜라 철학

나타나기도 하였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에서 두드러진 대립, 논쟁은 '보편논쟁'이라고 불리우는데,

이 논쟁의 한편을 이루는 유명론은 유물론의 중세적 표현이다.



스콜라 학파[ Scholasticism ]


기독교 교리에 논리적 체계와 철학적 근거를 부여하여 합리적으로 증명하려는 학파를 말한다. 11∼15

세기에 걸쳐 교회나 수도원에 부속된 학교(schola)의 교사인 스콜라스티쿠스(Scholasticus)가 중심이

되어 연구하고 교수하였으므로 스콜라 학파라고 부른다. 신앙이성의 합치점을 구하는 데 목적을 둔

이들은 기독교의 교리에 그리이스 철학을 빌려 조형시켰으므로 신학의 노예(ancilla theologiae)라고도

부른다. 초기 안셀무스(Anselmus), 전성기 아퀴나스(T. Aquinas), 쇠퇴기의 오캄(W. Occam) 등이

그 대표자이다. 이미 정해진 진리변증법적으로 설명하며, 개념의 분석, 연속적인 논증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지식의 체계화의 논리적 사고 훈련에는 공헌하였으나, 근대 과학적 방법을 등한히 한 것은

그 결점이라고 하겠다. 일명 번쇄철학()이라고도 한다.



교부철학 [patristic philosophy , 敎父哲學]


고대 그리스도교의 교부들의 철학 ·사상 등을 주된 연구 대상으로 삼는 학문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교회의 정통교리를 저술로써 설명하고, 성스러운 생활을 함으로써 신도의 모범이 된 사람

들을 교부라는 이름으로 존중하였다. 가톨릭에서는 이들 교부의 저술이 정통교리의 권위로서 후대에도

인용되었다. 넓은 뜻으로는 고대 기독 저술가를 통틀어 교부라고도 말하는데, 교부의 저술에 대한

연구는 교부학()이라고 한다. 교부는 대개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예에 정통한 사람들로서 그

중에는 어려서부터 기독도인 사람도 있고 커서 개종한 사람도 있지만, 어느 경우이든 고대 문명의

유산, 특히 시인과 철학가의 학설과 사도들의 가르침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데 흥미를 가졌다.


기독는 처음,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단일성 때문에 고대 이교문명과는 전혀 이질적인 원천에서

나온 종교로 등장하였지만, 차차 고대 이교세계까지 교세를 넓힘에 따라 고대문명, 특히 그리스 철학

사상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킨 사람들이 교부인데, 이들 교부들이

고대문명 속에서 불멸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진리 그 자체인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하여, 그리스도 사상에 이를 섭취하였다. 한편,

기독의 교리는 궁극적으로 이성으로써는 해명될 수 없는 신비이기는 하지만,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교리 그 자체도 이성적 구조()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그리스도

하나의 종합적인 세계관으로 형성되고, 그 위에 중세 기독의 신학체계가 세워진 것이다.

 

교부시대는 2~7세기 또는 8세기까지에 이른다. 그리스 교부란 그리스어()로 저술활동을 한 동방의

교부를 말하고, 라틴 교부란 라틴어로 저술활동을 한 서유럽의 교부를 말한다. 19세기에 J.P.미뉴가

편찬한 《그리스 교부집성》162권과 《라틴 교부집성》221권은 이 방면에서는 가장 총괄적인 것이다.

그리스 교부는 사변적()이어서, 기독를 하나의 궁극의 철학적 진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명

하려 하였다. 그리스 철학과 기독는 처음에는 통일성이 없이 혼재하고 있었지만, 얼마 후에는 조화된

그리스도 사상으로 통일되어 갔다. 그리스 철학의 여러 학파를 거친 다음 기독의 가르침에 접촉한

유스티누스, 타티아누스 ·아테나고라스는 “이것만이 유일한 참된 철학”이라고 부르짖은 2세기의 교부

이며 호교가였다.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의학교()를 지도한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4세기엔 카파도키아와 닛사  지방에서 활약한 그레고리우스, 바실리우스 등이 그리스 교부의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

그 유명한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고 말한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푸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등이 라틴 교부 철학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도인 아버지와 기독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명한 로마의 변론가인 그는 이교도적 교양으로부터, 어렸을 때 어머니로

부터 받은 기독 신앙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고백록》을 썼다. 이것은 이교도 문명

에서 기독 문명으로 옮겨가는 시대의 고뇌와 환희를 한 사람의 내면의 역사로 부각시킨 것으로서,

정신사에 있어서 중요한 기록이 되어 있다. 그가 여기에서 그려낸, 인간의 내면의 지주()가 되고

빛을 밝혀주는 ‘내면의 신()’의 사상은 그 후 서유럽 기독 사상을 형성하는 힘이 되었다.



대표적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 Thomas d’Aquino , Thomas Aquinas ]


토마스가 태어난 당시의 교회와 세속적인 권력 사이의 관계는 무척 복잡하였고 이것은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의 생애 초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토마스의 아버지는 그 지방의 국지적인 경쟁자 싸움과

제국의 정치적 싸움에 휩싸여 있던 사람이었다. 토마스는 그의 부모에 의해 5살에 이미 수도 지망생

으로서 몬테 카씨노(Monte Cassino)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회에 보내졌다.

그의 부모는 아들 토마스를 수도자 지원생으로 몬테 카씨노 수도원으로 보낸다. 이 수도원은 당시

큰 권력을 갖고 있던 수도회였다. 이 수도원은 교회 국가와 세속 왕국인 시실리안의 경계에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를 위시한 교회 세력과 세속 권력 사이의 분쟁이 다시 심화된 후 프리드리히

2세가 이탈리아로 다시 쳐들어와 이곳의 수도사와 학생들을 추방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수도원을

떠나야 했다.

토마스는 나폴리 대학으로 가는데, 이 대학은 프리드리히 2세가 교황청 대학인 볼로냐(Bologna)

대학에 맞서서 경쟁적으로 설립한 대학이다. 그는 대학에서 논리학아리스토텔레스자연철학

배웠으며 또한 도미니코 수도회를 알게 되었다. 그는 나폴리 대학에서 5년간의 학업을 마친 후 곧

바로 19살의 나이로 ‘새로운’ 수도회, 즉 도미니코 회에 입단한다. 그가 도미니코 회에 입단한 것은

가족에 대한 반항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그의 가족의 반대 또한 상당했다.

결국 같은 수도회의 수사가 토마스를 동반해서 파리로 가는 도중 토마스는 가족들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그의 형에 의해 납치되어 가족의 성()에 감금되었다. 지오바니(Monte San Giovanni)성(城)

에서 체류한 뒤, 그는 고향으로 옮겨졌다. 이것은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감금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는 집에 갇혀 지내게 된다. 이런 감금 상태는 1년 정도 계속되었으며, 그의 굽히지 않는 의지로

인해 그는 결국 그의 뜻을 관철한다.

그는 1245년 감금 상태에서 풀려나 마침내 그가 원하던 수도회에 입단했고, 이어 파리로 향했다.

이로써 마침내 파리에서의 그의 생이 시작된다. 이것은 중세의 한 획을 긋는 위대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의 제2의 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최상의 정신적인 삶의 도시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유 안에 하나의 길을 열어주고 그의 연구의 기반을 닦아 준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쾰른(Koln) 출신의 성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대 알베르투스, Albertus Magnus)였다.

토마스는 1245년 그 당시 신학부의 교수였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제자가 되어 1248년까지

파리 대학에서 공부한 후 스승을 따라 쾰른으로 가서 1252년까지 머물다 다시 파리로 되돌아와

강사로 일하던 중 1256년 교수 자격을 획득하고 3년간 도미니코 수도회의 학교에서 강의한다.

1259년에 이탈리아로 되돌아간 그는 아나그니(Anagni), 오르비에토(Orvieto), 로마의 성()

사비나 수도원에 이어, 다시 클레멘스 4세에 의해 비테르보에 있는 주교청으로 소환되었다.

1269년부터 1272년까지 파리에서의 생활은 그의 생에서 가장 바쁘게 보낸 시간이었다고 한다.

그레고리우스 10세의 명에 따라 그는 1274년 리용에서 열리는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도중 병이 들어 그해 로마 인근에 있는 포사 노바(Fossa Nova)의 시토 수도원에서 사망한다.

그는 폭넓은 주제를 다루면서 수많은 작품을 집필했는데, 그가 오늘날 종교나 신학의 영역에서

뿐만이 아니라 철학에서도 중요한 사상가로 간주되는 것을 보더라도 그의 폭넓은 사상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형이상학의 문제뿐만 아니라,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명제집 주해'를 비롯

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수의 주요 작품에 대한 주해서를 저술했고, 신학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다룬 '신학대전' 이외에 '대이교도대전'이라는 '이교도들의 오류에 대한 가톨릭 신앙의 진리에

대한 책'을 저술하였다. 그의 사망 후 7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의 사상이 논의되고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의 영향을 충분히 드러내 주고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