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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본기 권7 - 항우본기(項羽本紀)

코알라 아빠 2016. 10. 4. 14:37

 

項籍者, 下相人也, 1) 字羽. 2) 初起時, 年二十四. 其季父項梁, 3) 梁父卽楚將項燕,

4) 爲秦將王翦所戮者也. 5) 項氏世世爲楚將, 封於項,6) 故姓項氏.

항적(項籍)은 하상(下相) 사람으로 자는 우(羽)라고 하며, 처음에 군대를 일으켰을 때 나이가 24세였다.

그의 계부(季父)는 항량(項梁)이며 항량의 부친은 초(楚)의 장수 항연(項燕)으로 진(秦)의 장수 왕전(王翦)

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다. 항씨는 대대로 초의 장수로서 항(項)의 제후로 봉해졌으므로 성을 항씨로 했다.

 

 

項籍少時, 學書不成, 去學劍, 又不成. 項梁怒之. 籍曰:「書足以記名姓而已. 劍一人敵, 不足學, 學萬人敵.」於是項梁乃敎籍兵法, 籍大喜, 略知其意, 又不肯竟學. 項梁嘗有櫟陽逮,7) 乃請蘄8)獄掾曹咎書抵櫟陽獄掾司馬欣, 以故事得已.9) 項梁殺人, 與籍避仇於吳中. 吳中賢士大夫皆出項梁下. 每吳中有大繇役及喪, 項梁常爲主辦, 陰以兵法部勒賓客及子弟, 以是知其能. 秦始皇帝游會稽, 渡浙江,10) 梁與籍俱觀. 籍曰:「彼可取而代也.」

梁掩其口, 曰:「毋妄言, 族矣!」梁以此奇籍. 籍長八尺餘, 力能扛鼎,11) 才氣過人, 雖吳中子弟皆已憚籍矣.

항적은 어렸을 때 글을 배웠으나 다 마치지 못한 채 포기하고는 검술을 배웠는데 이 또한 다 마치지 못했다. 항량이 노하니 항적은 말하기를 “글은 성명을 기록하는 것으로 족할 따름이며, 검은 한 사람만을 대적할 뿐으로 배울 만하지 못하니, 만인을 대적하는 일을 배우겠습니다.”라 했다. 이에 항량은 항적에게 병법을 가르치니 항적은 크게 기뻐했으되 대략 그 뜻만을 알고는 또한 끝까지 배우고자 하지는 않았다.


항량은 일찍이 역양현(櫟陽縣)에 갇힌 적이 있었는데, 기현(蘄縣)의 옥연(獄掾) 조구(曹咎)로 하여금 역양의 옥연인 사마흔(司馬欣)에게 서신을 보내도록 부탁함으로써 일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가 있었다. 항량은 사람을 죽이고 항적과 더불어 원수를 피해 오중(吳中)으로 갔는데, 오중의 현명한 인재들은 모두 항량의 밑에서 나왔다. 오중에 요역(繇役)과 상사(喪事)가 있을 때마다 항량은 항상 주관해 일 처리를 했는데, 은밀히 병법을 사용해서 빈객과 젊은이들을 배치하고 지휘해 이로써 그들의 재능을 알아두었다.


진시황이 회계산(會稽山)을 유람하고 절강(浙江)을 건너는데, 항량과 항적이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항적이 말하기를 “저 사람의 자리를 내가 대신할 수 있으리라”라고 하니, 항량이 그 입을 막으며 말하기를 “경망스러운 말을 하지 말라. 삼족(三族)이 멸하게 된다!”라 했다. 그러나 항량은 이 일로 해 항적을 범상치 않은 재목이라고 여겼다. 항적은 키가 8척이 넘고 힘은 커다란 정(鼎)을 들어 올릴 만했으며 재기(才氣)가 범상치 않아 오중의 자제들조차도 이미 모두 항적을 두려워했다.


솥을 드는 항우의 모습을 재연한 조형물. 안휘성 숙천시


秦二世元年七月, 陳涉等起大澤中.12) 其九月, 會稽守13)通謂梁曰:14)「江西皆反, 此亦天亡秦之時也. 吾聞先卽制人, 後則爲人所制.15) 吾欲發兵, 使公及桓楚將.」16)是時桓楚亡在澤中. 梁曰:「桓楚亡, 人莫知其處, 獨籍知之耳.」梁乃出, 誡籍持劍居外待. 梁復入, 與守坐, 曰:「請召籍, 使受命召桓楚.」守曰:「諾.」梁召籍入. 須臾, 梁眴籍曰:「可行矣!」於是籍遂拔劍斬守頭. 項梁持守頭, 佩其印綬. 門下大驚, 擾亂, 籍所擊殺數十百人.17) 一府中皆慴伏,18) 莫敢起. 梁乃召故所知豪吏, 諭以所爲起大事, 遂擧吳中兵. 使人收下縣, 得精兵八千人. 梁部署吳中豪傑爲校尉、候、司馬. 有一人不得用, 自言於梁. 梁曰:「前時某喪使公主某事, 不能辦, 以此不任用公.」衆乃皆伏. 於是梁爲會稽守, 籍爲裨將, 徇下縣.19)


진 2세(秦二世) 원년 7월, 진섭(陳涉) 등이 대택(大澤)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그해 9월 회계(會稽)의 군수(郡守) 은통(殷通)이 항량에게 이르기를 “강서(江西) 지역은 모두가 반란을 꾀했으니, 이는 또한 하늘이 진(秦)을 멸망시키려는 때가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소. 내가 들으니 먼저 하면 남을 제압하고 나중에 하면 남에게 제압당한다고 하니, 나는 군대를 일으켜 그대와 환초(桓楚)를 장수로 삼고자 하노라.” 했다.


이때에 환초는 택중(澤中)에 도망해 있던 터라 항량은 말하기를 “환초는 도망해 그가 있는 곳을 아는 자가 없는데, 오직 항적만 이 그곳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고는 즉시 밖으로 나와 항적에게 검을 가지고 처소 밖에서 기다리도록 분부했다. 그리고 항량은 다시 들어가 군수와 대좌해 말하기를 “청컨대 항적을 부르시어 환초를 부르라는 명을 받들도록 하십시오.”라 했다. 군수가 “좋소!”라고 하니 항량이 항적을 불러들였다. 잠시 후, 항량이 항적에게 눈짓을 하며 “때가 되었다!”라고 말하자, 항적은 마침내 검을 뽑아 군수의 머리를 베었다.


이에 항량이 군수의 머리를 들고 그 인수(印綬)를 차니, 군수의 문하(門下)들은 크게 놀라 어지러이 우왕좌왕하는데, 항적이 쳐 죽인 사람만 해도 거의 1백 명에 가까웠다. 이리하여 온 부중(府中)이 온통 놀라 땅에 엎드리고는 감히 일어나지를 못했다. 항량은 이에 이전에 알던 세력 있는 관리들을 불러서 대사를 일으킨 바를 설명하고는 마침내 오중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수하(手下)를 보내 관할 현을 거두고 정예군 8천 명을 얻었다.

항량은 오중의 호걸들을 각각 교위(校尉), 후(侯), 사마(司馬) 등의 직위에 임명했는데, 그때 등용되지 못한 사람 하나가 그 이유를 항량에게 물었다. 항량은 말하기를 “이전에 그대에게 어떤 사람의 상사(喪事)에 일을 맡겨보았는데, 그때 일을 잘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대를 임용하지 않았노라.”라고 하니 모든 사람들이 이에 탄복했다. 이때 항량은 회계군의 군수가 되고 항적은 부장(副將)이 되어 관할 현들을 다스렸다.


조실부모한 항우를 보살핀 숙부 항량


廣陵人召平於是爲陳王徇廣陵,20) 未能下.21) 聞陳王敗走, 秦兵又且至, 乃渡江矯陳王命,22) 拜梁爲楚王上柱國.23) 曰:「江東已定, 急引兵西擊秦.」項梁乃以八千人渡江而西. 聞陳嬰已下東陽,24) 使使欲與連和俱西. 陳嬰者, 故東陽令史,25) 居縣中, 素信謹, 稱爲長者. 東陽少年殺其令, 相聚數千人, 欲置長, 無適用, 乃請陳嬰. 嬰謝不能, 遂彊立嬰爲長, 縣中從者得二萬人. 少年欲立嬰便爲王, 異軍蒼頭特起.26) 陳嬰母謂嬰曰:「自我爲汝家婦, 未嘗聞汝先古之有貴者. 今暴得大名, 不祥. 不如有所屬, 事成猶得封侯, 事敗易以亡, 非世所指名也.」27)嬰乃不敢爲王. 謂其軍吏曰:「項氏世世將家, 有名於楚. 今欲擧大事, 將非其人, 不可. 我倚名族, 亡秦必矣.」於是衆從其言, 以兵屬項梁. 項梁渡淮, 黥布、蒲將軍28)亦以兵屬焉. 凡六七萬人, 軍不邳.29)


이때에 광릉(廣陵) 사람 소평(召平)이 진왕(陳王) 진섭을 위해 광릉을 빼앗으려고 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다가 진왕이 이미 패주하고 또한 진군(秦軍)이 장차 자기를 공격해올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이에 강을 건너 진왕의 명(命)을 사칭해 항량을 초왕(楚王) 상주국(上柱國)으로 봉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강동(江東)은 이미 평정되었으니 급히 군대를 이끌고 강서(江西)로 가서 진(秦)나라를 쳐라.”라 했다. 항량은 이에 8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다. 그런데 진영(陳嬰)이 이미 동양(東陽)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신을 보내, 연합하여 함께 서쪽으로 진격하려 했다.


진영은 본래 동양의 영사(令史)로 현(縣)에 살았는데, 평소에 신의 있고 신중해 장자(長者)로 칭해졌다. 동양현의 젊은이들이 그 현령을 죽이고 수천 명이 모여서 우두머리를 모시고자 했으나 마땅한 사람이 없자 이에 진영에게 청했다. 진영은 사양했으나 사람들은 결국 억지로 진영을 우두머리로 삼으니, 현에서 그를 따르는 자가 2만 명이 되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진영을 왕으로 세우고자 해 따로 푸른 천의 모자를 써서 창두군(蒼頭軍)이라고 명명해 다른 군대와 구별하고 특별히 궐기한 뜻을 나타내었다.


진영의 모친이 진영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 가문으로 시집 온 이래 이제껏 너의 조상 중에 귀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네가 왕명(王名)을 얻는다는 것은 상서로운 일이 못 된다. 차라리 남의 밑에 있는 것이 낫다. 그러다가 거사가 성공하면 후(侯)에 봉해질 수 있고, 또 거사가 실패했을 경우라도 쉽게 화를 면할 수 있으니, 이는 네가 세상 사람들이 지목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영은 이에 감히 왕이 되지 못하고 그 군관(軍官)에게 말하기를 “항씨는 대대로 장수의 집안이며 초 나라에서도 이름이 높소. 그러니 지금 대사를 일으키고자 함에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이오. 우리들이 명문대족에 의탁하면 진(秦)의 멸망은 틀림없을 것이오.”라 했다.


이리하여 여러 군사들이 그의 말을 따라서 자신의 병졸들을 데리고 항량의 휘하에 들어갔다. 항량이 회수(淮水)를 건너자 경포(黥布), 포장군(蒲將軍) 또한 군대를 이끌고 휘하에 드니, 무릇 6만-7만의 군대가 하비(下邳)에 진을 쳤다.


當是時, 秦嘉30)已立景駒爲楚王,31) 軍彭城東,32) 欲距項梁. 項梁謂軍吏曰:「陳王先首事, 戰不利, 未聞所在. 今秦嘉倍陳王而立景駒, 逆無道.」乃進兵擊秦嘉. 秦嘉軍敗走, 追之至胡陵.33) 嘉還戰一日, 嘉死, 軍降. 景駒走死梁地. 項梁已幷秦嘉軍, 軍胡陵, 將引軍而西. 章邯軍至栗,34) 項梁使別將朱雞石、餘樊君與戰. 餘樊君死. 朱雞石軍敗, 亡走胡陵. 項梁乃引兵入薛,35) 誅雞石. 項梁前使項羽別攻襄城,36) 襄城堅守不下. 已拔, 皆阬之. 還報項梁. 項梁聞陳王定死, 召諸別將會薛計事. 此時沛公亦起沛, 往焉.


이때 진가(秦嘉)가 이미 경구(景駒)를 초왕으로 세우고, 팽성(彭城) 동쪽에 진을 치고는 항량의 군대를 막으려고 했다. 항량이 군관에게 말하기를 “진왕(陳王)이 제일 먼저 봉기했으나 전세는 불리하게 되고 지금은 행방조차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지금 진가가 진왕을 배반하고 경구를 왕으로 세웠으니 이는 대역무도한 일이다.”라고 하고는 즉시 진군해 진가를 공격했다. 이에 진가의 군대가 패주하자 항량은 그들을 호릉(胡陵)까지 추격했다. 반격하던 진가가 하루 만에 전사하자 그의 군대는 투항했고, 경구는 양(梁) 지역으로 달아나서 그곳에서 죽었다.


항량은 진가의 군대를 병합하고 나서 호릉에 진을 치고는 장차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려고 했다. 장한(章邯)의 군대가 율현(栗縣)에 이르니 항량은 별장(別將) 주계석(朱鷄石)과 여번군(餘樊君)으로 하여금 맞서 싸우도록 했으나 여번군은 전사하고 주계석의 군대는 패해 호릉으로 도주했다. 이에 항량은 군사를 이끌고 설현(薛縣)에 진입해 주계석을 죽였다. 그보다 먼저 항량은 항우에게 별도로 양성(襄城)을 공격하게 했는데, 양성은 수비가 굳건해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항우는 결국 성을 함락시키고 나서, 모두 산 채로 땅에 묻어버리고 돌아와서 항량에게 보고했다. 항량은 진왕(陳王)이 확실히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별장들을 설현에 불러 모아 대사를 의논했다. 이때 패(沛)에서 군사를 일으킨 패공(沛公) 역시 참석했다.


居鄛人范增,37) 年七十, 素居家, 好奇計, 往說項梁曰:「陳勝敗固當.38) 夫秦滅六國, 楚最無罪. 自懷王入秦不反, 楚人憐之至今, 故楚南公曰39)『楚雖三戶, 亡秦必楚』也.40) 今陳勝首事, 不立楚後而自立, 其勢不長. 今君起江東, 楚蜂午之將41)皆爭附君者, 以君世世楚將, 爲能復立楚之後也.」42)於是項梁然其言, 乃求楚懷王孫心民閒, 爲人牧羊, 立以爲楚懷王,43) 從民所望也.44) 陳嬰爲楚上柱國, 封五縣, 與懷王都盱台.45) 項梁自號爲武信君.


거소(居鄛) 사람 범증(范增)은 나이 70으로, 평소 출사(出仕)하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지내며 기묘한 계책을 생각하기를 좋아했는데, 그가 항량을 찾아가서 유세(遊說)하기를, “진승(陳勝)의 패배는 본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진나라가 육국(六國)을 멸했는데, 그중 초 나라가 가장 무고하게 당했습니다. 회왕(懷王)이 진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오지 못하신 이후 초 나라 사람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회왕을 가련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초 남공(楚南公)이 말하기를 ‘초 나라에 설사 세 집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진을 멸망시킬 나라는 반드시 초 나라이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진승이 제일 먼저 봉기해 초 나라의 후예를 세우지 아니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그 세력이 오래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대께서 강동(江東)에서 군사를 일으키시니 벌떼같이 일어난 초의 장수들이 모두 다투어 그대에게 귀의하는 것은 그대가 대대로 초 나라의 장수로서, 다시 초 나라의 후손을 왕으로 세울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입니다.”라 했다.


그러자 항량은 그 말을 그럴 듯하다고 여기고는 민간(民間)에서 남의 양치기 노릇을 하던 회왕의 손자 웅심(熊心)을 찾아서, 왕으로 세우고 초 회왕(楚懷王)이라고 하니, 이는 백성들이 바라던 바를 따른 것이었다. 진영(陳嬰)은 초 나라의 상주국(上柱國)이 되어 5 현을 식읍으로 받고 회왕과 더불어 우이(盱台)에 도읍했으며, 항량은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이라 했다.


항우의 책사 범증


居數月, 引兵攻亢父,46) 與齊田榮、司馬龍且47)軍救東阿,48) 大破秦軍於東阿. 田榮卽引兵歸, 逐其王仮. 仮亡走楚. 仮相田角亡走趙. 角弟田閒故齊將, 居趙不敢歸. 田榮立田儋子市爲齊王. 項梁已破東阿下軍, 遂追秦軍. 數使使趣49)齊兵, 欲與俱西. 田榮曰:「楚殺田仮, 趙殺田角、田閒, 乃發兵.」項梁曰:「田仮爲與國之王,50) 窮來從我, 不忍殺之.」趙亦不殺田角、田閒以市於齊.51) 齊遂不肯發兵助楚. 項梁使沛公及項羽別攻城陽,52) 屠之. 西破秦軍濮陽東,53) 秦兵收入濮陽. 沛公、項羽乃攻定陶.54) 定陶未下, 去, 西略地至雝丘,55) 大破秦軍, 斬李由.56) 還攻外黃,57) 外黃未下.


몇 달 후, 항량은 군사를 이끌고 항보(亢父)를 공격하고 제(齊)나라의 전영(田榮), 사마용저(司馬龍且)의 군대와 함께 동아(東阿)를 구원해, 동아에서 진군(秦軍)을 대파했다. 전영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서 제나라 왕인 전가(田假)를 쫓아내니, 전가는 초 나라로 달아났고 전가의 상국(相國)인 전각(田角)은 조(趙)나라로 도망했으며, 전각의 동생 전간(田閒)은 원래 제나라의 장수였으되 조나라에 머물며 감히 돌아가지 못했다. 전영은 전담(田儋)의 아들 전불(田市)을 제나라 왕으로 세웠다.


항량이 동아 일대에 진을 치고 있던 진군(秦軍)을 무찌르고 나서, 퇴주하는 진군을 추격하며 제군(齊軍)에 수차례 사자를 보내 함께 서쪽으로 진격할 것을 재촉했다. 이에 전영이 “초 나라가 전가를 죽이고, 조나라가 전각과 전간을 죽인다면 군대를 보내겠다.”라고 했다. 항량은 “전가는 동맹국의 왕이었다. 이제 신세가 곤궁하게 되어 내게 몸을 의탁했으니, 차마 죽이지 못하겠다.”라고 했고, 조나라 역시 전각과 전간을 죽이는 것으로써 제나라와 흥정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제나라는 끝내 군사를 보내 초 나라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항량은 패공과 항우로 하여금 별도로 성양(城陽)을 공격해 전멸시키고, 서쪽으로 진격해 복양(濮陽)의 동쪽에서 진군을 격파하니 진군은 복양으로 철수했다. 이에 패공과 항우가 정도(定陶)를 공격했으나 정도가 함락되지 않자 그곳을 버리고 서쪽을 공격해 옹구(雍丘)에 이르러 진군을 대파하고 이유(李由)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는 회군(回軍)해 외황(外黃)을 공격했으나 외황은 함락되지 않았다.


項梁起東阿, 西, (北)[比]至定陶, 再破秦軍, 項羽等又斬李由, 益輕秦, 有驕色. 宋義乃諫項梁曰:「戰勝而將驕卒惰者敗. 今卒少惰矣, 秦兵日益, 臣爲君畏之.」項梁弗聽. 乃使宋義使於齊. 道遇齊使者高陵君顯,58) 曰:「公將見武信君乎?」曰:「然.」曰:「臣論武信君軍必敗. 公徐行卽免死, 疾行則及禍.」秦果悉起兵益章邯, 擊楚軍, 大破之定陶, 項梁死. 沛公、項羽去外黃攻陳留, 陳留堅守不能下. 沛公、項羽相與謀曰:「今項梁軍破, 士卒恐.」乃與呂臣軍俱引兵而東. 呂臣軍彭城東, 項羽軍彭城西, 沛公軍碭.59)


항량은 동아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정도에 이를 때까지 두 차례나 진군을 무찌른 데다 항우 등이 이유의 목을 베자, 더욱 진나라를 경시하며 교만한 기색을 드러내었다. 이에 송의(宋義)가 항량에게 간(諫)하기를, “싸움에서 이겼다고 장수가 교만해지고 병졸들이 나태해진다면 패하고 말 것입니다. 지금 병졸들이 다소 나태해지고 있는데 진군은 날로 증가하고 있으니 신은 그것이 두렵습니다.” 라고 했으나 항량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송의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도중에 제나라의 사신인 고릉군(高陵君) 현(顯)을 만났다. 송의가 “공께서는 무신군을 만나시려는 것입니까?”라고 물으니 그는 “그렇소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송의가 “신이 생각하건대 무신군의 군사는 반드시 패할 것이니, 공께서 천천히 가신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나 급히 가신다면 화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과연 진나라는 모든 군사를 일으켜서 장한을 지원해 초군을 공격, 정도에서 크게 무찌르니 항량은 전사했고 패공과 항우는 외황을 버리고, 진류(陳留)를 공격했으나 진류의 수비가 견고해 함락시킬 수 없었다.패공과 항우가 서로 모의하기를 “지금 항량의 군대가 대파되어 병사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라고 하고는, 여신(呂臣)의 군대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진격해, 여신은 팽성 동쪽에 진을 치고, 항우는 팽성 서쪽, 패공은 탕(碭)에 진을 쳤다.


章邯已破項梁軍, 則以爲楚地兵不足憂, 乃渡河擊趙, 大破之. 當此時, 趙歇爲王, 陳餘爲將, 張耳爲相, 皆走入鉅鹿城. 章邯令王離、涉閒圍鉅鹿,60) 章邯軍其南, 築甬道而輸之粟.61) 陳餘爲將, 將卒數萬人而軍鉅鹿之北, 此所謂河北之軍也.


장한이 항량의 군사를 무찌른 후, 초 나라의 군대는 근심할 것이 없다고 여기고는 황하를 건너서 조나라를 공격해 크게 무찔렀다. 이때, 조나라는 조헐(趙歇)이 왕이었고, 진여(陳餘)가 장수, 장이(張耳)가 재상으로 있었는데, 모두 거록(巨鹿)으로 도망쳐버렸다. 장한은 왕리(王離)와 섭간(涉閒)으로 하여금 거록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그 남쪽에 진을 치고는 용도(甬道)를 만들어 군량을 조달했다. 진여는 조나라의 장수로서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거록 북쪽에 진을 치고 있었으니, 이것이 소위 ‘하북군(河北軍)’이었다.


楚兵已破於定陶, 懷王恐, 從盱台之彭城, 幷項羽、呂臣軍自將之. 以呂臣爲司徒, 以其父呂靑爲令尹.62) 以沛公爲碭郡長,63) 封爲武安侯, 將碭郡兵.

초군이 정도에서 크게 패한 후, 회왕은 두려워해 우이를 떠나 팽성으로 가서는 항우와 여신의 군대를 병합해 친히 통솔했다. 그리고 여신을 사도(司徒)로 삼고, 그의 부친 여청(呂靑)을 영윤(令尹)으로 삼았으며, 패공을 탕군의 군장(郡長)으로 삼고 무안후(武安侯)에 봉해 탕군의 군대를 거느리게 했다.


初, 宋義所遇齊使者高陵君顯在楚軍, 見楚王曰:「宋義論武信君之軍必敗, 居數日, 軍果敗. 兵未戰而先見敗徵, 此可謂知兵矣.」王召宋義與計事而大說之, 因置以爲上將軍, 項羽爲魯公, 爲次將, 范增爲末將, 救趙. 諸別將皆屬宋義, 號爲卿64)子冠軍.65) 行至安陽, 留四十六日不進.66) 項羽曰:「吾聞秦軍圍趙王鉅鹿, 疾引兵渡河, 楚擊其外, 趙應其內, 破秦軍必矣.」宋義曰:「不然. 夫搏牛之虻不可以破蟣蝨.67) 今秦攻趙, 戰勝則兵罷, 我承其敝;不勝, 則我引兵鼓行而西, 必擧秦矣. 故不如先鬥秦趙. 夫被堅執銳, 義不如公;坐而運策, 公不如義.」因下令軍中曰:「猛如虎, 很如羊,68) 貪如狼, 彊不可使者, 皆斬之.」乃遣其子宋襄相齊, 身送之至無鹽,69) 飮酒高會.70) 天寒大雨, 士卒凍飢. 項羽曰:「將戮力而攻秦, 久留不行. 今歲饑民貧, 士卒食芋菽,71) 軍無見糧,72) 乃飮酒高會, 不引兵渡河因趙食, 與趙幷力攻秦, 乃曰『承其敝』. 夫以秦之彊, 攻新造之趙, 其勢必擧趙. 趙擧而秦彊, 何敝之承! 且國兵新破, 王坐不安席, 埽境內而專屬於將軍, 國家安危, 在此一擧. 今不恤士卒而徇其私,73) 非社稷之臣.」項羽晨朝上將軍宋義, 卽其帳中斬宋義頭, 出令軍中曰:「宋義與齊謀反楚, 楚王陰令羽誅之.」當是時, 諸將皆慴服, 莫敢枝梧.74) 皆曰:「首立楚者, 將軍家也. 今將軍誅亂.」乃相與共立羽爲仮上將軍.75) 使人追宋義子, 及之齊, 殺之. 使桓楚報命於懷王. 懷王因使項羽爲上將軍,76) 當陽君、蒲將軍皆屬項羽.


일찍이 송의가 만난 제나라의 사신 고릉군 현이, 마침 초 나라 군중에 있었는데, 초왕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다. “송의는 무신군의 군사가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며칠 후 무신군의 군대가 과연 패했습니다. 군대가 아직 싸우기도 전에 미리 그 패배의 조짐을 알았으니 이는 병법을 안다고 말할 만합니다.”


왕이 송의를 불러 더불어 대사를 의논하고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았다. 그리고 항우는 노공(魯公)에 봉해져서 차장(次將)이 되었고 범증은 말장(末將)이 되어서 조나라를 구원하기로 했다. 여러 별장들이 모두 송의의 휘하에 속하게 되니, 송의는 경자관군(卿子冠軍)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군대가 안양(安陽)에 이르러 46일 동안을 머물며 진격하지 않으니, 항우가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진군이 조왕(趙王)을 거록에서 포위하고 있다고 하니, 급히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서 초 나라는 그 바깥을 치고 조나라는 안에서 호응한다면 진군을 반드시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송의가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소. 대저 소를 물어뜯는 등에가 이(蝨)를 죽일 수는 없는 것이오. 지금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는데, 전쟁에서 승리를 한다 해도 병졸들은 피로해질 것이니 우리는 그 피곤한 틈을 이용할 것이오. 진이 승리하지 못할 경우 우리가 군사를 이끌고 북을 치며 전진해 서쪽을 친다면, 반드시 진나라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진나라와 초 나라로 하여금 싸우도록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 실전을 하는 일에서는 내가 그대보다는 못하지만, 앉아서 책략을 부리는 일에서는 그대가 나보다 못할 것입니다.”


이어 군중에 영을 내리기를 “사납기가 호랑이 같거나 제멋대로 하기가 양(羊) 같으며, 탐욕스럽기가 승냥이 같거나 고집이 세어 부릴 수 없는 자는 모두 목을 벨 것이다.”라 했다. 그리고는 그의 아들 송양(宋襄)을 제나라에 보내어 제왕을 돕게 했다. 친히 무염(無鹽)까지 전송하고는 성대한 주연을 베풀었다. 날은 춥고 비가 거세어 사졸들은 추위와 허기에 지치게 되었다.


그러자 항우가 이렇게 말했다. “장차 죽을힘을 다해 진나라를 공격해야 하거늘 오랫동안 머물며 진격하지 아니하더니, 지금에는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은 궁핍하고 사졸들은 토란과 콩으로 연명하며, 군영(軍營)에는 저장된 군량이 없는데도 성대한 연회를 벌여서 술이나 마시기만 할 뿐,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조나라의 군량을 먹으며 조나라와 함께 힘을 합쳐서 진나라를 공격하지 아니하면서, 그저 말하기를 ‘그들이 지친 틈을 이용하리라’라고만 말한다. 대저 진나라의 강대함으로 지금 막 일어난 조나라를 공격하게 된다면, 그 형세는 조나라를 함락시킬 것이 당연한데, 조나라가 함락되고 진나라가 강해진 뒤에 무슨 지친 틈을 이용하겠다는 것인가? 또 우리 군사가 지금 막 패전한 터이라 왕께서 좌불안석하시어 온 나라의 병사를 통틀어 오로지 장군의 휘하에 속하게 하셨으니 국가의 안위는 오직 이 거사(擧事)에 달려 있다. 그런데도 지금 사졸을 돌보지 아니하고 그 사사로운 정만을 따르니 사직을 보존하려는 신하가 아니로다.”


그리하여 항우는 아침에 상장군 송의의 막사를 찾아가서 그 자리에서 송의의 머리를 베고 군중(軍中)에 영을 내리기를 “송의는 제나라와 더불어 초나라를 배반할 모의를 꾸미고 있었으므로, 초왕께서 은밀히 나에게 그를 주살하게 하셨다.”라 했다. 그러자 당시 여러 장수들은 모두 두려워서 복종하고 감히 저항하지 못하며 말하기를 “처음 초나라를 세운 것은 장군의 집안이시더니 지금 장군께서 난신을 주살하셨습니다.”라 했다. 이에 서로들 모두 항우를 임시 상장군으로 세우고, 사람을 보내 송의의 아들을 제나라까지 추격하게 해 그를 죽였다. 그리고는 환초(桓楚)를 보내어 회왕께 보고하게 하자, 회왕은 항우를 상장군으로 삼고 당양군(當陽君), 포장군(蒲將軍) 등을 모두 항우의 휘하에 소속시켰다.


項羽已殺卿子冠軍, 威震楚國, 名聞諸侯. 乃遣當陽君、蒲將軍將卒二萬渡河,77) 救鉅鹿. 戰少利, 陳餘復請兵. 項羽乃悉引兵渡河, 皆沈船, 破釜甑, 燒廬舍, 持三日糧, 以示士卒必死, 無一還心. 於是至則圍王離, 與秦軍遇, 九戰, 絶其甬道, 大破之, 殺蘇角,78) 虜王離. 涉閒不降楚, 自燒殺. 當是時, 楚兵冠諸侯. 諸侯軍救鉅鹿下者十餘壁, 莫敢縱兵. 及楚擊秦, 諸將皆從壁上觀. 楚戰士無不一以當十, 楚兵呼聲動天, 諸侯軍無不人人惴恐.79) 於是已破秦軍, 項羽召見諸侯將, 入轅門,80) 無不膝行而前, 莫敢仰視. 項羽由是始爲諸侯上將軍, 諸侯皆屬焉.


항우가 경자관군 송의를 죽인 후, 그의 위엄이 온 초 나라를 진동시키고 명성은 제후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이에 당양군과 포장군으로 하여금 병사 2만을 이끌고 장하(漳河)를 건너서 거록을 구원하게 했으나 싸움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진여가 또 구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항우가 군사를 이끌고 장하를 건너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 등의 취사도구를 깨뜨리고 막사를 불사른 뒤 3일분의 군량만을 휴대함으로써 사졸들에게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며 추호도 살아 돌아올 마음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이리하여 거록에 도착하자마자 왕리(王離)를 포위하고 진의 군사와 수차례 접전해 그들의 용도(甬道)를 끊어서 크게 무찔렀으며, 소각(蘇角)을 죽이고 왕리를 포로로 했다. 섭간은 초나라에 투항하지 않고 분신자살했다. 이때 초군은 제후군(諸侯軍) 가운데 으뜸이었으니, 거록을 구하고자 달려온 제후군이 10여 진영이었으나 감히 함부로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고, 초군이 진군을 공격할 때에도 여러 장수들은 모두 자신의 진영에서 관전만하고 있을 뿐이었다. 초 나라 군사는 전원이 다 한 명이 열 명을 대적할 정도로 용맹스러웠으며, 초군의 고함소리가 하늘을 진동시키니 제후군들은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진군을 무찌르고 난 후, 항우가 제후군의 장수들을 불러 원문(轅門)에 들게 하자 모두 다 무릎걸음으로 나오며 감히 고개를 들어 쳐다보지 못했다. 이때부터 항우는 비로소 제후군의 상장군이 되니 제후들이 모두 그의 휘하에 소속되었다.


항우의 진가가 발휘된 거록전투


章邯軍棘原,81) 項羽軍漳南,82) 相持未戰. 秦軍數卻, 二世使人讓章邯. 章邯恐, 使長史欣請事. 至咸陽, 留司馬門83)三日, 趙高不見, 有不信之心. 長史欣恐, 還走其軍,84) 不敢出故道, 趙高果使人追之, 不及. 欣至軍, 報曰:「趙高用事於中, 下無可爲者. 今戰能勝, 高必疾妒吾功;戰不能勝, 不免於死. 願將軍孰計之.」陳餘亦遺章邯書曰:「白起爲秦將, 南征鄢郢, 北阬馬服,85) 攻城略地, 不可勝計, 而竟賜死. 蒙恬爲秦將, 北逐戎人, 開楡中地數千里,86) 竟斬陽周.87) 何者? 功多, 秦不能盡封, 因以法誅之. 今將軍爲秦將三歲矣, 所亡失以十萬數, 而諸侯並起滋益多. 彼趙高素諛日久, 今事急, 亦恐二世誅之, 故欲以法誅將軍以塞責, 使人更代將軍以脫其禍. 夫將軍居外久, 多內卻, 有功亦誅, 無功亦誅. 且天之亡秦, 無愚智皆知之. 今將軍內不能直諫, 外爲亡國將, 孤特獨立而欲常存, 豈不哀哉! 將軍何不還兵與諸侯爲從,88) 約共攻秦, 分王其地, 南面稱孤;此孰與身伏鈇質,89) 妻子爲僇乎?」章邯狐疑, 陰使候始成90)使項羽, 欲約. 約未成, 項羽使蒲將軍日夜引兵度三戶,91) 軍漳南, 與秦戰, 再破之. 項羽悉引兵擊秦軍汙水上,92) 大破之.


장한은 극원(棘原)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항우는 장하 남쪽에 주둔시켜 서로 대치한 채로 싸우지 않았다. 그런데 진군이 여러 차례 퇴각하자, 2세 황제는 사람을 보내어 장한을 꾸짖었다. 장한은 두려워서 장사(長史) 사마흔(司馬欣)을 보내 알현을 청하게 했다. 그가 함양(咸陽)에 이르러 사마문(司馬門)에 3일을 머물렀는데도 조고(趙高)는 만나주지 않으며 불신하는 마음을 품었다. 장사 사마흔은 두려워 자신의 부대로 돌아가면서도 감히 왔던 길로 가지 못했다. 과연 조고가 사람을 보내 그를 추격하게 했으나 미처 따라잡지는 못했다. 사마흔은 자신의 부대로 돌아와서 이렇게 보고했다.


“조고가 궁중 안에서 정권을 마음대로 하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제대로 일을 할 만한 자가 없습니다. 만일 지금 전쟁에서 이기면 조고는 반드시 우리의 공로를 시기할 것이며, 전쟁에 져도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원하건대 장군께서는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진여도 장한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렇게 말했다. “백기(白起)는 진나라의 장수가 되어 남으로 언영(鄢郢)을 정벌하고, 북으로 마복(馬服)을 땅에 묻었으며, 성을 공격하고 땅을 빼앗은 것이 이루 다 셀 수 없이 많은데도 마침내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또 몽염(蒙恬)은 진나라의 장수로서 북쪽으로 융인(戎人)을 쫓아내고, 유중(楡中) 지역 수천 리를 개척했으나 마침내는 양주(陽周)에서 참살당했으니, 이것은 어찌 된 까닭입니까? 공이 너무 많아서 진나라가 모두 봉록을 줄 수 없기 때문에 법을 구실로 그들을 죽인 것입니다.


지금 장군께서 진나라의 장수가 되신 지 3년이 되었는데 잃은 병력이 10만을 헤아리되 봉기하는 제후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저 조고는 평소 아첨만을 일삼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금 일이 다급해지고 또 2세가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법을 빌미로 장군을 주살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책망을 틀어막고, 사람을 보내어 장군을 대신하게 함으로써 그 화(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대저 장군께서 밖에서 머문 지가 오래되니 조정과의 틈이 많아져서 공이 있다고 해도 죽임을 당할 것이요, 공이 없다고 해도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또 하늘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를 막론하고 다 아는 일입니다.


지금 장군께서 안으로는 직간(直諫)할 수 없고, 또 밖으로는 망국의 장수로서 홀로 외로이 서서 오래도록 버티려고 하시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장군께서는 어째서 병사를 돌리어 제후들과 연합하고 함께 진나라를 공격할 것을 맹약해 그 땅을 나누어가진 뒤 왕이 되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하시는 것과, 자신의 몸이 부질(鈇質)에 엎드리게 되고 처자는 살육당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습니까?”


장한은 주저하며 항우에게 몰래 후시성(侯始成)을 보내어 협약하고자 했다. 협약이 아직 이루어지기 전, 항우가 포장군으로 하여금 밤낮으로 병사를 이끌고 삼호(三戶)를 건너서 장하 남쪽에 주둔하게 하고는 진나라와 싸움을 벌여서 다시 그들을 무찌르게 했다. 항우는 모든 병사를 이끌고 오수(汙水)에서 진군을 공격해 크게 무찔렀다.


군대를 사열한 희마대에 세워진 항우의 상


章邯使人見項羽, 欲約. 項羽召軍吏謀曰:「糧少, 欲聽其約.」軍吏皆曰:「善.」項羽乃與期洹水南殷虛上.93) 已盟, 章邯見項羽而流涕, 爲言趙高. 項羽乃立章邯爲雍王, 置楚軍中. 使長史欣爲上將軍, 將秦軍爲前行.94)


장한이 항우에게 사람을 보내어 협약하고자 하니, 항우가 군리(軍吏)를 불러서 모의하기를 “군량이 적으니 그 협약에 응할까 한다.”라고 하자, 군리들이 모두 말하기를 “좋습니다.”라 했다. 항우는 이에 원수(洹水)의 남쪽 은허(殷虛)에서 만날 것을 약조했다. 협약하고 난 뒤 장한은 항우를 만나서 눈물을 흘리며 조고의 여러 악행을 말했다. 항우는 이에 장한을 옹왕(雍王)으로 세워서 초 나라 군중에 있게 하고, 장사 사마흔을 상장군으로 임명해 진군의 선봉으로 삼았다.


到新安.95) 諸侯吏卒異時故繇使屯戍過秦中, 秦中吏卒遇之多無狀, 及秦軍降諸侯, 諸侯吏卒乘勝多奴虜使之, 輕折辱秦吏卒. 秦吏卒多竊言曰:「章將軍等詐吾屬降諸侯, 今能入關破秦, 大善;卽不能, 諸侯虜吾屬而東, 秦必盡誅吾父母妻子.」諸侯微聞其計, 以告項羽. 項羽乃召黥布、蒲將軍計曰:「秦吏卒尙衆, 其心不服, 至關中不聽, 事必危, 不如擊殺之, 而獨與章邯、長史欣、都尉翳入秦.」於是楚軍夜擊阬秦卒二十餘萬人新安城南.96)


군대가 신안(新安)에 이르렀을 때였다. 제후군의 장병(將兵)들이 예전에 요역(徭役)과 변경수비에 동원되어 진나라를 지날 때에 진나라의 장병들이 그들을 아주 무례하게 대했었다. 한데 지금 진군이 제후군에게 항복하자, 제후군의 장병들은 승세(勝勢)를 이용해, 그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진나라의 장병들을 걸핏하면 학대하고 모욕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자 진나라의 장병들이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기를, “장(章) 장군 등이 우리들을 속여 제후들에게 투항하게 했는데, 지금 만일 관내(關內)에 들어가서 진나라를 무찌른다면 아주 좋은 일이나 만일 그러지 못한다면 제후군들은 우리를 포로로 해 동쪽으로 퇴각할 것이니, 진나라는 우리의 부모와 처자를 모두 다 죽일 것은 분명한 일이다.”라 했다. 제후군의 장수가 몰래 그 말을 듣고서 항우에게 보고했다.


이에 항우는 경포와 포장군을 불러서 계책을 말하기를 “진나라의 장병들이 아직도 그 수가 많은 데다 마음으로 복종한 것이 아니니, 관중(關中)에 이르러서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일이 위태롭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죽이고 장한, 장사 사마흔, 도위(都尉) 동예(董翳)만을 데리고 진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나으리라.”라 했다. 이리하여 초군은 밤에 진군을 습격해 진나라 병졸 20여만 명을 신안성 남쪽에 생매장했다.


行略定秦地. 函谷關97)有兵守關, 不得入. 又聞沛公已破咸陽, 項羽大怒, 使當陽君等擊關. 項羽遂入, 至于戱西. 沛公軍霸上, 未得與項羽相見. 沛公左司馬曹無傷使人言於項羽曰:「沛公欲王關中, 使子嬰爲相, 珍寶盡有之.」項羽大怒, 曰:「旦日饗士卒, 爲擊破沛公軍!」當是時, 項羽兵四十萬, 在新豐鴻門,98) 沛公兵十萬, 在霸上. 范增說項羽曰:「沛公居山東時, 貪於財貨, 好美姬. 今入關, 財物無所取, 婦女無所幸, 此其志不在小. 吾令人望其氣, 皆爲龍虎, 成五采, 此天子氣也. 急擊勿失.」


항우는 진나라의 땅을 공략해 평정시키려고 함곡관에 도착했으나 관(關)을 지키는 병사가 있어 들어갈 수 없는 데다 패공이 이미 함양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자 크게 노하여 당양군 등을 보내어 함곡관을 공격하게 했다. 항우가 마침내 관내에 들어가서 희수(戱水) 서쪽에 이르렀다. 이때 패공은 패상(覇上)에 주둔하고 있어 항우와 아직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패공의 좌사마(左司馬) 조무상(曹無傷)이 사람을 시켜서 항우에게 말하기를 “패공이 관중의 왕이 되고 자영을 재상으로 삼아 진귀한 보물을 모두 다 차지하려고 한다.”라 했다. 이에 항우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일 아침 병사들을 잘 먹이고 패공의 군대를 격파하리라.”라 했다. 이때 항우의 병사는 40만으로 신풍(新豐)의 홍문(鴻門)에 있었고, 패공의 병사는 10만으로 패상에 있었다. 범증이 항우에게 이렇게 권했다. “패공은 산동(山東)에 있을 때 재화(財貨)를 탐하고 미색(美色)을 좋아했는데, 지금 관내에 들어가서는 재물을 취하지 아니하고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으니 이는 그의 뜻이 작은 데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사람을 시켜 그 기(氣)를 살펴보게 했더니 모두 용과 범의 기세로서 오색 찬연하니 이는 천자의 기세입니다. 급히 공격하시어 기회를 잃지 마소서.”


楚左尹項伯者, 項羽季父也,99) 素善留侯張良. 張良是時從沛公, 項伯乃夜馳之沛公軍, 私見張良, 具告以事, 欲呼張良與俱去. 曰:「毋從俱死也.」張良曰:「臣爲韓王送沛公,100) 沛公今事有急, 亡去不義, 不可不語.」良乃入, 具告沛公. 沛公大驚, 曰:「爲之柰何?」張良曰:「誰爲大王爲此計者?」曰:「鯫生101)說我曰『距關, 毋內諸侯, 秦地可盡王也』. 故聽之.」良曰:「料大王士卒足以當項王乎?」沛公黙然, 曰:「固不如也, 且爲之柰何?」張良曰:「請往謂項伯, 言沛公不敢背項王也.」沛公曰:「君安與項伯有故?」張良曰:「秦時與臣游, 項伯殺人, 臣活之. 今事有急, 故幸來告良.」沛公曰「孰與君少長?」良曰:「長於臣.」沛公曰「君爲我呼入, 吾得兄事之.」張良出, 要項伯. 項伯卽入見沛公. 沛公奉卮酒爲壽, 約爲婚姻, 曰:「吾入關, 秋豪不敢有所近, 籍吏民, 封府庫, 而待將軍. 所以遣將守關者, 備他盜之出入與非常也. 日夜望將軍至, 豈敢反乎! 願伯具言臣之不敢倍德也.」項伯許諾. 謂沛公曰:「旦日不可不蚤自來謝項王.」沛公曰:「諾.」於是項伯復夜去, 至軍中, 具以沛公言報項王. 因言曰:「沛公不先破關中, 公豈敢入乎? 今人有大功而擊之, 不義也, 不如因善遇之.」項王許諾.


초 나라의 좌윤(左尹) 항백(項伯)은 항우의 계부(季父)였는데 평소에 유후(留侯) 장량(張良)과 친했다. 장량은 이때 패공을 따르고 있었다. 이에 항백은 밤에 패공의 군영으로 달려갔다. 그는 은밀히 장량을 만나서 모든 일을 상세히 알리고 함께 가자며 말하기를 “패공을 따라서 함께 죽지 마십시오.”라 했다. 그러자 장량이 말하기를 “신(臣)은 한왕(韓王)을 위해서 패공을 따르고 있는데 패공이 지금 위태로운 일이 있다고 해 도망하는 것은 의롭지 못한 일입니다. 이 사실을 패공께 아뢰지 않을 수 없군요.”라고 하고는 들어가서 패공에게 전부 고했다.


패공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이를 어떻게 해야 좋은가?”라고 하자 장량이 말하기를 “누가 대왕께 그러한 계책을 말했나이까?”라고 하니, 패공은 “어떤 소견 좁은 서생이 나에게 ‘관(關)을 막고서 제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진나라의 넓은 영토에서 왕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권하기에 그 말을 따랐소.”라고 대답했다. 장량이 말하기를 “대왕의 병졸이 항왕을 당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라고 하자 패공이 잠자코 있다가 말하기를 “물론 못 하지요. 장차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니, 장량이 말하기를 “청컨대 항백에게 패공께서는 감히 항왕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십시오.”라 했다.


패공이 말하기를 “그대는 어떻게 항백과 친분을 가지셨소?”라고 하니, 장량이 말하기를 “신이 진(秦)에 있을 적에 그와 더불어 어울렸는데, 항백이 사람을 죽여 신이 그를 살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위급한 일이 생기자 다행스럽게 찾아와 제게 알려 주었습니다.”라 했다. 패공이 “두 사람 중 누가 연장이오?”라고 물으니, 장량이 “항백의 나이가 신보다 많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패공이 말하기를 “그대가 항백을 불러주시오. 내가 그를 형으로 섬길 것이오.”라 했다. 이에 장량이 나가서 항백을 불러들이니, 항백은 즉시 들어와서 패공을 알현했다.


패공은 술잔을 들어 축수(祝壽)하고 혼인(婚姻) 관계를 약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관내(關內)에 들어온 뒤, 터럭만한 작은 물건도 감히 가까이하지 아니하고, 아전과 백성들의 호적을 정리하고 부고(府庫)를 잘 관리하며 항 장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수를 보내어 관을 지키게 한 것은 다른 도적의 출입과 의외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밤낮으로 장군이 오시기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어찌 감히 반역을 하겠습니까? 원컨대 당신께서 신이 감히 배은망덕하지 않다는 것을 상세히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항백이 허락하며 패공에게 말하기를 “내일 아침 일찌감치 오셔서 항왕께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패공은 “좋습니다.”라 했다.

이리하여 항백은 그날 밤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가 군영에 이르러 패공의 말을 낱낱이 항왕에게 보고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패공이 먼저 관중을 쳐부수지 않았다면 공이 어찌 들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그가 큰 공이 있음에도 그를 공격하려고 하신다면 이는 의롭지 못한 일이니, 잘 대우해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자 항왕이 허락했다.


홍문연에서 유방을 죽이려는 것을 미리 알려준 항우의 숙부 항백


沛公旦日從百餘騎來見項王, 至鴻門, 謝曰:「臣與將軍戮力而攻秦, 將軍戰河北, 臣戰河南, 然不自意能先入關破秦, 得復見將軍於此. 今者有小人之言, 令將軍與臣有卻.」項王曰:「此沛公左司馬曹無傷言之;不然, 籍何以至此.」項王卽日因留沛公與飮. 項王、項伯東嚮坐. 亞父南嚮坐. 亞父者, 范增也.102) 沛公北嚮坐, 張良西嚮侍. 范增數目項王, 擧所佩玉玦以示之者三, 項王黙然不應. 范增起, 出召項莊,103) 謂曰:「君王爲人不忍, 若入前爲壽, 壽畢, 請以劍舞, 因擊沛公於坐, 殺之. 不者, 若屬皆且爲所虜.」莊則入爲壽, 壽畢, 曰:「君王與沛公飮, 軍中無以爲樂, 請以劍舞.」項王曰:「諾.」項莊拔劍起舞, 項伯亦拔劍起舞, 常以身翼蔽沛公, 莊不得擊. 於是張良至軍門, 見樊噲. 樊噲曰:「今日之事何如?」良曰:「甚急. 今者項莊拔劍舞, 其意常在沛公也.」噲曰:「此迫矣, 臣請入, 與之同命.」噲卽帶劍擁盾入軍門.104) 交戟之衛士欲止不內, 樊噲側其盾以撞,105) 衛士仆地, 噲遂入, 披帷西嚮立, 瞋目視項王,106) 頭髮上指, 目眥盡裂.107) 項王按劍而跽108)曰:「客何爲者?」張良曰:「沛公之參乘樊噲者也.」項王曰:「壯士, 賜之卮酒.」則與斗卮酒. 噲拜謝, 起, 立而飮之. 項王曰:「賜之彘肩.」則與一生彘肩. 樊噲覆其盾於地, 加彘肩上, 拔劍切而啗之.109) 項王曰:「壯士, 能復飮乎?」樊噲曰:「臣死且不避, 卮酒安足辭! 夫秦王有虎狼之心, 殺人如不能擧, 刑人如恐不勝, 天下皆叛之. 懷王與諸將約曰『先破秦入咸陽者王之』. 今沛公先破秦入咸陽, 豪毛不敢有所近, 封閉宮室, 還軍霸上, 以待大王來. 故遣將守關者, 備他盜出入與非常也. 勞苦而功高如此, 未有封侯之賞, 而聽細說, 欲誅有功之人. 此亡秦之續耳, 竊爲大王不取也.」項王未有以應, 曰:「坐.」樊噲從良坐. 坐須臾, 沛公起如廁, 因招樊噲出.


패공은 이튿날 아침 백여 기(騎)를 대동하고 항왕을 만나러 왔는데, 홍문에 이르러 사죄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은 장군과 더불어 죽을힘을 다해서 진나라를 공격했으니, 장군께서는 하북에서 싸움을 벌이시고 신은 하남에서 싸움을 벌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먼저 관중에 진입해 진나라를 무찌르고 이곳에서 다시 장군을 뵈올 수 있게 되었는데, 지금 소인배의 참언이 장군과 신으로 하여금 틈이 생기게 했습니다. 이에 항왕이 말하기를 “이는 패공의 좌사마인 조무상이 말한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했겠소?”라 했다.


항왕은 그날 함께 술을 마시기 위해 패공을 머무르게 하니, 항왕과 항백은 동쪽을 향해서 앉고 아부(亞父)는 남쪽을 향해서 앉았는데, 아부는 범증이었다. 한편 패공은 북쪽을 향해 앉고 장량은 서쪽을 향해 배석했다. 범증이 항왕에게 여러 차례 눈짓을 하며 차고 있던 옥결(玉玦)을 들어서 암시한 것이 세 차례였으나, 항왕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에 범증이 일어나 밖으로 나와 항장(項莊)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군왕(君王)의 사람됨이 모질지 못하시니, 그대는 들어가서 앞에서 축수를 올리고 축수를 마친 뒤 검무(劍舞)를 출 것을 청하라. 그러다가 기회를 보아서 패공을 앉은 자리에서 쳐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들은 모두 장차 패공에게 포로가 될 것이다.”


그러자 항장이 즉시 들어가서 축수를 올리고 축수가 끝난 뒤 말하기를 “군왕과 패공께서 주연을 여시는데 군중에 취흥을 돋을 만한 것이 없으니 검무를 추고자 하나이다.”라 했다. 항왕이 “좋다.”라고 하니 항장은 검을 뽑아서 춤을 추는데, 항백 역시 검을 뽑아들고 일어나서 춤을 추며 항상 몸으로 패공을 감싸주니 항장이 유방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이때 장량이 군문(軍門)에 갔다가 번쾌(樊噲)를 만났다. 번쾌가 “오늘 일이 어떠합니까?”라고 묻자, 장량이 말하기를 “심히 위급하다. 지금 항장이 검을 뽑아들고 춤을 추는데 그 의도는 오로지 패공을 해치는 데에 있다.”라 했다. 번쾌가 말하기를 “이는 급박한 일입니다. 신이 들어가 패공과 함께 생사를 같이하기를 청합니다.”라 했다. 번쾌는 즉시 검을 차고 방패를 들고는 군문을 들어갔다.


파수(把守)를 서는 위사(衛士)가 막으며 들여보내려고 하지 않자, 번쾌가 방패를 비껴 치니 위사들은 땅에 엎어졌다. 번쾌가 마침내 들어가서 장막을 들치고 서쪽을 향해 서서 눈을 부릅뜨고 항왕을 노려보았는데, 머리카락은 위로 곤두서고 눈 꼬리는 찢어질 대로 찢어져 있었다. 항왕이 검을 만지며 무릎을 세워서 앉고 말하기를 “그대는 무엇 하는 자인가?”라고 하니, 장량이 말하기를 “패공의 참승(參乘) 번쾌라는 자입니다.”라 했다. 항왕이 말하기를 “장사로다. 그에게 술 한 잔을 내리라.”라 했다. 즉시 큰 잔에 술이 주어졌는데, 번쾌는 감사의 절을 하고 일어나 선 채로 마셔버렸다. 그러자 항왕이 “그에게 돼지 다리를 주어라.”라고 말하니 즉시 익히지 않은 돼지 다리 하나를 주었다. 번쾌는 방패를 땅에 엎어놓고 그 위에 돼지 다리를 올려놓고는 검을 뽑아서 잘라서 먹었다.

항왕이 말하기를 “장사로다. 더 마실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번쾌가 이렇게 말했다. “신은 죽음도 피하지 않는 사람인데 술 한 잔을 어찌 사양할 수 있겠나이까! 진왕에게 흉악한 마음이 있어, 다 죽이지 못할 것이 우려되는 듯 사람을 죽이고, 만들어놓은 형벌을 다 사용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듯 사람에게 형벌을 내리니, 천하가 모두 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그리하여 회왕께서 여러 장수들에게 약조하시기를 “먼저 진나라를 무찌르고 함양에 들어가는 자를 왕으로 세우리라.”고 하셨는데, 지금 패공께서는 먼저 진나라를 무찌르고 함양에 진입하셨으되 터럭만한 작은 물건이라도 감히 가까이 취한 바 없으며, 궁실을 굳게 잠그고 다시 패상으로 돌아와서 군대를 주둔시켜 대왕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일부러 장수를 보내 관을 지키도록 한 이유는 다른 도적들의 출입과 위급한 경우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애써 수고를 하고 공로 또한 이처럼 높은데 봉후(封侯)의 상을 내리시지 못할망정 소인배의 쓸데없는 말을 들으시고 공이 있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시니, 이는 멸망한 진나라를 잇는 꼴이 될 뿐입니다. 대왕을 위해서 제 나름대로 생각하건대 그 같은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옳을듯합니다.” 항왕은 이에 대해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고 말하기를 “앉으라.”라고 하니 번쾌는 장량을 따라서 앉았다. 번쾌가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패공이 일어나서 측간을 가면서 그를 밖으로 불러내었다.


세기의 술자리가 열렸던 홍문연


沛公已出, 項王使都尉110)陳平召沛公. 沛公曰:「今者出, 未辭也, 爲之柰何?」樊噲曰:「大行不顧細謹, 大禮不辭小讓. 如今人方爲刀俎, 我爲魚肉, 何辭爲.」於是遂去. 乃令張良留謝. 良問曰:「大王來何操?」曰:「我持白璧一雙, 欲獻項王, 玉斗一雙, 欲與亞父, 會其怒, 不敢獻. 公爲我獻之」張良曰:「謹諾.」當是時, 項王軍在鴻門下, 沛公軍在霸上, 相去四十里. 沛公則置車騎, 脫身獨騎, 與樊噲、夏侯嬰、靳彊、紀信等111)四人持劍盾步走, 從酈山下, 道芷陽閒行. 沛公謂張良曰:「從此道至吾軍, 不過二十里耳. 度我至軍中, 公乃入.」沛公已去, 閒至軍中, 張良入謝, 曰:「沛公不勝桮杓, 不能辭. 謹使臣良奉白璧一雙, 再拜獻大王足下;玉斗一雙, 再拜奉大將軍足下.」項王曰:「沛公安在?」良曰:「聞大王有意督過之, 脫身獨去, 已至軍矣.」112)項王則受璧, 置之坐上. 亞父受玉斗, 置之地, 拔劍撞而破之, 曰:「唉!113) 豎子不足與謀. 奪項王天下者, 必沛公也, 吾屬今爲之虜矣.」沛公至軍, 立誅殺曹無傷.


패공이 나간 뒤 항왕은 도위(都尉) 진평(陳平)에게 패공을 불러오게 했다. 패공이 “지금 하직인사도 하지 않고 나왔으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라고 물으니, 번쾌가 말하기를 “큰일을 할 때에는 자질구레한 예절은 신경 쓰지 않는 법이요, 큰 예절을 행함에는 작은 허물을 사양치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들이 바야흐로 칼과 도마가 되고, 우리는 그 위에 놓인 물고기의 신세가 된 지경에 무슨 인사말을 하시려고 합니까?”라 했다.


마침내 그곳을 떠나며 장량으로 하여금 남아서 사죄하게 했다. 장량이 묻기를 “대왕께서는 오실 때 무슨 선물을 가지고 오셨습니까?”라고 하니, 패공이 말하기를 “백벽(白璧) 한 쌍을 가져와서 항왕에게 바치려 했으며, 옥두(玉斗) 한 쌍은 아부(亞父)에게 주고자 했는데, 그 노한 모습을 대하고는 감히 바치지를 못했소이다. 그러니 공께서 나를 대신해서 바쳐주시오.”라 했다. 장량이 말하기를 “삼가 받들겠나이다.”라 했다. 이때 항왕의 군대는 홍문 아래에 있었고 패공의 군대는 패상에 있었으니 서로 떨어진 거리가 40 리였다. 패공은 자신의 수레와 말을 버려둔 채 몸만 빠져나와서 홀로 말에 오르고, 검과 방패를 들고 도보로 수행하는 번쾌, 하후영(夏侯嬰), 근강(靳彊), 기신(紀信) 등 네 사람과 함께 여산(驪山)을 내려와서 지양(芷陽)의 샛길을 이용했다.


그전에 패공은 장량에게 이르기를 “이 길을 통해서 우리 군영까지는 20 리에 불과하니, 내가 군영에 이르렀다고 생각되거든 공께서는 즉시 들어가시오.”라 했다. 패공이 나간 뒤 샛길을 통해서 군영에 이르렀을 때가 되자 장량은 들어가서 사죄해 이렇게 말했다. “패공께서 술을 이기지 못해 하직인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삼가 신 장량으로 하여금 백벽 한 쌍을 받들어 대왕 족하(足下)께 재배(再拜)의 예를 올리며 바치게 하고, 옥두 한 쌍은 대장군 족하께 재배의 예를 올리며 바치게 했나이다.” 항왕이 “패공은 어디에 계신가?”라고 물으니, 장량이 대답하기를 “대왕께서 심히 질책하려는 마음이 있으시다는 것을 듣고 빠져나가서 홀로 떠났는데 이미 군영에 당도했을 것입니다.”라 했다.


그러자 항왕은 구슬을 받아서 자리 위에 두었는데, 아부는 옥두를 받아서 땅에 놓고는 검을 뽑아 그것을 깨뜨리며 말하기를 “에이! 어린아이와는 더불어 대사를 도모할 수가 없도다. 항왕의 천하를 빼앗을 자는 반드시 패공일 것이며, 우리들은 이제 그의 포로가 될 것이다.”라 했다. 패공은 군영에 당도하자마자 즉시 조무상을 베어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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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가 유방을 죽이지 못하자 옥을 깨며 분통을 터뜨리는 범증


居數日, 項羽引兵西屠咸陽, 殺秦降王子嬰, 燒秦宮室, 火三月不滅;收其貨寶婦女而東. 人或說項王曰:「關中阻山河四塞,114) 地肥饒, 可都以霸.」項王見秦宮皆以燒殘破, 又心懷思欲東歸, 曰:「富貴不歸故鄕, 如衣繡夜行, 誰知之者!」說者曰:「人言楚人沐猴而冠耳, 果然.」115)項王聞之, 烹說者.116)


며칠 후 항우는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해 함양을 도륙하고 투항한 진나라 왕자 영(嬰)을 죽이고 진나라의 궁실을 불태웠는데 석 달 동안을 타고도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재화와 보물 및 부녀자들을 차지하고 동쪽으로 돌아오니, 어떤 사람이 항왕에게 권하기를 “관중(關中)은 사방이 산하로 막혀 있고 땅이 비옥하니 도읍으로 삼아 패왕(覇王)이 될 만한 곳입니다.”라 했다. 그러나 항왕은 진의 궁실이 이미 모두 불에 다 타버렸고, 또 마음속으로 고향이 그리워서 동쪽으로 돌아가려고 하며 말하기를 “부귀한 뒤에 고향에 돌아가지 아니하는 것은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누가 그것을 알아주리오?”라 했다. 그러자 항왕에게 권고했던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초 땅의 사람은 목후(沐猴)가 관(冠)을 쓴 격일뿐이라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라 했다. 항왕이 그 말을 듣고는 그 사람을 팽살(烹殺)했다.


項王使人致命懷王. 懷王曰:「如約.」乃尊懷王爲義帝. 項王欲自王, 先王諸將相. 謂曰:「天下初發難時,117) 仮立諸侯後以伐秦. 然身被堅執銳首事, 暴露於野118)三年, 滅秦定天下者, 皆將相諸君與籍之力也. 義帝雖無功, 故當分其地而王之.」諸將皆曰:「善.」乃分天下, 立諸將爲侯王. 項王、范增疑沛公之有天下, 業已講解,119) 又惡負約, 恐諸侯叛之, 乃陰謀曰:「巴、蜀道險, 秦之遷人皆居蜀.」乃曰:「巴、蜀亦關中地也.」故立沛公爲漢王,120) 王巴、蜀、漢中, 都南鄭.121) 而三分關中, 王秦降將以距塞漢王. 項王乃立章邯爲雍王, 王咸陽以西, 都廢丘.122) 長史欣者, 故爲櫟陽獄掾, 嘗有德於項梁;都尉董翳者, 本勸章邯降楚. 故立司馬欣爲塞王,123) 王咸陽以東至河, 都櫟陽;124)立董翳爲翟王, 王上郡, 都高奴.125) 徙魏王豹爲西魏王, 王河東, 都平陽. 瑕丘126)申陽者,127) 張耳嬖臣也, 先下河南[郡], 迎楚河上, 故立申陽爲河南王, 都雒陽.128) 韓王成因故都, 都陽翟.129) 趙將司馬卬定河內, 數有功, 故立卬爲殷王, 王河內, 都朝歌. 徙趙王歇爲代王. 趙相張耳素賢, 又從入關, 故立耳爲常山王, 王趙地, 都襄國.130) 當陽君黥布爲楚將, 常冠軍, 故立布爲九江王, 都六.131) 鄱君132)吳芮率百越佐諸侯,133) 又從入關, 故立芮爲衡山王, 都邾.134) 義帝柱國共敖135)將兵擊南郡, 功多, 因立敖爲臨江王,136) 都江陵.137) 徙燕王韓廣爲遼東王.138) 燕將臧荼從楚救趙, 因從入關, 故立荼爲燕王, 都薊. 徙齊王田市爲膠東王.139) 齊將田都從共救趙, 因從入關, 故立都爲齊王, 都臨菑.140) 故秦所滅齊王建孫田安, 項羽方渡河救趙, 田安下濟北數城, 引其兵降項羽, 故立安爲濟北王, 都博陽.141) 田榮者, 數負項梁, 又不肯將兵從楚擊秦, 以故不封. 成安君142)陳餘棄將印去, 不從入關, 然素聞其賢, 有功於趙, 聞其在南皮,143) 故因環封三縣.144) 番君將梅鋗145)功多, 故封十萬戶侯. 項王自立爲西楚霸王,146) 王九郡, 都彭城.147)


항왕이 사자를 보내어 회왕에게 치명(致命)하게 하니, 회왕이 말하기를 “약조대로 하라.”라 했다. 이에 회왕을 높여서 의제(義帝)라 했다. 항왕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해 먼저 여러 장상(將相)들을 왕으로 삼으며 말하기를, “처음에 천하에 난이 일어났을 때, 임시로 제후의 후예들을 왕으로 세워 진나라를 토벌했다. 그러나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고 먼저 거사해, 비바람을 맞으며 들에서 지내기를 3년 만에 마침내 진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평정한 것은 모두 장상 여러분과 나의 힘이오. 의제께서는 비록 황제라고는 하나 공은 없으시니 그 땅을 나눠 왕이 되게 함이 마땅할 것이오.”라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옳다.”라 했다.


이어 천하를 나누어 여러 장수들을 후(侯)와 왕으로 세우는데, 항왕과 범증은 패공이 천하를 차지할까 의심했으나 이미 그와 강화했고 또 약조를 어기는 것이 꺼림칙하고 제후들이 그를 배반할 것이 두려워서, 은밀히 모의하기를 “파(巴), 촉(蜀)은 길이 험하고 진나라의 유배자들이 모두 촉에 살고 있다.”라고 하고, 이어 말하기를 “파와 촉 역시 관중의 땅이다.”라고 하고는 패공을 한왕(漢王)으로 세워서 파, 촉, 한중(漢中)의 왕으로 봉하고, 남정(南鄭)에 도읍하게 했다. 그리고는 관중을 삼분해 항복한 진나라 장수들을 왕으로 삼아 한왕을 견제하게 했으니, 항왕은 장한을 옹왕(雍王)으로 삼아 함양 서쪽의 왕으로 봉하고 폐구(廢丘)에 도읍하게 했다.


또 장사 사마흔은 본디 역양(櫟陽)의 옥연이었던 자로 일찍이 항량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있었고, 도위 동예는 본디 장한에게 초 나라에 투항할 것을 권유한 자였으므로, 사마흔을 새왕(塞王)으로 삼아 함양의 동쪽에서 황하에 이르는 지역을 봉지(封地)로 주고 역양을 도읍으로 삼게 했으며, 동예를 적왕(翟王)으로 세워서 상군(上郡)의 왕으로 삼았고 고노(高奴)에 도읍하게 했다. 그리고 위왕(魏王) 표(豹)를 서위왕(西魏王)으로 바꾸고 하동(河東)을 봉지로 주고 평양(平陽)에 도읍하게 했다. 하구(瑕丘)의 신양(申陽)은 장이(張耳)의 총신(寵臣)으로서 먼저 하남(河南)을 함락시키고 황하 강변에서 초군을 맞아들였으므로 신양을 하남왕으로 세우고 낙양(雒陽)에 도읍하게 했다.


한왕(韓王) 성(成)은 옛읍을 그대로 해 양책(陽翟)에 도읍하게 했다. 조나라 장수 사마앙(司馬卬)은 하내(河內)의 평정에 수차례 공을 세웠으므로 그를 은왕(殷王)으로 세워 하내를 봉지로 주고 조가(朝歌)에 도읍하게 했다. 조왕 헐(歇)은 대왕(代王)으로 옮기게 하고, 조나라 재상 장이는 평소 현능하고 또 관중(關中)에 진입할 때 함께 따라왔으므로 장이를 상산왕(常山王)으로 세워서 조(趙) 땅을 봉지로 주고 양국(襄國)에 도읍하게 했다. 당양군 경포는 초 나라 장수로서 전공(戰功)이 항상 군중에서 으뜸이었으므로 경포를 구강왕(九江王)으로 세워서 육(六)에 도읍하게 했다. 파군(鄱君) 오예(吳芮)는 백월(百越)을 이끌고 제후군을 도왔으며 또 관중에 들 때 함께 따랐으므로 오예를 형산왕(衡山王)으로 세우고 주(邾)에 도읍하게 했다.


의제(義帝)의 주국(柱國) 공오(共敖)는 군사를 이끌고 남군(南郡)을 쳐서 공이 많으므로 공오를 임강왕(臨江王)으로 세우고 강릉(江陵)에 도읍하게 했다. 연왕(燕王) 한광(韓廣)을 요동왕(遼東王)으로 옮기게 하고, 연(燕)나라 장수 장도(臧荼)는 초군을 따라서 조나라를 구원했고 관중에 들 때 함께 따랐으므로 장도를 연왕으로 세우고 계(薊)에 도읍하게 했다. 제왕(齊王) 전불(田市)은 교동왕(膠東王)으로 옮기게 하고, 제나라 장수 전도(田都)는 제후군을 따라서 함께 조나라를 구원하고 관중에 들 때 따랐으므로 전도를 제왕으로 세우고 임치(臨菑)에 도읍하게 했다.


이전에 진나라에 멸망당한 제왕(齊王) 전건(田建)의 손자 전안(田安)은 항우가 막 황하를 건너서 조나라를 구원할 때에 제북(濟北)의 여러 성(城)을 함락시킨 뒤 그 병사를 이끌고 항우에게 투항했기에 전안을 제북왕(濟北王)으로 세우고 박양(博陽)에 도읍하게 했다. 전영(田榮)은 여러 번 항량을 배반하고 또한 군사를 이끌고 초군을 따라서 진나라를 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봉지를 주지 않았다.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는 장수의 인(印)을 버리고 관중에 진입할 때 따르지 않았지만 평소에 현능하다는 명성이 있었으며 조나라에 대해서도 공이 있었으므로, 남피(南皮)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부근의 세 현(縣)을 봉지로 주었다. 그리고 파군(番君)의 장수 매현(梅鋗)은 공이 많으므로 10만 호의 후(侯)에 봉했다. 항우는 스스로 왕위에 올라서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고 하고 구군(九郡)을 봉지로 해 팽성(彭城)에 도읍을 정했다.


서초패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는 항우


漢之元年四月, 諸侯罷戱下, 各就國.148) 項王出之國, 使人徙義帝, 曰:「古之帝者地方千里, 必居上游.」149)乃使使徙義帝長沙郴縣.150) 趣義帝行, 其群臣稍稍背叛之, 乃陰令衡山、臨江王擊殺之江中.151) 韓王成無軍功, 項王不使之國, 與俱至彭城, 廢以爲侯, 已又殺之. 臧荼之國, 因逐韓廣之遼東, 廣弗聽, 荼擊殺廣無終, 幷王其地.


한(漢) 원년 4월, 제후들이 휘하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각자 자신의 봉국으로 갔다. 항왕도 함곡관을 나와서 자신의 봉국으로 와서는 사자를 보내어 의제를 천도하게 하며 말하기를 “옛 제왕은 영토가 사방천리로, 반드시 강의 상류에 거하셨습니다.”라고 하고는 이에 사자로 하여금 의제를 장사(長沙)의 침현(郴縣)으로 옮기도록 하고 의제의 행차를 재촉하니 의제의 여러 신하들이 점차 의제를 배반했다. 이에 몰래 형산왕, 임강왕으로 하여금 장강(長江) 가운데에서 그를 죽이도록 했다.


한왕(韓王) 성(成)은 전공이 없었으니, 항왕은 그가 봉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 뒤 함께 팽성으로 가서 왕을 폐하여 후(侯)로 삼았다가 얼마 후에 그를 죽였다. 장도는 자신의 봉국으로 가서 한광을 요동으로 쫓아내려고 했으나 한광이 듣지 않자 무종(無終)에서 한광을 격살하고는 그 땅을 빼앗아서 자신의 봉지로 삼았다.


田榮聞項羽徙齊王市膠東, 而立齊將田都爲齊王, 乃大怒, 不肯遣齊王之膠東, 因以齊反, 迎擊田都. 田都走楚. 齊王市畏項王, 乃亡之膠東就國. 田榮怒, 追擊殺之卽墨. 榮因自立爲齊王, 而西殺擊濟北王田安, 幷王三齊.152) 榮與彭越將軍印, 令反梁地. 陳餘陰使張同、夏說說齊王田榮曰:「項羽爲天下宰, 不平. 今盡王故王於醜地, 而王其群臣諸將善地, 逐其故主趙王, 乃北居代, 餘以爲不可. 聞大王起兵, 且不聽不義, 願大王資餘兵, 請以擊常山, 以復趙王, 請以國爲扞蔽.」齊王許之, 因遣兵之趙. 陳餘悉發三縣兵, 與齊幷力擊常山, 大破之. 張耳走歸漢. 陳餘迎故趙王歇於代, 反之趙. 趙王因立陳餘爲代王.


전영은 항우가 제왕(齊王) 전시를 교동으로 옮기게 하고 제나라 장수 전도를 제왕으로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노했다. 그리하여 그는 제왕을 교동으로 보내지 않고 제나라 영토를 근거지로 해 반란을 일으키고 전도를 맞아 싸웠다. 전도는 초 나라로 도주했는데, 제왕 전불은 항왕이 두려워서 교동으로 도망쳐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전영이 노하여 그를 추격해 즉묵(卽墨)에서 죽였다. 그런 뒤 전영은 스스로 제왕에 즉위해 서쪽으로 제북왕 전안을 공격해 그를 죽이고 삼제(三齊)를 모두 자신의 영토로 삼았다. 전영은 팽월(彭越)에게 장수의 인(印)을 주고 양(梁)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진여는 몰래 장동(張同), 하열(夏說)을 보내 제왕 전영에게 권하기를

“항우가 천하의 주재자(主宰者)가 되었으니 이는 불공평한 일입니다. 지금 본래 왕이었던 사람을 나쁜 땅의 왕으로 삼고, 자기의 여러 신하들과 장수들을 좋은 곳의 왕으로 삼았으며, 원래의 군주 조왕(趙王)을 쫓아내어 북쪽의 대(代)에 거하게 했으니, 저는 그럴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듣건대 대왕께서 군대를 일으키시고 또한 불의를 따르지 않는다고 하시니, 원컨대 대왕께서 저에게 군사를 지원해주시어 상산(常山)을 공격하게 해 조왕의 원래 영지를 회복케 하시고 저희나라를 방어막으로 삼으시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자, 제왕은 이를 허락하고 과연 군사를 조나라로 파견했다. 진여는 삼현(三縣)의 군사를 모두 징발해 제나라와 더불어 힘을 합쳐서 상산을 공격해 크게 무찌르니 장이는 도망쳐서 한(漢)나라로 돌아갔다. 진여는 원래의 조왕 헐을 대(代)에서 맞이해 조나라로 돌아가게 하니, 이에 조왕은 진여를 대왕(代王)으로 삼았다.


是時, 漢還定三秦. 項羽聞漢王皆已幷關中, 且東, 齊、趙叛之:大怒. 乃以故吳令鄭昌爲韓王, 以距漢. 令蕭公角等153)擊彭越. 彭越敗蕭公角等. 漢使張良徇韓, 乃遺項王書曰:「漢王失職, 欲得關中, 如約卽止, 不敢東.」又以齊、梁反書遺項王曰:「齊欲與趙幷滅楚.」楚以此故無西意, 而北擊齊. 徵兵九江王布. 布稱疾不往, 使將將數千人行. 項王由此怨布也. 漢之二年冬, 項羽遂北至城陽, 田榮亦將兵會戰. 田榮不勝, 走至平原, 平原民殺之. 遂北燒夷齊城郭室屋, 皆阬田榮降卒, 係虜其老弱婦女. 徇齊至北海, 多所殘滅. 齊人相聚而叛之. 於是田榮弟田橫收齊亡卒得數萬人, 反城陽. 項王因留, 連戰未能下.


이때에 한왕(漢王)은 회군해 삼진(三秦)을 평정했다. 항우는 한왕이 이미 관중을 모두 겸병하고 동쪽으로 진격하려고 하며 제나라와 조나라가 그를 배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노했다. 이에 옛 오령(吳令) 정창(鄭昌)을 한왕(韓王)으로 삼아 한군(漢軍)을 견제하게 하고 소공(蕭公) 각(角) 등으로 하여금 팽월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팽월은 소공 각 등을 패퇴시켰다. 한왕은 장량으로 하여금 한(韓)나라를 시찰하게 하고, 항왕에게 서신을 보내 “한왕(漢王)은 직위를 잃었으니 약조대로 관중을 얻을 수 있다면 즉시 멈추어 감히 동쪽으로 진격하지 않을 것이오.”라 했다.


또 제나라와 조나라의 반란을 알리는 서신을 항왕에게 보내어 “제나라가 조나라와 더불어 초 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합니다.”라 했다. 이 때문에 초 나라는 서쪽을 치려던 생각을 없애고 북으로 제나라를 공격했다. 항왕은 구강왕 경포에게서 군사를 징발했는데, 경포는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고 장수로 하여금 수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행군하게 했다. 그 후 이 일로 인해서 항왕은 경포를 원망하게 되었다.


한(漢) 2년 겨울, 항우가 마침내 북으로 성양(城陽)에 이르자, 전영 역시 군대를 거느리고 회전(會戰)했다. 전영이 이기지 못하고 평원(平原)으로 달아나자 평원의 백성들이 그를 죽여 버렸다. 항우는 마침내 북진해 제나라 성곽과 집들을 불살라 없애버리고, 항복한 전영의 군졸들을 생매장했으며, 노약자와 부녀들을 묶어서 포로로 삼고는 제나라의 북해(北海)까지 토벌하니 많은 사람이 죽고 많은 곳이 파괴되었다. 이에 제나라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자, 전영의 동생 전횡(田橫)이 제나라의 살아남은 병졸 수만 명을 거두어서 성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항왕이 남아서 여러 차례 싸움을 벌였으나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春, 漢王部154)五諸侯兵,155) 凡五十六萬人, 東伐楚. 項王聞之, 卽令諸將擊齊, 而自以精兵三萬人南從魯出胡陵.156) 四月, 漢皆已入彭城, 收其貨寶美人, 日置酒高會. 項王乃西從蕭, 晨擊漢軍157)而東, 至彭城, 日中, 大破漢軍.158) 漢軍皆走, 相隨入谷、泗水,159) 殺漢卒十餘萬人. 漢卒皆南走山,160) 楚又追擊至靈壁東161)睢水上.162) 漢軍卻, 爲楚所擠,163) 多殺, 漢卒十餘萬人皆入睢水, 睢水爲之不流.164) 圍漢王三匝. 於是大風從西北而起, 折木發屋, 揚沙石, 窈冥晝晦,165) 逢迎楚軍. 楚軍大亂, 壞散, 而漢王乃得與數十騎遁去, 欲過沛, 收家室而西;楚亦使人追之沛, 取漢王家:家皆亡, 不與漢王相見. 漢王道逢得孝惠、魯元,166) 乃載行. 楚騎追漢王, 漢王急, 推墮孝惠、魯元車下, 滕公常下收載之. 如是者三. 曰:「雖急不可以驅, 柰何棄之?」於是遂得脫. 求太公、呂后不相遇. 審食其167)從太公、呂后閒行,168) 求漢王, 反遇楚軍. 楚軍遂與歸, 報項王, 項王常置軍中.


봄에 한왕이 다섯 제후들의 56만 병사들을 통솔해 동으로 초나라를 치고자 했다. 항왕이 이 소식을 듣고서 즉시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제나라를 공격하게 하고는 자신은 정예군 3만을 이끌고 남쪽으로 진격해 노현(魯縣)을 지나서 호릉(胡陵)을 나왔다. 4월, 한왕이 이미 팽성에 들어가서 그 재화와 보물 그리고 미녀들을 차지하고 날마다 주연을 베풀었다. 이에 항왕은 서쪽 소현에서부터 새벽에 한군을 공격하고 동쪽으로 진격해 팽성에 이르더니 정오 무렵 한군을 대파시켰다. 한군은 모두 도망치다가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 빠졌으며, 여기서 죽은 한나라 병졸이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한나라 병졸들이 모두 남쪽의 산으로 도망치니 초군은 또 추격해 영벽(靈壁)의 동쪽 수수(睢水)에까지 이르렀다. 한군이 퇴각해 초군에 밀리게 되니 많은 병사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한나라 병졸 10만이 모두 수수에 빠져서 수수가 이로 인해서 흐르지 않을 정도였다. 초군이 한왕을 겹겹이 포위하자, 이때 큰 바람이 서북쪽에서부터 일어나 나무를 부러뜨리고 집을 날려버리며 모래와 돌을 날리니,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워지며 바람이 초군을 향해서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초군이 혼비백산하니 한왕은 이에 수십 기(騎)의 병사와 더불어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는 패현(沛縣)을 거쳐서 가족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가고자 했으며, 초군도 사람을 보내어 패현까지 추격해 한왕의 가족들을 잡도록 했다. 한왕의 가족들은 모두 도망해 한왕과 만날 수가 없었다. 한왕은 도중에 효혜(孝惠)와 노원(魯元)을 만나 이들을 수레에 태우고 길을 재촉했다. 초군의 기병이 한왕을 쫓아오니 한왕은 다급해 효혜와 노원을 수레 아래로 밀쳐 떨어뜨렸으나 등공(滕公)이 매번 내려가서 수레에 태웠으니 이렇게 하기가 세 차례나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비록 상황이 아무리 다급하고 말도 빨리 몰수가 없지만, 그들을 어찌 버리려고 하십니까?”라 했다. 이러다가 마침내 기병들의 추적을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런 후 태공(太公)과 여후(呂后)를 찾았으나 서로 만나지 못했는데, 심이기(審食其)가 태공과 여후를 따라서 샛길로 가며 한왕을 찾다가 도리어 초군을 만나게 되었다. 초군은 마침내 그들을 데리고 돌아와서 항왕에게 보고하니 항왕은 그들을 늘 군영에 두었다.


是時呂后兄周呂侯169)爲漢將兵居下邑,170) 漢王閒往從之, 稍稍收其士卒. 至滎陽, 諸敗軍皆會, 蕭何亦發關中老弱未傅悉詣滎陽,171) 復大振. 楚起於彭城, 常乘勝逐北, 與漢戰滎陽南京、索閒, 漢敗楚,172) 楚以故不能過滎陽而西.


이때에 여후의 오빠 주여후(周呂侯)가 한(漢)을 위해서 군사를 이끌고 하읍(下邑)에 주둔하고 있었으니, 한왕은 샛길을 통해서 그에게 몸을 기탁하고는 조금씩 한나라의 병사들을 모았는데, 형양(滎陽)에 이르자 모든 패잔군들이 다 모여들었다. 소하(蕭何)도 징집 장부에도 없는 관중의 노약자를 모두 징발해 형양에 이르니 한군의 위세는 다시 크게 떨치게 되었다. 초군이 팽성에서 시작해 계속 승세를 몰아 패주하는 한군을 추격해, 형양 남쪽의 경읍(京邑)과 색읍(索邑) 사이에서 한군과 접전했는데, 한군이 초군을 패퇴시키자 초군은 형양을 지나 서쪽으로 진격할 수 없게 되었다.


項王之救彭城, 追漢王至滎陽, 田橫亦得收齊, 立田榮子廣爲齊王. 漢王之敗彭城, 諸侯皆復與楚而背漢. 漢軍滎陽, 築甬道屬之河, 以取敖倉粟.173) 漢之三年, 項王數侵奪漢甬道, 漢王食乏, 恐, 請和, 割滎陽以西爲漢.


팽성을 구원하러 갔던 항왕이 한왕을 추격해 형양에 이르니, 전횡도 이때를 이용해 제나라를 수습하고는 전영의 아들 전광(田廣)을 제왕으로 세웠다. 그런데 한왕이 팽성에서 패하자, 제후들은 모두 다시 초 나라에 귀순하고 한나라를 배반했다. 한군은 형양에 주둔해서 황하로 통하는 용도(甬道)를 수축해 오창(敖倉)의 양식을 조달했다. 한(漢) 3년, 항왕이 여러 차례 한군의 용도를 침범해 식량을 탈취하자 군량이 부족해진 한왕은 두려워서 강화를 요청하고 형양 서쪽을 한(漢)의 영토로 했다.


項王欲聽之. 歷陽侯范增曰:174)「漢易與耳, 今釋弗取, 後必悔之.」項王乃與范增急圍滎陽. 漢王患之, 乃用陳平計閒項王. 項王使者來, 爲太牢具, 擧欲進之. 見使者, 詳驚愕曰:「吾以爲亞父使者, 乃反項王使者.」更持去, 以惡食食175)項王使者. 使者歸報項王, 項王乃疑范增與漢有私, 稍奪之權. 范增大怒, 曰:「天下事大定矣, 君王自爲之. 願賜骸骨歸卒伍.」項王許之. 行未至彭城, 疽發背而死.176)


항왕이 이에 응하려고 하자, 역양후(歷陽侯) 범증이 말하기를 “지금이 한군을 해치우기가 쉬울 때입니다. 그런데 지금 놓아주고 취(取)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라 했다. 항왕은 이에 범증과 함께 급히 형양을 포위하니, 한왕은 이를 우려한 나머지 범증과 항왕을 이간질시키는 진평의 계책을 사용했다. 항왕의 사신이 오자, 태뢰구(太牢具)를 준비해 그에게 내놓으려고 하다가는 항왕의 사신을 보고 거짓으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를 “나는 아부(亞父)의 사신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항왕의 사신이었구나!”라고 하고는 다시 가지고 들어가게 하고 형편없는 음식을 가져와서 항왕의 사신을 대접했다.


사신이 돌아와서 항왕에게 보고하자, 항왕은 이로부터 범증과 한왕이 사통(私通)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해 조금씩 그의 권력을 빼앗기 시작했다. 그러자 범증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천하의 일이 대체로 정해졌으니, 이젠 군왕 스스로 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저의 늙은 몸을 돌려주시어 평민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니 항왕이 이를 허락했다. 그러나 그는 미처 팽성에 이르기도 전에 등에 독창(毒瘡)이 나서 죽었다.


漢將紀信說漢王曰:「事已急矣, 請爲王誑楚爲王, 王可以閒出.」於是漢王夜出女子滎陽東門被甲二千人, 楚兵四面擊之. 紀信乘黃屋車,177) 傅左纛,178) 曰:「城中食盡, 漢王降.」楚軍皆呼萬歲. 漢王亦與數十騎從城西門出, 走成皐.179) 項王見紀信, 問:「漢王安在?」曰:「漢王已出矣.」項王燒殺紀信.


한나라 장수 기신(紀信)이 한왕에게 권하기를 “사태가 이미 위급해졌으니 청컨대 제가 대신 왕의 모습으로 꾸미어 초군을 속이고자 합니다. 그 틈을 타서 왕께서는 빠져나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 했다. 이에 한왕은 밤중에 형양의 동문으로 갑옷을 입은 여자 2천 명을 내보내자 초군이 사방에서 공격해왔다. 기신은 황옥거(黃屋車)를 타고 좌독(左纛)을 붙이고 말하기를 “성 안에 양식이 떨어져서 한왕이 항복코자 하노라.”라고 하니, 초군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한편 한왕은 수십 기(騎)의 병사와 함께 성의 서쪽 문으로 나와서 성고(成皐)로 달아났다. 항왕이 기신을 보고 묻기를 “한왕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자, 기신이 말하기를 “한왕은 이미 떠나셨소.”라고 하니 항왕은 기신을 불에 태워 죽였다.


漢王使御史大夫周苛、樅公、180)魏豹守滎陽. 周苛、樅公謀曰:「反國之王, 難與守城.」乃共殺魏豹. 楚下滎陽城, 生得周苛. 項王謂周苛曰:「爲我將, 我以公爲上將軍, 封三萬戶.」周苛罵曰:「若不趣降漢, 漢今虜若, 若非漢敵也.」項王怒, 烹周苛, 井殺樅公.


한왕이 어사대부(御史大夫) 주가(周苛), 종공(樅公), 위표(魏豹)로 하여금 형양을 지키게 했다. 그런데 주가와 종공이 모의하기를 “나라를 배반한 왕과는 함께 성을 지킬 수 없다.”라고 하고 함께 위표를 죽여 버렸다. 초군은 형양성을 함락시킨 뒤 주가를 생포했다. 항왕이 주가에게 말하기를 “나의 장수가 되어주면 공을 상장군으로 삼고 3만 호의 후(侯)에 봉하리라.”고 하니, 주가가 욕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빨리 한나라에 항복하지 않으면 이제 한군이 그대를 사로잡을 것이다. 그대는 한왕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라고 하자, 항왕이 노하여 주가를 팽살하고 아울러 종공도 죽였다.

 

항우의 기개를 잘 나타낸 그림


漢王之出滎陽, 南走宛、葉, 得九江王布, 行收兵, 復入保成皐. 漢之四年, 項王進兵圍成皐. 漢王逃,181) 獨與滕公出成皐北門,182) 渡河走脩武, 從張耳、韓信軍. 諸將稍稍得出成皐, 從漢王. 楚遂拔成皐, 欲西. 漢使兵距之鞏, 令其不得西.


한왕은 형양을 벗어난 뒤 남으로 완(宛)과 섭(葉)에 가서 구강왕 경포를 만나 함께 행군하면서 병사를 모집해 성고로 다시 들어가서 수비했다. 한(漢) 4년, 항왕이 진군해 성고를 포위하자 한왕은 도망해 겨우 등공과 함께 성고의 북문을 나서 황하를 건너 수무(修武)로 달아나 장이(張耳)와 한신(韓信)의 군대에 몸을 기탁했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도 조금씩 성고를 빠져나와서 한왕을 따르니, 초군은 마침내 성고를 함락시키고 서쪽으로 진군하려고 했다. 한군은 군사를 보내어 공(鞏)에서 초군에 항거해 서쪽으로 오지 못하게 했다.


是時, 彭越渡河擊楚東阿, 殺楚將軍薛公. 項王乃自東擊彭越. 漢王得淮陰侯兵, 欲渡河南. 鄭忠說漢王, 乃止壁河內. 使劉賈將兵佐彭越, 燒楚積聚.183) 項王東擊破之, 走彭越. 漢王則引兵渡河, 復取成皐, 軍廣武, 就敖倉食. 項王已定東海來, 西, 與漢俱臨廣武而軍,184) 相守數月.


이때에 팽월이 황하를 건너서 동아(東阿)에서 초군을 공격해 초 나라 장군 설공(薛公)을 죽였다. 항왕이 이에 직접 동쪽으로 진격해 팽월을 공격하고, 한왕은 회음후(淮陰侯)의 군대를 얻어 황하를 건너서 남쪽으로 진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충(鄭忠)이 한왕에게 권유하자 한왕은 진격을 멈추어 하내(河內)에 방벽을 쌓고, 유고(劉賈)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팽월을 도와서 초군의 군량을 불태우도록 했다. 그러자 항왕이 동쪽으로 공격해 그들을 무찌르고 팽월을 패주시켰다. 한왕은 군대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서 다시 성고를 탈취하고, 광무(廣武)에 주둔해 오창(敖倉)의 양식을 먹었다. 항왕이 동해(東海)를 평정하고 난 뒤, 서쪽으로 돌아와서 한군과 더불어 광무에 진을 치고는 서로 수개월간을 대치했다.


當此時, 彭越數反梁地, 絶楚糧食, 項王患之. 爲高俎, 置太公其上,185) 告漢王曰:「今不急下, 吾烹太公.」漢王曰:「吾與項羽俱北面受命懷王, 曰『約爲兄弟』, 吾翁卽若翁, 必欲烹而翁, 則幸分我一桮羹.」項王怒, 欲殺之. 項伯曰:「天下事未可知, 且爲天下者不顧家, 雖殺之無益, 祇益禍耳.」項王從之.


이때 팽월이 여러 차례 양(梁) 땅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초군의 군량을 끊어버리니, 항왕이 이를 근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높은 도마를 준비해 태공(太公)을 그 위에 올려놓고 한왕에게 통고하기를 “지금 빨리 투항하지 않으면 내 태공을 삶아 죽이겠다.”라 했다. 그러자 한왕이 전하기를


“나와 항우는 모두 북면(北面)해 회왕의 명을 받고 “형제가 되기로 약속한다.”라고 했으니, 나의 아버지가 곧 그대의 아버지이거늘, 그대의 아비를 반드시 삶고야 말겠다면 내게도 국 한 그릇을 나누어주기 바란다.”

라 했다. 그러자 항왕이 노하여 태공을 죽이려고 하니 항백이 말하기를 “천하의 일이란 아직 알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천하를 도모하는 자는 자신의 집을 돌보지 않는 법이니, 그를 죽인다고 한들 유익함이 없고 그저 화를 더하게 될 뿐입니다.”라고 하자 항왕이 태공을 놓아주었다.


楚漢久相持未決, 丁壯苦軍旅, 老弱罷轉漕. 項王謂漢王曰:「天下匈匈數歲者, 徒以吾兩人耳, 願與漢王挑戰186)決雌雄, 毋徒苦天下之民父子爲也.」漢王笑謝曰:「吾寧鬥智, 不能鬥力.」項王令壯士出挑戰. 漢有善騎射者樓煩,187) 楚挑戰三合, 樓煩輒射殺之. 項王大怒, 乃自被甲持戟挑戰. 樓煩欲射之, 項王瞋目叱之, 樓煩目不敢視, 手不敢發, 遂走還入壁, 不敢復出. 漢王使人閒問之, 乃項王也. 漢王大驚. 於是項王乃卽漢王相與臨廣武閒而語. 漢王數之, 項王怒, 欲一戰. 漢王不聽, 項王伏弩射中漢王. 漢王傷, 走入成皐.


초군과 한군이 오랫동안 서로 대치하며 결판을 내지 못해, 장정들은 군역(軍役)에 시달리고 노약자들은 전조(轉漕)에 지치게 되었다. 항왕이 한왕에게 말하기를 “천하가 여러 해 동안 혼란스러웠던 것은 오로지 우리 두 사람 때문이다. 원컨대 한왕과 겨루어 자웅을 가리고, 애꿎은 천하의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지 말기로 하자.”라 했다. 그러자 한왕이 웃으며 거절하기를 “나는 차라리 지혜를 다툴지언정 힘을 다툴 수는 없다.”라 했다. 항왕이 장사(壯士)로 하여금 나가서 싸움을 걸도록 했다. 한군에 말을 타고 활을 잘 쏘는 누번(樓煩)이 있었는데, 초군이 싸움을 세 번 걸어오자 누번이 갑자기 활을 쏘아서 그를 죽이니 항왕이 크게 노하여 직접 갑옷을 입고 창을 집어 들고는 싸움을 걸었다.


누번이 그에게 활을 쏘려고 하자 항왕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누번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손 또한 화살을 쏘지 못하고는 마침내 진지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 감히 다시 나오지 못했다. 한왕이 사람을 보내 몰래 알아보니 그가 바로 항왕임을 알고는 크게 놀랐다. 이에 항왕이 한왕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 서로 광무산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었다. 한왕이 그의 죄목을 나열하자 항왕은 노하여 일전을 벌이고자 했으나 한왕이 응하지 않자 항왕은 숨겨두었던 쇠뇌를 쏘아서 한왕을 맞히니 한왕은 부상을 입고 성고로 도망해 들어갔다.


項王聞淮陰侯已擧河北, 破齊、趙, 且欲擊楚, 乃使龍且188)往擊之. 淮陰侯與戰, 騎將灌嬰擊之, 大破楚軍, 殺龍且. 韓信因自立爲齊王. 項王聞龍且軍破, 則恐, 使盱台人武濊涉往說淮陰侯. 淮陰侯弗聽. 是時, 彭越復反, 下梁地, 絶楚糧. 項王乃謂海春侯大司馬曹咎等曰:「謹守成皐, 則漢欲挑戰, 愼勿與戰, 毋令得東而已. 我十五日必誅彭越, 定梁地, 復從將軍.」乃東, 行擊陳留、189)外黃.


항왕은 회음후가 하북을 함락시킨 후 제나라와 조나라를 무찌르고, 또 초 나라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용저(龍且)로 하여금 그를 공격하게 했다. 회음후가 용저와 접전하고 있는데, 한군의 기장(騎將) 관영(灌嬰)이 공격해 초군을 대파시키고 용저를 죽였다. 한신은 이에 스스로 제왕(齊王)이 되었다. 항왕은 용저의 군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 우이(盱台) 사람 무섭(武涉)으로 하여금 회음후에게 권고하게 했으나 회음후는 듣지 않았다.


이때 팽월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양(梁)을 함락시키고 초군의 군량을 끊어버렸다. 항왕은 이에 해춘후 대사마 조구(曹咎) 등에게 “성고를 삼가 지키기만 하시오. 설사 한군이 싸움을 걸어와도 절대로 싸우지 말고, 한군이 동쪽으로 오지 못하게만 하면 되오. 나는 15일이면 반드시 팽월을 주살하고 양(梁) 땅을 평정한 뒤 다시 장군을 따르겠소.”라고 말하고는 즉시 동쪽으로 가, 진류(陳留)와 외황(外黃)을 공격했다.


外黃不下. 數日, 已降, 項王怒, 悉令男子年十五已上詣城東, 欲阬之. 外黃令舍人兒年十三,190) 往說項王曰:「彭越彊劫191)外黃, 外黃恐, 故且降, 待大王. 大王至, 又皆阬之, 百姓豈有歸心? 從此以東, 梁地十餘城皆恐, 莫肯下矣.」項王然其言, 乃赦外黃當阬者. 東至睢陽,192) 聞之皆爭下項王.


그러나 외황은 쉽게 함락되지 않다가 며칠이 지난 뒤에야 항복을 했다. 이에 항왕은 노하여 15세 이상의 남자를 성의 동쪽으로 끌어오도록 하고 그들 모두를 생매장시키려고 했다. 외황 현령의 문객(門客) 중 한 사람에게 13세 된 아들이 있어, 항왕을 뵙고 이르기를, “팽월이 강압적으로 외황을 위협하니 외황 사람들은 두려워 짐짓 우선 항복하고는 대왕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오셔서는 또 모두 생매장시키려고 하시니 백성들이 어찌 기탁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여기로부터 동쪽으로 양(梁) 지역의 10여 성이 모두 두려워서 항복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항왕은 그 말이 그럴듯하다고 여기고는 생매장당할 뻔한 외황 사람들을 사면해주었다. 그러자 동쪽으로 수양(睢陽)에 이르기까지 그 소식을 듣고, 모두 다투어 항왕에게 투항했다.


漢果數挑楚軍戰, 楚軍不出. 使人辱之, 五六日, 大司馬怒, 渡兵汜水.193) 士卒半渡, 漢擊之, 大破楚軍, 盡得楚國貨賂. 大司馬咎、長史翳、塞王欣皆自剄汜水上.194) 大司馬咎者, 故蘄獄掾, 長史欣亦故櫟陽獄吏, 兩人嘗有德於項梁, 是以項王信任之. 當是時, 項王在睢陽, 聞海春侯軍敗, 則引兵還. 漢軍方圍鍾離眛195)於滎陽東, 項王至, 漢軍畏楚, 盡走險阻.


한편, 한군이 과연 여러 차례 싸움을 걸어와도 초군은 나오지 않았다. 한군에서 사람을 시켜서 5-6일 동안 초군을 욕하게 하자, 대사마가 노하여 병사들에게 사수(汜水)를 건너게 했다. 그런데 사졸들이 반쯤 건널 때 한군이 공격해 초군을 대파시키고 초 나라의 진귀한 보물을 모두 차지했다.


대사마 조구와 장사 예(翳), 새왕(塞王) 사마흔이 모두 사수(汜水)에서 목을 찔러 자살했다. 대사마 조구는 원래 기현에서 옥연을 지낸 자였고, 장사 사마흔 또한 본래 역양의 옥리(獄吏)였는데, 두 사람은 일찍이 항량에게 은덕을 베푼 적이 있어 항왕이 신임했다. 이때 항왕은 수양에 있었는데, 해춘후의 군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한군은 종리매(鍾離眛)를 형양의 동쪽에서 포위하고 있었는데, 항왕이 이르자 한군은 초군을 두려워해 모두 험난한 지역으로 달아나버렸다.


是時, 漢兵盛食多, 項王兵罷食絶. 漢遣陸賈說項王, 請太公, 項王弗聽. 漢王復使侯公往說項王, 項王乃與漢約, 中分天下, 割鴻溝以西者爲漢,196) 鴻溝而東者爲楚. 項王許之, 卽歸漢王父母妻子. 軍皆呼萬歲. 漢王乃封侯公爲平國君.197) 匿弗肯復見. 曰:「此天下辯士, 所居傾國, 故號爲平國君.」項王已約, 乃引兵解而東歸.


이때 한군은 식량이 풍부했고 항왕의 군사들은 지치고 군량마저 떨어진 상태였다. 한왕이 육고(陸賈)를 보내 항왕을 달래어 태공을 풀어주도록 요청했으나 항왕은 듣지 않았다. 한왕이 다시 후공(侯公)을 보내어 항왕에게 권유하니, 항왕이 이에 천하를 둘로 나누어 홍구(鴻溝) 서쪽을 한나라의 영토로 하고, 홍구 동쪽을 초 나라의 영토로 하기로 한왕과 약조했다. 그리고서야 항왕은 태공을 풀어줄 것을 허락하고는 즉시 한왕의 부모처자를 돌려보내니, 한나라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외쳤다. 한왕이 이에 후공을 평국군(平國君)에 봉하고 다시는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그는 천하의 능변가로서, 그가 거처하는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므로 평국군이라고 이름한다.”라 했다. 항왕은 약조를 마친 뒤 군대를 철수시켜서 동쪽으로 돌아갔다.


漢欲西歸, 張良、陳平說曰:「漢有天下太半,198) 而諸侯皆附之. 楚兵罷食盡, 此天亡楚之時也, 不如因其機而遂取之. 今釋弗擊, 此所謂『養虎自遺患』也.」199)漢王聽之. 漢五年, 漢王乃追項王至陽夏200)南, 止軍, 與淮陰侯韓信、建成侯彭越期會而擊楚軍. 至固陵,201) 而信、越之兵不會. 楚擊漢軍, 大破之. 漢王復入壁, 深塹而自守. 謂張子房曰:「諸侯不從約, 爲之柰何?」對曰:「楚兵且破, 信、越未有分地,202) 其不至固宜. 君王能與共分天下, 今可立致也. 卽不能, 事未可知也. 君王能自陳以東傅海,203) 盡與韓信;睢陽以北至谷城,204) 以與彭越:使各自爲戰,205) 則楚易敗也.」漢王曰:「善.」於是乃發使者告韓信、彭越曰:「幷力擊楚. 楚破, 自陳以東傅海與齊王, 睢陽以北至谷城與彭相國.」使者至, 韓信、彭越皆報曰:「請今進兵.」韓信乃從齊往, 劉賈軍從壽春並行, 屠城父,206) 至垓下.207) 大司馬周殷叛楚, 以舒屠六,208) 擧九江兵,209) 隨劉賈、彭越皆會垓下, 詣項王.


한왕이 서쪽으로 돌아가고자 하자 장량과 진평이 권하기를, “한(漢)이 천하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고 제후들도 모두 귀의했습니다. 그런데 초 나라 군사들은 지치고 군량도 떨어졌으니, 이는 하늘이 초 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때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이 기회를 틈타 탈취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지금 만일 놓아주고 공격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른바 “호랑이를 길러 스스로 화를 남겨두는 것”입니다.”


라 했다. 이에 한왕이 그 말을 따랐다. 그리하여 한(漢) 5년, 한왕이 항왕을 양하(陽夏) 남쪽까지 추격해 진을 치고는 회음후 한신, 건성후 팽월과 회합해 초군을 공격하기로 약조했다. 그런데 한군이 고릉(固陵)에 이르러도 한신과 팽월의 군대가 오지 않았다. 그러자 초군이 한군을 공격해 크게 무찌르니, 한왕은 다시 진지로 들어가서 참호를 깊게 파고 수비만 했다. 한왕이 장자방(張子房, 장량을 가리킴)에게 “제후가 약조를 따르지 않으니 어찌해야 좋겠소?”라고 물으니 장자방이 이렇게 대답했다.


“초군이 장차 망하려고 하는데, 한신과 팽월은 아직 나누어받은 봉지가 없으므로 그들이 오지 않는 것은 정말 당연한 일입니다. 군왕께서 천하를 그들과 함께 나눌 수만 있으시다면 지금이라도 즉시 그들을 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럴 수 없으시다면 사태는 알 수 없게 됩니다. 군왕께서 진현(陳縣) 동쪽에서 해안지역까지를 모두 한신에게 주시고, 수양 이북에서 곡성(穀城)까지를 팽월에게 주셔서 각자 스스로를 위해서 싸우게 한다면 초 나라를 무찌르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이에 한왕이 “좋소.”라 했다. 이에 사신을 보내어 한신과 팽월에게 말하기를 “힘을 합쳐 초군을 공격하시오. 초군이 격파되면 진현 동쪽에서 해안에 이르는 지역을 제왕에게 줄 것이며, 수양 이북에서 곡성까지를 팽상국(彭相國)에게 줄 것이오.”라 했다. 사신이 이르자 한신과 팽월은 모두 대답하기를 “지금 진군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고는, 한신은 즉시 제(齊)에서 진군했고 유고(劉賈)의 군대도 수춘(壽春)에서 함께 진군해 성보(城父)를 전멸시키고 해하(垓下)에 이르렀다. 대사마 주은(周殷)이 초 나라를 배반해 서현(舒縣)의 군사로 육현(六縣)을 도륙하고, 구강(九江)의 병졸을 동원해 유고와 팽월을 따라 모두 해하에 모였다. 그리고는 항왕을 향해 진격했다.


項王軍壁垓下, 兵少食盡, 漢軍及諸侯兵圍之數重. 夜聞漢軍四面皆楚歌,210) 項王乃大驚曰:「漢皆已得楚乎? 是何楚人之多也!」項王則夜起, 飮帳中. 有美人名虞,211) 常幸從;駿馬名騅,212) 常騎之. 於是項王乃悲歌慷慨, 自爲詩曰:「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騅不逝. 騅不逝兮可柰何, 虞兮虞兮柰若何!」歌數闋, 美人和之.213) 項王泣數行下,214) 左右皆泣, 莫能仰視.


항왕의 군대는 해하에 방벽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군사는 적고 군량은 다 떨어진 데다 한군과 제후의 군대에게 여러 겹으로 포위됐다. 밤에 한군이 사방에서 모두 초 나라의 노래를 부르니 항왕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한군이 이미 초 나라 땅을 모두 빼앗았단 말인가? 어찌해 초인(楚人)이 이리도 많은가?”라 했다. 항왕은 한밤중에 일어나서 장중(帳中)에서 술을 마셨다. 항왕에게는 우(虞)라는 이름의 미인이 있었는데, 항상 총애를 받으며 시종(侍從)했다. 또 추(騅)라는 이름의 준마가 있었는데, 그는 항상 이 말을 타고 다녔다. 이에 항왕은 비분강개한 심정으로 비통함을 노래하며 스스로 시를 지어 읊었다.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만하건만

시운(時運)이 불리해 추(騅) 또한 나아가지 않는구나.

추가 나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우(虞)여, 우여, 그대를 어찌해야 좋을까?


항왕이 여러 차례 노래 부르니 우미인도 따라서 불렀다. 항왕의 뺨에 몇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니 좌우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차마 쳐다보지 못했다.



패왕별희를 재연한 조형물


패왕별희


於是項王乃上馬騎,215) 麾下216)壯士騎從者八百餘人, 直夜潰圍南出, 馳走. 平明, 漢軍乃覺之, 令騎將灌嬰以五千騎追之. 項王渡淮, 騎能屬者217)百餘人耳. 項王至陰陵,218) 迷失道, 問一田父, 田父紿曰「左」.219) 左, 乃陷大澤中. 以故漢追及之. 項王乃復引兵而東, 至東城,220) 乃有二十八騎. 漢騎追者數千人. 項王自度不得脫. 謂其騎曰:「吾起兵至今八歲矣, 身七十餘戰, 所當者破, 所擊者服, 未嘗敗北, 遂霸有天下. 然今卒困於此,221) 此天之亡我, 非戰之罪也. 今日固決死, 願爲諸君快戰, 必三勝之, 爲諸君潰圍, 斬將, 刈旗, 令諸君知天亡我, 非戰之罪也.」乃分其騎以爲四隊, 四嚮. 漢軍圍之數重. 項王謂其騎曰:「吾爲公取彼一將.」令四面騎馳下, 期山東爲三處.222) 於是項王大呼223)馳下, 漢軍皆披靡,224) 遂斬漢一將. 是時, 赤泉侯爲騎將, 追項王, 項王瞋目而叱之, 赤泉侯人馬俱驚, 辟易數里225)與其騎會爲三處. 漢軍不知項王所在, 乃分軍爲三, 復圍之. 項王乃馳, 復斬漢一都尉, 殺數十百人, 復聚其騎, 亡其兩騎耳. 乃謂其騎曰:「何如?」騎皆伏曰:「如大王言.」


이때 항왕이 바로 말에 올라타니, 휘하 장사 중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8백여 명이 되었다. 그날 밤 그들은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나가 질주했다. 날이 밝자 한군은 비로소 이 사실을 알고 기장(騎將) 관영으로 하여금 5천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게 했다. 항왕이 회수를 건너니 그를 따라오는 자는 이제 1백여 기(騎)에 불과했다. 항왕이 음릉(陰陵)에 이르러 길을 잃어버리자 한 농부에게 물으니 농부가 속여 말하기를 “왼쪽이오.”라고 해 왼쪽으로 가다가 큰 늪에 빠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군이 바짝 쫓아오게 되었다.


항왕이 이에 다시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동성(東城)에 이르니 겨우 28기만이 남았고, 추격하는 한군의 기병은 수천이었다. 항왕이 스스로 생각하니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이에 그 기병에게 말하기를 “내가 군사를 일으킨 지 지금 8년이 되었다.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벌였는데 내가 맞선 적은 격파시키고 내가 공격한 적은 굴복시켜 일찍이 패배를 몰랐으며, 마침내는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결국 이곳에서 곤궁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지, 결코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한 죄가 아니다. 오늘 정녕 결사의 각오로 통쾌히 싸워서 기필코 세 차례 승리해, 그대들을 위해 포위를 뚫고 적장(敵將)을 참살하고 적군의 깃발을 쓰러뜨려, 그대들로 하여금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 죄가 아님을 알게 하리라.” 하고는 기병을 넷으로 나누어 사방으로 향하게 했다.


한군이 겹겹이 포위하니, 항왕은 그 기병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위해서 저 장수를 베리라.”라고 하고는 기병들에게 사방으로 말을 달려 내려가도록 하고 산의 동쪽 세 군데에서 나누어 만날 것을 약조했다. 그러고 난 뒤 항왕은 크게 소리치며 아래로 말을 달려가니, 한군은 바람에 초목이 쓰러지듯이 모두 전멸당했고, 항왕은 마침내 한나라 장수 한 명의 목을 베었다. 이때 기장(騎將)이었던 적천후(赤泉侯)가 항왕을 추격하자 항왕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적천후는 사람과 말이 모두 놀라서 몇 리 밖으로 달아나버렸다.


이리하여 항왕은 산의 동쪽 세 군데에서 그의 기병들을 만났다. 한군은 항왕의 소재를 알 길이 없자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초군을 다시 포위했다. 이에 항왕이 말을 달려서 한나라 도위(都尉) 한 명을 참살하고 1백여 명을 죽인 뒤 다시 그의 기병들을 모으니 기병 2명이 죽었을 뿐이었다. 이에 항왕이 기병들에게 “어떠냐?”라고 묻자, 기병들이 모두 엎드려서 말하기를 “대왕의 말씀과 같습니다.”라 했다.




항우가 아꼈던 여인 우희


於是項王乃欲東渡烏江.226) 烏江亭長檥船待,227) 謂項王曰:「江東雖小, 地方千里, 衆數十萬人, 亦足王也. 願大王急渡. 今獨臣有船, 漢軍至, 無以渡.」項王笑曰:「天之亡我, 我何渡爲! 且籍與江東子弟八千人渡江而西, 今無一人還, 縱江東父兄憐而王我, 我何面目見之? 縱彼不言, 籍獨不愧於心乎?」乃謂亭長曰:「吾知公長者. 吾騎228)此馬五歲, 所當無敵, 嘗一日行千里, 不忍殺之, 以賜公.」乃令騎皆下馬步行, 持短兵接戰. 獨籍所殺漢軍數百人. 項王身亦被十餘創. 顧見漢騎司馬呂馬童, 曰:「若非吾故人乎?」馬童面之,229) 指王翳曰:230)「此項王也.」項王乃曰:「吾聞漢購我頭千金,231) 邑萬戶, 吾爲若德.」232)乃自刎而死. 王翳取其頭, 餘騎相蹂踐爭項王, 相殺者數十人. 最其後, 郎中騎楊喜, 騎司馬呂馬童, 郎中呂勝、楊武各得其一體. 五人共會其體, 皆是. 故分其地爲五:封呂馬童爲中水侯,233) 封王翳爲杜衍侯,234) 封楊喜爲赤泉侯,235) 封楊武爲吳防侯,236) 封呂勝爲涅陽侯.237)


이때에 항왕은 동쪽으로 오강(烏江)을 건너려고 했다. 그런데 오강의 정장(亭長)이 배를 강언덕에 대고 기다리다가 항왕에게 말하기를 “강동(江東)이 비록 작으나 땅이 사방 천리요, 백성들의 수가 수십만에 이르니, 그곳 또한 족히 왕이 되실 만한 곳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얼른 건너십시오. 지금 신(臣)에게만 배가 있어 한군이 이곳에 온다 해도 강을 건널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 했다.


항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데, 내가 건너서 무얼 하겠나? 또한 내가 강동의 젊은이 8천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었는데, 지금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거늘 설사 강동의 부형(父兄)들이 불쌍히 여겨 나를 왕으로 삼아준다고 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는가? 설사 그들이 아무 말 하지 않는다 해도 내 양심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정장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대가 후덕한 사람임을 알고 있다. 나는 5년 동안 이 말을 탔는데, 이 말에 대적할 것이 없었으며 하루에도 천리를 달렸다. 내 차마 이 말을 죽일 수 없어 그대에게 주겠소.”라고 하고는 기병들로 하여금 모두 말에서 내려 걷도록 했다.


손에 짧은 무기만을 들고 싸움을 벌여 항우 혼자서 죽인 한군이 수백 명이었다. 항왕도 몸에 10여 군데 부상을 입었다. 항왕은 한나라 기사마(騎司馬) 여마동(呂馬童)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는 예전에 내 부하가 아니었더냐?”라고 하자 여마동이 항왕을 바라봤다. 여마동이 왕예에게 항왕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가 바로 항왕입니다.”라 했다. 그러자 항왕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한왕이 나의 머리를 천금과 만호의 읍(邑)으로 사려고 한다 하니, 내 그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리라.”라고 하고는 이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왕예가 항왕의 머리를 가지고, 다른 기병들이 서로 짓밟으며 항우의 몸을 쟁탈하다가 서로 죽인 자가 수십 명이 되었다.


마지막에는 낭중기(郎中騎) 양희와 기사마 여마동, 낭중(郎中) 여승(呂勝)과 양무(楊武)가 각기 항왕의 몸 한 쪽씩을 차지했다. 다섯 사람이 모두 자신이 차지한 항왕의 몸을 맞추어보니 모두가 틀림없었다. 그러므로 그 땅을 다섯으로 나누어 여마동을 중수후(中水侯)에 봉하고, 왕예를 두연후(杜衍侯)로 봉하고, 양희를 적천후(赤泉侯)에 봉하고 양무를 오방후(吳防侯)에 봉하고, 여승을 열양후(涅陽侯)에 봉했다.


항우가 최후를 맞이한 오강


項王已死,238) 楚地皆降漢, 獨魯不下. 漢乃引天下兵欲屠之, 爲其守禮義, 爲主死節, 乃持項王頭視魯, 魯父兄乃降. 始, 楚懷王初封項籍爲魯公, 及其死, 魯最後下, 故以魯公禮葬項王谷城.239) 漢王爲發哀, 泣之而去.


항왕이 죽자 초 나라 모든 지역이 모두 한나라에 투항했는데, 유독 노현(魯縣)만이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한왕은 천하의 병사를 이끌고 노현을 도륙하려고 했다. 그러나 노현 백성들은 예의를 고수하며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키려고 했다. 까닭에 한왕은(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항왕의 머리를 가지고 가서 노현 백성들에게 보였다. 그러자 노현의 부형들이 투항했다. 처음에 초 회왕이 항적을 노공(魯公)으로 봉했고, 지금 그가 죽자 비로소 노현이 함락되었으므로 노공이라는 봉호에 대한 예우로 항왕을 곡성(穀城)에 안장했다. 한왕이 항왕을 위해서 발상(發喪)하고 흐느끼며 떠났다.


항우의 무덤


諸項氏枝屬, 漢王皆不誅. 乃封項伯爲射陽侯.240) 桃侯、241)平皐侯、242)玄武侯243)皆項氏, 賜姓劉.

한왕은 여러 항씨 일족들을 모두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항백(項伯)을 사양후(射陽侯)에 봉했고, 도후(桃侯), 평고후(平皐侯), 현무후(玄武侯)는 모두 항씨였으나 그들에게 유씨(劉氏) 성을 하사했다.


항우의 무덤과 사당이 있는 주변


太史公曰:吾聞之周生曰244)「舜目蓋重瞳子」,245) 又聞項羽亦重瞳子. 羽豈其苗裔邪? 何興之暴也! 夫秦失其政, 陳涉首難, 豪傑蜂起, 相與並爭, 不可勝數. 然羽非有尺寸乘埶, 起隴畝之中, 三年, 遂將五諸侯滅秦,246) 分裂天下, 而封王侯, 政由羽出, 號爲「霸王」, 位雖不終, 近古以來未嘗有也. 及羽背關懷楚,247) 放逐義帝而自立, 怨王侯叛己, 難矣. 自矜功伐, 奮其私智而不師古, 謂霸王之業, 欲以力征經營天下, 五年卒亡其國,248) 身死東城, 尙不覺寤而不自責, 過矣. 乃引「天亡我, 非用兵之罪也」, 豈不謬哉!


태사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주생(周生)에게서 ‘순(舜)의 눈은 아마도 눈동자가 둘이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또 항우도 눈동자가 둘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항우가 어찌 순(舜)의 후예이겠는가? 그러면 항우가 어떻게 갑작스럽게 일어났는가? 진나라가 실정(失政)하자 진섭이 처음 난을 일으키고 호걸들이 봉기해 서로 다퉈 그 수를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그러나 항우는 세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으면서도 진 말(秦末)의 대세를 틈타 민간에서 흥기해 3년 만에 마침내 다섯 제후를 거느리고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는 천하를 분할해 왕, 후를 봉하니 모든 정령(政令)이 항우에게서 나왔으며 자신을 ‘패왕(覇王)’이라고 칭했다. 그 왕위가 비록 끝까지 가지는 않았으나 이는 근고(近古) 이래로 없었던 일이다.


그러다가 항우가 관중을 버리고 초 나라를 그리워하고, 의제를 쫓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어 왕후들이 자신을 배반한 것을 원망하기에 이르자 상황은 어렵게 되었다.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것을 스승삼지 아니하며, 패왕의 공업(功業)이라고 하고는 무력으로 천하를 정복하고 다스리려고 하다가 5년 만에 마침내 나라를 망치고 몸은 동성(東城)에서 죽으면서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책망하지 않았으니 이는 잘못된 것이었다. 그리고는 끝내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지, 결코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한 죄가 아니다’라는 말로 핑계를 삼았으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항우를 나타낸 조형물


각주

1 集解地理志臨淮有下相縣. 索隱縣名, 屬臨淮. 案:應劭云「相, 水名, 出沛國. 沛國有相縣, 其水下流, 又因置縣, 故名下相也」. 正義括地志云:「相故城在泗州宿豫縣西北七十里, 秦縣.」項, 胡講反. 籍, 秦昔反.

2 索隱按:下序傳籍字子羽也.

3 索隱按:崔浩云「伯、仲、叔、季, 兄弟之次, 故叔云叔父, 季云季父」.

4 正義燕, 烏賢反.

5 集解始皇本紀云:「項燕自殺.」索隱此云爲王翦所殺, 與楚漢春秋同, 而始皇本紀云項燕自殺. 不同者, 蓋燕爲王翦所圍逼而自殺, 故不同耳.

6 索隱地理志有項城縣, 屬汝南. 正義括地志云:「今陳州項城縣城卽古項子國.」

7 索隱按:逮訓及. 謂有罪相連及, 爲櫟陽縣所逮錄也. 故漢(史)[世]每制獄皆有逮捕也. 正義櫟音藥. 逮音代.

8 集解蘇林曰:「蘄音機, 縣, 屬沛國.」韋昭云:「扛, 擧也.」音江.

9 集解應劭曰:「項梁曾坐事傳繫櫟陽獄, 從蘄獄掾曹咎取書與司馬欣. 抵, 歸;已, 止也.」韋昭曰:「抵, 至也. 謂梁嘗被櫟陽縣逮捕, 梁乃請蘄獄掾曹咎書至櫟陽獄掾司馬欣, 事故得止息也.」索隱按:服虔云「抵, 歸也」. 韋昭云「抵, 至也.」劉伯莊云「抵, 相憑託也」. 故應劭云「項梁曾坐事繫櫟陽獄, 從蘄獄掾曹咎取書與司馬欣. 抵, 歸;已, 息也」.

10 索隱韋昭云:「浙江在今錢塘.」浙音「折獄」之「折」. 晉灼音逝, 非也. 蓋其流曲折, 莊子所謂「淛河」, 卽其水也. 淛折聲相近也.

11 集解韋昭曰:「扛, 擧也.」索隱說文云:「橫關對擧也.」

12 索隱徐氏以爲在沛郡, 卽蘄縣大澤中.

13 集解徐廣曰:「爾時未言太守.」正義守音狩. 漢書云景帝中二年七月, 更郡守爲太守.

14 集解楚漢春秋曰:「會稽仮守殷通.」正義按:言「仮」者, 兼攝之也.

15 索隱按:謂先擧兵能制得人, 後則爲人所制. 故荀卿子曰:「制人之與爲人制也, 其相去遠矣」.

16 正義張晏云:「項羽殺宋義時, 桓楚爲羽使懷王.」

17 索隱此不定數也. 自百已下或至八十九十, 故云數十百.

18 索隱說文云:「讋, 失氣也.」音之涉反.

19 集解李奇曰:「徇, 略也.」如淳曰:「徇音『撫徇』之『徇』. 徇其人民.」

20 正義揚州.

21 正義胡嫁反. 以兵威服之曰下.

22 正義矯, 紀兆反. 召平從廣陵渡京口江至吳, 詐陳王命拜梁.

23 集解徐廣曰:「二世之二年正月也.」駰案:應劭曰「上柱國, 上卿官, 若今相國也」.

24 集解晉灼曰:「東陽縣本屬臨淮郡, 漢明帝分屬下邳, 後復分屬廣陵.」索隱下音如字. 按:以兵威伏之曰下, 胡嫁反. 彼自歸伏曰下, 如字讀. 他皆放此. 東陽, 縣名, 屬廣陵也. 正義括地志:「東陽故城在楚州盱眙縣東七十里, 秦東陽縣城也, 在淮水南.」

25 集解晉灼曰:「漢儀注云令吏曰令史, 丞吏曰丞史.」正義楚漢春秋云東陽獄史陳嬰.

26 集解應劭曰:「蒼頭特起, 言與衆異也. 蒼頭, 謂士卒皁巾, 若赤眉、靑領, 以相別也.」如淳曰:「魏君兵卒之號也. 戰國策魏有蒼頭二十萬.」索隱晉灼曰:「殊異其軍爲蒼頭, 謂著靑帽.」如淳曰:「特起猶言新起也.」按:爲蒼頭軍特起, 欲立陳嬰爲王, 嬰母不許嬰稱王, 言天下方亂, 未知瞻烏所止.

27 集解張晏曰:「陳嬰母, 潘旌人, 墓在潘旌.」索隱按:潘旌是邑聚之名, 後爲縣, 屬臨淮.

28 集解服虔曰:「英布起於蒲地, 因以爲號.」如淳曰:「言當陽君、蒲將軍皆屬項羽, 此自更有蒲將軍.」索隱按:布姓英, 咎繇之後, 後以罪被黥, 故改姓黥以應相者之言. 韋昭云「蒲, 姓也」, 是英布與蒲將軍二人共以兵屬項梁也. 故服虔以爲「英布起蒲」, 非也. 按:黥布初起於江湖之閒.

29 正義被悲反. 下邳, 泗水縣也. 應劭云:「邳在薛, 徙此, 故曰下邳.」按:有上邳, 故曰下邳.

30 集解陳涉世家曰:「秦嘉, 廣陵人.」

31 集解文穎曰;「景駒楚族, 景氏, 駒名.」

32 正義括地志云:「徐州彭城縣, 古彭祖國也.」言秦嘉軍於此城之東.

33 集解鄧展曰:「今胡陸, 屬山陽. 漢章帝改曰胡陵.」

34 集解徐廣曰:「縣名, 在沛.」

35 正義括地志云:「故薛城古薛侯國也, 在徐州滕縣界, 黃帝之所封. 左傳曰定公元年薛宰云『薛之祖奚仲居薛, 爲夏車正』, 後爲孟嘗君田文封邑也.」

36 正義許州襄城縣.

37 索隱晉灼音「勦絶」之「勦」. 地理志居鄛縣在廬江郡, 音巢, 是故巢國, 夏桀所奔. 荀悅漢紀云:「范增, 阜陵人也.」

38 正義顧著作云:「固宜當應敗也.」當音如字.

39 集解徐廣曰:「楚人也, 善言陰陽.」駰案:文穎曰「南方老人也」. 索隱徐廣云:「楚人善言陰陽者, 見天文志也.」正義虞喜志林云:「南公者, 道士, 識廢興之數, 知亡秦者必於楚.」漢書藝文志云南公十三篇, 六國時人, 在陰陽家流.

40 集解瓚曰;「楚人怨秦, 雖三戶猶足以亡秦也.」索隱臣瓚與蘇林解同. 韋昭以爲三戶, 楚三大姓昭、屈、景也. 二說皆非也. 按:左氏「以畀楚師于三戶」, 杜預注云「今丹水縣北三戶亭」, 則是地名不疑. 正義按:服虔云「三戶, 漳水津也」. 孟康云「津峽名也, 在鄴西三十里」. 括地志云「濁漳水又東經葛公亭北, 經三戶峽, 爲三戶津, 在相州滏陽縣界」. 然則南公辨陰陽, 識廢興之數, 知秦亡必於三戶, 故出此言. 後項羽果度三戶津破章邯軍, 降章邯, 秦遂亡. 是南公之善讖.

41 集解如淳曰:「蜂午猶言蜂起也. 衆蜂飛起, 交橫若午, 言其多也.」索隱凡物交橫爲午, 言蜂之起交橫屯聚也. 故劉向傳注云「蜂午, 雜沓也」. 又鄭玄曰「一縱一橫爲午」.

42 正義爲, 于僞反.

43 集解徐廣曰:「此時二世之二年六月.」

44 集解應劭曰:「以祖謚爲號者, 順民望.」

45 集解鄭氏曰:「音煦怡.」正義盱, 況于反. 眙, 以之反. 盱眙, 今楚州, 臨淮水, 懷王都之.

46 正義亢音剛, 又苦浪反. 父音甫. 括地志云:「亢父故城在兗州任城縣南五十一里.」

47 正義子余反.

48 正義括地志云:「東阿故城在濟州東阿縣西南二十五里, 漢東阿縣城, 秦時齊之阿也.」

49 正義下「使」色吏反. 趣音促.

50 集解如淳曰:「相與交善爲與國, 黨與也.」索隱按:高誘注戰國策云「與國, 同禍福之國也.」

51 集解張晏曰:「若市買相貿易以利也. 梁救榮難, 猶不用命. 梁念殺仮等, 榮未必多出兵, 不如依春秋寄公待以禮也, 又可以貿易他利, 以除己害, 遂背德可輔仮以伐齊, 故曰市貿易也.」晉灼曰:「仮, 故齊王建之弟, 欲令楚殺之, 以爲己利, 而楚保全不殺, 以買其計, 故曰市也.」索隱按:張晏云「市, 貿易也」韋昭云「市利於齊也」, 故劉氏亦云「市猶要也」. 留田仮而不殺, 欲以要脅田榮也.

52 正義括地志云:「濮州雷澤縣, 本漢城陽, 在州東九十一里. 地理志云城陽屬濟陰郡, 古郕伯國, 姬姓之國. 史記周武王封季弟載于郕, 其後遷於城之陽, 故曰城陽.」

53 正義括地志云:「濮陽縣在濮州西八十六里濮縣也, 古吳之國.」按:攻城陽, 屠之, 西破秦軍濮陽縣也. 東卽此縣東.

54 正義定陶, 曹州城也. 從濮陽南攻定陶.

55 正義雍丘, 今汴州縣也. 地理志云「古杞國, 武王封禹後於杞, 號東樓公, 二十一世簡公, 爲楚所滅」, 卽此城也.

56 集解應劭曰:「由, 李斯子也.」

57 正義括地志云:「故周城卽外黃之地, 在雍丘縣東.」張晏曰:「魏郡有內黃縣, 故加『外』也.」臣瓚曰:「縣有黃溝, 故名.」

58 集解張晏曰:「顯, 名也. 高陵, 縣名.」索隱按:晉灼云「高陵屬琅邪」.

59 集解應劭曰:「碭, 屬梁國.」蘇林曰:「碭音唐.」正義括地志云:「宋州碭山縣, 本漢碭縣也, 在宋州東百五十里.」

60 集解張晏曰:「涉, 姓;閒, 名. 秦將也.」

61 集解應劭曰:「恐敵抄輜重, 故築牆垣如街巷也.」

62 集解應劭曰:「天子曰師尹, 諸侯曰令尹, 時去六國尙近, 故置令尹.」瓚曰:「諸侯之卿, 唯楚稱令尹. 時立楚之後, 故置官司皆如楚舊.」

63 集解蘇林曰:「長如郡守也.」

64 集解徐廣曰:「一作『慶』.」

65 集解文穎曰:「卿子, 時人相褒尊之辭, 猶言公子也. 上將, 故言冠軍.」張晏曰:「若霍去病功冠三軍, 因封爲冠軍侯, 至今爲縣名.」

66 索隱按:傅寬傳云「從攻安陽、扛里」, 則安陽與扛里俱在河南. 顔師古以爲今相州安陽縣. 按:此兵猶未渡河, 不應卽至相州安陽. 今檢後魏書地形志, 云「己氏有安陽城, 隋改己氏爲楚丘」, 今宋州楚丘西北四十里有安陽故城是也. 正義括地志云:「安陽縣, 相州所理縣. 七國時魏寧新中邑, 秦昭王拔魏寧新中, 更名安陽.」張耳傳云章邯軍鉅鹿南, 築甬道屬河, 餉王離. 項羽數絶邯甬道, 王離軍乏食. 項羽悉引兵渡河, 遂破章邯, 圍鉅鹿下. 又云渡河湛船, 持三日糧. 按:從滑州白馬津齎三日糧不至邢州, 明此渡河, 相州漳河也. 宋義遣其子襄相齊, 送之至無鹽, 卽今鄆州之東宿城是也. 若依顔監說, 在相州安陽, 宋義送子不可棄軍渡河, 南向齊, 西南入魯界, 飮酒高會, 非入齊之路. 義雖知送子曲, 由宋州安陽理順, 然向鉅鹿甚遠, 不能數絶章邯甬道及持三日糧至也. 均之二理, 安陽送子至無鹽爲長. 濟河絶甬道, 持三日糧, 寧有遲留? 史家多不委曲說之也.

67 集解如淳曰:「用力多而不可以破蟣蝨, 猶言欲以大力伐秦而不可以救趙也.」索隱張晏云:「搏音博.」韋昭云「虻大在外, 蝨小在內」. 故顔師古言「以手擊牛之背, 可以殺其上虻, 而不能破其內蝨, 喩方欲滅秦, 不可與章邯卽戰也」. 鄒氏搏音附. 今按:言虻之搏牛, 本不擬破其上之蟣蝨, 以言志在大不在小也.

68 正義很, 何懇反.

69 索隱按:地理志東平郡之縣, 在今鄆州之東也.

70 集解韋昭曰:「皆召尊爵, 故云高.」索隱韋昭曰:「皆召高爵者, 故曰高會.」服虔云:「大會是也.」

71 集解徐廣曰:「芋, 一作『半』. 半, 五升器也.」駰案:瓚曰「士卒食蔬菜, 以菽雜半之.」索隱芋, 蹲鴟也. 菽, 豆也. 故臣瓚曰「士卒食蔬菜, 以菽半雜之」, 則芋菽義亦通. 漢書作「半菽」. 徐廣曰:「芋, 一作『半』. 半, 五升也.」王劭曰:「半, 量器名, 容半升也.」

72 正義胡練反. 顔監云:「無見在之糧.」

73 索隱私, 謂使其子相齊, 是徇其私情. 崔浩云:「徇, 營也.」

74 集解如淳曰:「梧音悟. 枝梧猶枝捍也.」瓚曰:「小柱爲枝, 邪柱爲梧, 今屋梧邪柱是也.」正義枝音之移反. 梧音悟.

75 正義未得懷王命也. 仮, 攝也.

76 集解徐廣曰:「二世三年十一月.」

77 正義漳水.

78 集解文穎曰:「秦將也.」

79 集解漢書音義曰:「惴音章瑞反.」

80 集解張晏曰:「軍行以車爲陳, 轅相向爲門, 故曰轅門.」

81 集解張晏曰:「在漳南.」晉灼曰:「地名, 在鉅鹿南.」

82 正義括地志云:「濁漳水一名漳水, 今俗名柳河, 在邢州平鄕縣南. 注水經云漳水一名大漳水, 兼有■水之目也.」

83 集解凡言司馬門者, 宮垣之內, 兵衛所在, 四面皆有司馬, 主武事. 總言之, 外門爲司馬門也. 索隱按:天子門有兵闌, 曰司馬門也.

84 正義走音奏.

85 索隱韋昭云:「趙奢子括也, 代號馬服.」崔浩云:「馬服, 趙官名, 言服武事.」

86 索隱服虔云:「金城縣所治.」蘇林曰:「在上郡.」崔浩云:「蒙恬樹楡爲塞也.」

87 集解孟康曰:「縣屬上郡.」正義括地志云:「寧州羅川縣在州東南七十里, 漢陽周縣.」

88 索隱此諸侯謂關東諸侯也. 何以知然? 文穎曰:「關東爲從, 關西爲橫.」高誘曰:「關東地形從長, 蘇秦相六國, 號爲合從. 關西地形橫長, 張儀相秦, 壞關東從, 使與秦合, 號曰連橫.」

89 索隱公羊傳云:「加之鈇質.」何休云:「要斬之罪.」崔浩云:「質, 斬人椹也.」又郭注三蒼云:「質, 莝椹也.」

90 集解張晏曰:「候, 軍候.」索隱候, 軍候, 官名. 始成, 其名.

91 集解服虔曰:「漳水津也.」張晏曰:「三戶, 地名, 在梁淇西南.」孟康曰:「津峽名也, 在鄴西三十里.」索隱水經注云「漳水東經三戶峽, 爲三戶津」也. 淇當爲「湛」. 案:晉八王故事云「王浚伐鄴, 前至梁湛」, 蓋梁湛在鄴西四十里. 孟康云「在鄴西三十里」. 又闞駰十三州志云「鄴北五十里梁期故縣也」, 字有不同.

92 集解徐廣曰:「在鄴西.」索隱汙音于. 郡國志鄴縣有汙城. 酈元云「汙水出武安山東南, 經汙城北入漳」. 正義括地志云:「汙水源出懷州河內縣北大行山.」又云:「故邘城在河內縣西北二十七里, 古邘國地也. 左傳云『邘、晉、應、韓, 武之穆也』.」

93 集解徐廣曰:「二世三年七月也.」駰案:應劭曰「洹水在湯陰界. 殷墟, 故殷都也」. 瓚曰「洹水在今安陽縣北, 去朝歌殷都一百五十里. 然則此殷虛非朝歌也. 汲冢古文曰『盤庚遷于此』, 汲冢曰『殷虛南去鄴三十里』. 是舊殷虛, 然則朝歌非盤庚所遷者」. 索隱按:釋例云「洹水出汲郡林慮縣, 東北至長樂入淸水」是也. 汲冢古文云「盤庚自奄遷于北蒙, 曰殷虛, 南去鄴州三十里」, 是殷虛南舊地名號北蒙也.

94 正義胡郎反.

95 正義括地志云:「新安故城在洛州澠池縣東一十三里, 漢新安縣城也. 卽阬秦卒處.」

96 集解徐廣曰:「漢元年十一月.」

97 集解文穎曰:「時關在弘農縣衡山嶺, 今移在河南谷城縣.」索隱文穎曰:「在弘農縣衡山嶺, 今移在谷城.」顔師古云:「今桃林縣南有洪滔澗水, 卽古之函關.」按:山形如函, 故稱函關. 正義括地志云:「函谷關在陝州桃林縣西南十二里, 秦函谷關也. 圖記云西去長安四百餘里, 路在谷中, 故以爲名.」

98 集解孟康曰:「在新豐東十七里, 舊大道北下阪口名也.」

99 索隱名纏, 字伯, 後封射陽侯.

100 正義爲, 于僞反.

101 集解徐廣曰:「鯫音士垢反, 魚名.」駰案:服虔曰:「鯫音淺. 鯫, 小人貌也.」瓚曰「楚漢春秋鯫, 姓也」.

102 集解如淳曰:「亞, 次也. 尊敬之次父, 猶管仲爲仲父.」

103 正義項羽從弟.

104 正義擁, 紆拱反. 盾, 食允反.

105 正義直江反.

106 正義瞋, 昌眞反.

107 正義眥, 自賜反.

108 索隱其紀反, 謂長跪.

109 索隱啗, 徒覽反. 凡以食餧人則去聲, 自食則上聲.

110 集解徐廣曰:「一本無『都』字.」

111 索隱漢書作「紀通」. 通, 紀成之子.

112 集解如淳曰:「脫身逃還其軍.」

113 集解徐廣曰:「唉, 烏來反.」索隱音虛其反. 皆歎恨發聲之辭.

114 集解徐廣曰:「東函谷, 南武關, 西散關, 北蕭關.」

115 集解張晏曰:「沐猴, 獼猴也.」索隱言獼猴不任久著冠帶, 以喩楚人性躁暴. 果然, 言果如人言也.

116 集解楚漢春秋、楊子法言云說者是蔡生, 漢書云是韓生.

117 集解服虔曰:「兵初起時.」正義難, 乃憚反.

118 正義暴, 蒲北反.

119 集解蘇林曰:「講, 和也.」索隱服虔云:「解, 折伏也.」說文云:「講, 和解也.」漢書作「媾解」. 蘇林云:「媾, 和也.」是「講」之與「媾」俱訓和也. 業, 事也. 言雖有疑心, 然事已和解也.

120 集解徐廣曰:「以正月立.」

121 正義括地志云:「南梁州所理縣也.」

122 索隱孟康曰:「縣名. 今槐里是也.」韋昭曰:「周時名犬丘, 懿王所都, 秦欲廢之, 故曰廢丘.」正義括地志云:「犬丘故城一名廢丘, 故城在雍州始平縣東南十里. 地理志云漢高二年, 引水灌廢丘, 章邯自殺, 更廢丘曰槐里.」

123 集解韋昭曰:「在長安東, 名桃林塞.」

124 集解蘇林曰:「櫟音藥.」正義括地志云:「櫟陽故城一名萬年城, 在雍州櫟陽東北二十五里. 秦獻公之城櫟陽, 卽此也.」

125 集解文穎曰:「上郡, 秦所置, 項羽以董翳爲翟王, 更名爲翟.」索隱按:今鄜州有高奴城. 正義括地志云:「延州州城卽漢高奴縣.」

126 集解徐廣曰:「一云瑕丘公也.」

127 集解服虔曰:「瑕丘縣屬山陽. 申, 姓;陽, 名.」文穎曰:「姓瑕丘, 字申陽.」瓚曰:「瑕丘公申陽是. 瑕丘, 縣名.」

128 正義括地志云:「洛陽故城在洛州洛陽縣東北二十六里, 周公所築, 卽成周城也. 輿地志云成周之地, 秦莊襄王以爲洛陽縣, 三川守理之. 後漢都洛陽, 改爲『雒』. 漢以火德, 忌水, 故去洛旁『水』而加『隹』. 魏於行次爲土, 土, 水之忌也, 水得土而流, 土得水而柔, 故除『隹』而加『水』.」

129 正義括地志云:「陽翟, 洛州縣也. 左傳云鄭伯突入于櫟. 杜預云櫟, 鄭別都, 今河南陽翟縣是也. 地理志云陽翟縣是, 屬潁川郡, 夏禹之國.」

130 正義括地志云:「邢州城本漢襄國縣, 秦置三十六郡, 於此置信都縣, 屬鉅鹿郡, 項羽改曰襄國, 立張耳爲常山王, 理信都. 地理志云故邢侯國也. 帝王世紀云邢侯爲紂三公, 以忠諫被誅. 史記云周武王封周公旦之子爲邢侯. 左傳云『凡、蔣、邢、茅, 周公之胤也』.」

131 索隱六縣, 古國, 皐陶之後. 正義括地志云:「故六城在壽州安豐縣南百三十二里, 本六國, 偃姓, 皐繇之後所封也. 黥布亦皐繇之後, 居六也.」

132 正義番君. 番音婆.

133 集解韋昭曰:「鄱音蒲河反. 初, 吳芮爲鄱令, 故號曰鄱君. 今鄱陽縣是也.」

134 集解文穎曰:「邾音朱, 縣名, 屬江夏.」正義說文云音誅. 括地志云:「故邾城在黃州黃岡縣東南二十里, 本春秋時邾國. 邾子, 曹姓. 俠居. 至魯隱公徙蘄.」音機.

135 正義共音恭.

136 集解漢書音義曰:「本南郡, 改爲臨江國.」

137 正義江陵, 荊州縣. 史記江陵, 故郢都也.

138 集解徐廣曰:「都無終.」

139 集解徐廣曰:「都卽墨.」正義括地志云:「卽墨故城在萊州膠水縣南六十里. 古齊地, 本漢舊縣.」膠音交. 在膠水之東.

140 索隱按:高紀及田儋傳云「臨濟」, 此言「臨菑」, 誤. 正義菑, 側其反. 括地志云:「靑州臨菑縣也. 卽古臨菑地也. 一名齊城, 古營丘之地, 所封齊之都也. 少昊時有爽鳩氏, 虞、夏時有季崱, 殷時有逢伯陵, 殷末有薄姑氏, 爲諸侯, 國此地. 後太公封, 方五百里.」

141 正義在濟北.

142 正義地理志云成安縣在潁川郡, 屬豫州.

143 正義括地志云:「故南皮城在滄州南皮縣北四里, 本漢皮縣城, 卽陳餘所封也.」

144 集解漢書音義曰:「繞南皮三縣以封之.」

145 集解韋昭曰:「呼玄反.」

146 正義貨殖傳云淮以北, 沛、陳、汝南、南郡爲西楚也. 彭城以東, 東海、吳、廣陵爲東楚也. 衡山、九江、江南、豫章、長沙爲南楚. 孟康云:「舊名江陵爲南楚, 吳爲東楚, 彭城爲西楚.」

147 集解孟康曰:「舊名江陵爲南楚, 吳爲東楚, 彭城爲西楚.」正義彭城, 徐州縣.

148 索隱戱音羲, 水名也. 言「下」者, 如許下、洛下然也. 按:上文云項羽入至戱西鴻門, 沛公還軍霸上, 是羽初停軍於戱水之下. 後雖引兵西屠咸陽, 燒秦宮室, 則亦還戱下. 今言「諸侯罷戱下」, 是各受封邑號令訖, 自戱下各就國. 何須仮借文字, 以爲旌麾之下乎? 顔師古、劉伯莊之說皆非.

149 集解文穎曰:「居水之上流也. 游, 或作『流』.」

150 集解如淳曰:「郴音綝.」

151 集解文穎曰:「郴縣有義帝冢, 歲時常祠不絶.」

152 集解漢書音義曰:「齊與濟北、膠東.」正義三齊記云:「右卽墨, 中臨淄, 左平陸, 謂之三齊.」

153 集解蘇林曰:「官號也. 或曰蕭令也. 時令皆稱公.」

154 集解徐廣曰:「一作『劫』.」索隱按:漢書見作「劫」字.

155 集解徐廣曰:「塞、翟、魏、殷、河南.」駰案:應劭曰「雍、翟、塞、殷、韓也」. 韋昭曰「塞、翟、殷、韓、魏, 雍時已敗也」. 索隱按:徐廣、韋昭皆數翟、塞及殷、韓等;顔師古不數三秦, 謂常山、河南、韓、魏、殷;顧胤意略同, 乃以陳餘兵爲五:未知孰是. 鄙意按:韓王鄭昌拒漢, 漢使韓信擊破之, 則是韓兵不下而已破散也. 韓不在此數. 五諸侯者, 塞、翟、河南、魏、殷也. 正義師古云:「諸家之說皆非. 張良遺羽書曰『漢欲得關中, 如約卽止, 不敢復東』, 謂出關之東也. 今羽聞漢東之時, 漢固已得三秦矣. 五諸侯者, 謂常山、河南、韓、魏、殷也. 此年十月, 常山王張耳降, 河南王申陽降, 韓王鄭昌降, 魏王豹降, 虜殷王卬, 皆漢東之後, 故知謂此爲五諸侯. 時雖未得常山之地, 功臣年表云『張耳棄國, 與大臣歸漢』, 則當亦有士卒爾. 時雍王猶在廢丘被圍, 卽非五諸侯之數也. 尋此紀文, 昭然可曉. 前賢注釋, 並失指趣.」高紀及漢書皆言「劫五諸侯兵」. 凡兵初降, 士卒未有自指麾, 故須劫略而行. 又云「發關中兵, 收三河士」. 發謂差點撥發也, 收謂劫略收斂也. 韋昭云河南、河東、河內. 申陽都雒陽, 韓王成都陽翟, 皆河南也. , 魏豹都平陽, 河東也. 司馬卬都朝歌, 張耳都襄國, 河內也. 此三河士則五諸侯兵也. 更著雍、塞、翟, 則成八諸侯矣. 重明顔公之說是. 故韓信傳云「漢二年出關, 收魏河南, 韓、殷王皆降」是.

156 正義括地志云:「(徐州)魯, 兗州曲阜縣也. 地理志云胡陵在山陽縣屬也.」

157 正義括地志云「徐州蕭縣, 古蕭叔之國, 春秋時爲宋附庸. 帝王世紀云周封子姓之別爲附庸也.」

158 集解張晏曰:「一日之中也. 或曰旦擊之, 至日中大破.」

159 集解瓚曰:「二水皆在沛郡彭城.」

160 正義走音奏.

161 集解徐廣曰:「在彭城.」索隱孟康曰:「故小縣, 在彭城南.」

162 集解徐廣曰:「睢水於彭城入泗水.」正義睢音雖. 括地志云:「靈壁故城在徐州符離縣西北九十里. 睢水首受浚儀縣莨蕩水, 東經取慮, 入泗, 過郡四, 行千二百六十里.」

163 集解服虔曰:「擠音『濟民』之『濟』.」瓚曰:「排擠也.」

164 正義爲, 于僞反.

165 集解徐廣曰:「窈亦作『窅』字.」

166 集解服虔曰:「元, 長也. 食邑於魯.」韋昭曰:「元, 謚也.」

167 集解瓚曰:「其音基.」索隱食音異. 按:酈、審、趙三人同名, 其音合並同, 以六國時衛有司馬食其, 並慕其名.

168 集解如淳曰:「閒出, 閒步, 微行, 皆同義也.」

169 集解徐廣曰:「名澤.」正義蘇林云:「以姓名侯也.」晉灼云:「外戚表周呂令武侯澤也. 呂, 縣名. 封於呂, 以爲國.」顔師古云:「周呂, 封名. 令武, 其謚也. 蘇云『以姓名侯』, 非也.」

170 集解徐廣曰:「在梁.」正義括地志云:「宋州碭山縣本下邑縣也, 在宋州東一百五十里.」按:今下邑在宋州東一百一十里.

171 集解服虔曰:「傅音附.」孟康曰:「古者二十而傅, 三年耕有一年儲, 故二十三年而後役之.」如淳曰:「律年二十三傅之疇官, 各從其父疇內學之. 高不滿六尺二寸以下爲罷癃. 漢儀注『民年二十三爲正, 一歲爲衛士, 一歲爲材官騎士, 習射御騎馳戰陣』. 又曰『年五十六衰老, 乃得免爲庶民, 就田里』. 今老弱未嘗傅者皆發之. 未二十三爲弱, 過五十六爲老. 食貨志曰『月爲更卒, 已復爲正, 一歲屯戍, 一歲力役, 三十倍於古者』.」索隱按:姚氏云「古者更卒不過一月, 踐更五月而休」. 又顔云「五當爲『三』, 言一歲之中三月居更, 三日戍邊, 總九十三日. 古者役人歲不過三日, 此所謂『一歲力役三十倍於古』也」. 斯說得之.

172 集解應劭曰:「京, 縣名, 屬河南, 有索亭.」晉灼曰:「索音柵.」正義括地志云:「京縣城在鄭州滎陽縣東南二十里. 鄭之京邑也. 晉太康地志云鄭太叔段所居邑. 滎陽縣卽大索城. 杜預云成皐東有大索城, 又有小索故城, 在滎陽縣北四里. 京相璠地名云京縣有大索亭、小索亭, 大小氏兄弟居之, 故有小大之號.」按:楚與漢戰滎陽南京、索閒, 卽此三城耳.

173 集解瓚曰:「敖, 地名, 在滎陽西北山, 臨河有大倉.」正義括地志云「敖倉在鄭州滎陽縣西十五里, 縣門之東北臨汴水, 南帶三皇山, 秦時置倉於敖山, 名敖倉云.」

174 正義括地志云:「和州歷陽縣, 本漢舊縣也. 淮南子云『歷陽之都, 一夕而爲湖』. 漢帝時, 歷陽淪爲歷湖.」

175 正義上如字, 下音寺.

176 集解皇覽曰「亞父冢在廬江居巢縣郭東. 居巢廷中有亞父井, 吏民皆祭亞父於居巢廷上. 長吏初視事, 皆祭然後從政. 後更造祠郭東, 至今祠之.」正義疽, 七餘反. 崔浩云:「疽, 附骨癰也.」括地志云:「髑髏山在廬州巢縣東北五里. 昔范增居北山之陽, 後佐項羽.」

177 正義李斐云:「天子車以黃繒爲蓋裹.」

178 集解李斐曰:「纛, 毛羽幢也. 在乘輿車衡左方上注之.」蔡邕曰「以犛牛尾爲之, 如斗, 或在騑頭, 或在衡上也.」

179 正義括地志云:「成皐故縣在洛州氾水縣西南二里.」

180 集解樅音七容反.

181 集解晉灼曰:「獨出意.」索隱音徒凋反. 漢書作「跳」字.

182 集解徐廣曰:「北門名玉門.」

183 正義上積賜反.

184 集解孟康曰:「於滎陽築兩城相對爲廣武, 在敖倉西三皇山上.」正義括地志云:「東廣武, 西廣武在鄭州滎陽縣西二十里. 戴延之西征記云三皇山上有二城, 東曰東廣武, 西曰西廣武, 各在一山頭, 相去百步. 汴水從廣澗中東南流, 今涸無水. 城各有三面, 在敖倉西. 郭緣生述征記云一澗橫絶上過, 名曰廣武. 相對皆立城塹, 遂號東西廣武.」

185 集解如淳曰:「高俎, 几之上.」李奇曰「軍中巢櫓方面, 人謂之俎也.」索隱俎亦机之類, 故夏侯湛新論爲「机」, 机猶俎也. 比太公於牲肉, 故置之俎上. 姚察按:左氏「楚子登巢車以望晉軍」, 杜預謂「車上櫓也」, 故李氏云「軍中巢櫓」, 又引時人亦謂此爲俎也. 正義括地志云:「東廣武城有高壇, 卽項羽坐太公俎上者, 今名項羽堆, 亦呼爲太公亭.」顔師古云:「俎者, 所以薦肉, 示欲烹之, 故置俎上.」

186 集解李奇曰「挑身獨戰, 不復須衆也. 挑音荼了反.」瓚曰「挑戰, 擿嬈敵求戰, 古謂之致師.」

187 集解應劭曰:「樓煩胡也, 今樓煩縣.」

188 集解韋昭曰:「音子閭反.」

189 正義括地志云:「陳留, 汴州縣也. 在州東五十里, 本漢陳留郡及陳留縣之地.」孟康云:「留, 鄭邑也. 後爲陳所幷, 故曰陳留.」臣瓚又按:宋有留, 彭城留是也. 此留屬陳, 故曰陳留.

190 集解蘇林曰:「令之舍人兒也.」瓚曰:「稱兒者, 以其幼弱, 故係其父, 春秋傳曰『仍叔之子』是也.」

191 正義彊, 其兩反.

192 正義括地志云:「宋州外城本漢睢陽縣也. 地理志云睢陽縣, 故宋國也.」

193 集解張晏曰:「汜水在濟陰界.」如淳曰:「汜音祀. 左傳曰『鄙在鄭地汜』.」瓚曰:「高祖攻曹咎成皐, 渡汜水而戰, 今成皐城東汜水是也.」索隱按:今此水見名汜水, 音似. 張晏云在濟陰, 亦未全失. 按:古濟水當此截河而南, 又東流, 溢爲滎澤. 然水南曰陰, 此亦在濟之陰, 非彼濟陰郡耳. 臣瓚之說是. 正義括地志云:「汜水源出洛州汜水縣東南三十二里方山. 山海經云『浮戱之山, 汜水出焉』.」

194 集解鄭氏曰:「剄音經鼎反. 以刀割頸爲剄.」

195 集解漢書義曰:「眛音末.」

196 集解文穎曰:「於滎陽下引河東南爲鴻溝, 以通宋、鄭、陳、蔡、曹、衛, 與濟、汝、淮、泗會於楚, 卽今官渡水也.」正義應劭云:「在滎陽東二十里.」張華云:「大梁城在浚儀縣北, 縣西北渠水東經此城南, 又北屈分爲二渠. 其一渠東南流, 始皇鑿引河水以灌大梁, 謂之鴻溝, 楚漢會此處也. 其一渠東經陽武縣南, 爲官渡水.」按:張華此說是.

197 正義楚漢春秋云:「上欲封之, 乃肯見. 曰『此天下之辨士, 所居傾國, 故號曰平國君』.」按:說歸太公、呂后, 能和平邦國.

198 集解韋昭曰:「凡數三分有二爲太半, 一爲少半.」

199 正義遺, 唯季反.

200 集解如淳曰:「夏音賈.」正義括地志云:「陳州太康縣, 本漢陽夏縣也. 續漢書郡國志云陽夏縣屬陳國.」按:太康縣城夏后太康所築, 隋改陽夏爲太康.

201 集解徐廣曰:「在陽夏.」駰案:晉灼曰「卽固始也」. 正義括地志云:「固陵, 縣名也. 在陳州宛丘縣西北四十二里.」

202 集解李奇曰:「信、越等未有益地之分也.」韋昭曰:「信等雖名爲王, 未有所畫經界.」

203 正義傅音附, 著也. 陳卽陳州, 古陳國都也. 自陳著海, 幷齊舊地, 盡與齊王韓信也.

204 正義括地志云:「谷城故在濟州東阿縣東二十六里.」睢陽, 宋州也. 自宋州以北至濟州谷城際黃河, 盡與相國彭越.

205 正義爲, 于僞反.

206 集解如淳曰:「並行, 並擊之.」正義父音甫. 壽州壽春縣也. 城父, 亳州縣也. 屠謂多刑殺也. 劉賈入圍壽州, 引兵過淮北, 屠殺亳州、城父, 而東北至垓下.

207 集解徐廣曰:「在沛之洨縣. 洨, 下交切.」駰案:應劭曰「垓音該」. 李奇曰「沛洨縣聚邑名也」. 索隱張揖三蒼注云:「垓, 堤名, 在沛郡.」正義按:垓下是高岡絶巖, 今猶高三四丈, 其聚邑及堤在垓之側, 因取名焉. 今在亳州眞源縣東十里, 與老君廟相接. 洨音戶交反.

208 集解如淳曰:「以舒之衆屠破六縣.」正義括地志云:「舒, 今廬江之故舒城是也. 故六城在壽州安豐南百三十二里, 匽姓, 咎繇之後.」按:周殷叛楚, 兼擧九江郡之兵, 隨劉賈而至垓下.

209 正義九江郡壽州也. 楚考烈王二十二年, 自陳徙壽春, 號云郢. 至王負芻爲秦將王翦、蒙武所滅, 於此置九江郡. 應劭云:「自廬江尋陽分爲九江.」

210 集解應劭曰:「楚歌者, 謂雞鳴歌也. 漢已略得其地, 故楚歌者多雞鳴時歌也.」正義顔師古云:「楚人之歌也, 猶言『吳謳』、『越吟』. 若雞鳴爲歌之名, 於理則可, 不得云『雞鳴時』也. 高祖戚夫人楚舞, 自爲楚歌, 豈亦雞鳴時乎?」按:顔說是也.

211 集解徐廣曰:「一云姓虞氏.」正義括地志云:「虞姬墓在濠州定遠縣東六十里. 長老傳云項羽美人冢也.」

212 正義音隹. 顧野王云靑白色也. 釋畜云:「蒼白雜毛, 騅也.」

213 正義和音胡臥反. 楚漢春秋云:「歌曰『漢兵已略地, 四方楚歌聲. 大王意氣盡, 賤妾何聊生』.」

214 正義數, 色庾反. 行, 戶郎反.

215 正義其倚反. 凡單乘曰騎. 後同.

216 正義麾亦作「戱」, 同呼危反.

217 正義屬音燭.

218 集解徐廣曰:「在淮南.」正義括地志云:「陰陵縣故城在濠州定遠縣西北六十里. 地理志云陰陵縣屬九江郡.」

219 集解文穎曰:「紿, 欺也. 欺令左去.」

220 集解漢書音義曰:「縣名, 屬臨淮.」正義括地志云:「東城縣故城在濠州定遠縣東南五十里. 地理志云東城縣屬九江郡.」

221 正義, 卒, 子律反.

222 正義期遇山東, 分爲三處, 漢軍不知項羽處. 括地志云:「九頭山在滁州全椒縣西北九十六里. 江表傳云項羽敗至烏江, 漢兵追羽至此, 一日九戰, 因名.」

223 正義火故反.

224 正義上披彼反. 靡, 言精體低垂.

225 正義言人馬俱驚, 開張易舊處, 乃至數里.

226 集解瓚曰:「在牛渚.」索隱按:晉初屬臨淮. 正義括地志云:「烏江亭卽和州烏江縣是也. 晉初爲縣. 注水經云江水又北, 左得黃律口, 漢書所謂烏江亭長檥船以待項羽, 卽此也.」

227 集解徐廣曰:「檥音儀. 一音俄.」駰案:應劭曰「檥, 正也」. 孟康曰「檥音蟻, 附也, 附船著岸也」. 如淳曰「南方人謂整船向岸曰檥」. 索隱檥字, 服、應、孟、晉各以意解爾. 鄒誕生作「漾船」, 以尙反, 劉氏亦有此音.

228 正義音奇.

229 集解張晏曰:「以故人故, 難視斫之, 故背之.」如淳曰:「面, 不正視也.」

230 集解如淳曰:「指示王翳.」

231 正義漢以一斤金爲一金, 當一萬錢也.

232 集解徐廣曰:「亦可是『功德』之『德』.」正義爲, 于僞反. 言呂馬童與項羽先是故人, 舊有恩德於羽. 一云德行也.

233 索隱按晉書地道記, 其中水縣屬河閒. 正義地理志云中水縣屬涿郡. 應劭云:「在易、滱二水之中, 故曰中水.」

234 索隱按地理志, 縣在南陽. 按:表作「王翥」也. 正義括地志云:「杜衍侯故縣在鄧州南陽縣西八里.」

235 索隱南陽有丹水縣, 疑赤泉後改. 按:漢書表及後漢作「■」, 音火志反.

236 索隱地理志縣名, 屬汝南, 故房子國. 正義吳防, 豫州縣. 括地志云:「吳房縣本漢舊縣. 孟康云吳王闔廬弟夫槪奔楚, 楚封於此, 爲堂谿氏, 本房子國, 以封吳, 故曰吳房.」

237 集解徐廣曰:「五人後卒, 皆謚壯侯.」索隱地理志南陽縣名. 正義涅, 年結反. 括地志云:「涅陽故城在鄧州穰縣東北六十里, 本漢舊縣也. 應劭云在涅水之陽.」

238 集解徐廣曰:「漢五年之十二月也. 項王以始皇十五年己巳歲生, 死時年三十一.」

239 集解皇覽曰:「項羽冢在東郡谷城, 東去縣十五里.」正義括地志云:「項羽墓在濟州東阿縣東二十七里, 谷城西三里. 述征記項羽墓在谷城西北三里半許, 毁壞, 有碣石『項王之墓』.」

240 集解徐廣曰:「項伯名纏, 字伯.」正義射音食夜反. 括地志云:「楚州山陽, 本漢射陽縣. 吳地志云在射水之陽, 故曰射陽.」

241 集解徐廣曰:「名襄, 其子舍爲丞相.」正義括地志云:「故城在滑州胙城縣東四十里. 漢書云高祖十二年封劉襄爲桃侯也.」

242 集解徐廣曰:「名佗.」正義括地志云:「平皐故城在懷州武德縣東二十里, 漢平皐縣.」按:佗音徒何反.

243 集解徐廣曰:「諸侯表中不見.」

244 集解文穎曰:「周時賢者.」正義孔文祥云:「周生, 漢時儒者, 姓周也.」按:太史公云「吾聞之周生」, 則是漢人, 與太史公耳目相接明矣.

245 集解尸子曰:「舜兩眸子, 是謂重瞳.」

246 集解此時山東六國, 而齊、趙、韓、魏、燕五國並起, 從伐秦, 故云五諸侯.

247 正義顔師古云:「背關, 背約不王高祖於關中. 懷楚, 謂思東歸而都彭城.」

248 正義卒音子律反. 五年, 謂高帝元年至五年, 殺項羽東城


 179~275쪽


● 항우의 집안과 초기 경력

● 하량의 봉기와 죽음

● 거록鉅鹿 전투와 항우의 활약

● 항우의 입관과 홍문연 鴻門宴

● 항우의 함양 도살과 분봉

● 제후들의 반발과 초한쟁패의 시작

● 패왕별희

● 항우의 죽음 이후

● 사마천의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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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그림

▷돌에 새긴 항우본기의 도입부 180쪽

▷항우와 우희 (화가상관주의 만소당화전에 실린 그림) 181쪽

▷세기의 술자리 홍문연을 묘사한 그림 183쪽

▷항우의 극적인 최후를 아는 듯. 오늘날 해하유지는 그저 쓸쓸한 시골풍경일뿐 191쪽

▷항우의 고향인 강소성 숙천시에 위치한 항우의 고거 192쪽

▷산동성 정도현에 있는 항량의 무덤 197쪽

▷거록 전투도 202쪽

▷항우가 진의 명장 장한의 항복을 받았던 곳, 하남성 안양을 흐르는 원수의 전경 204쪽

▷유방이 함양성에 입성했다가 다시 물러난 패상의 현재 모습, 패교 207쪽

▷두영웅의 운명을 가른 세기의 술자리가 벌어졌던 홍문의 오늘날 모습 209쪽

▷명나라 사람 심채의 희곡작품인 천금기에 실린 삽화 210쪽

▷진의 멸망도 214쪽

▷서초 패왕 항우의 19개 봉국지도 217쪽

▷초한전쟁도 222쪽

▷초와 한의 경계였던 홍구의 오늘날 전경 230쪽

▷홍구유지에서 나온 당시의 화살촉 231쪽

▷항우와 마지막을 함께한 우희의 무덤 233쪽

▷항우가 최후를 맞이한 해하유지에는 안내표지석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234쪽

▷해하전투도 235쪽

▷항우가 최후를 맞이한 오강은 오늘날 운하역할을 하고 있다 236쪽

▷안휘성 화현의 항우 무덤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 패왕사가 함께 조성되어있다 237족

▷안휘성 화현에 조성되어 있는 항우 무덤, 오강에서 그리 멀지않다 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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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언.명구.용어풀이 240~249쪽

- 홍문연의 자리배치도 243쪽

- 서초패왕의 19개 봉국표 245쪽

- 항우의 죽음과 관련한 책봉표 248쪽

- 유방의 항씨 일족 처리 상황표 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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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사건 250~254쪽

- 항우의 고향옛집에 세워진 오추마 조상 253쪽


■ 초한 쟁패 연표 255~263쪽

■ 관련 인명표 264~270쪽

■ 관련 지명표 271~275쪽

[출처] 사기본기 권7 - 항우본기(項羽本紀)|작성자 어이무사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