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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민가수, 쑹주잉(宋祖英)과 먀오족 역사

코알라 아빠 2016. 10. 8. 14:18


5월 1일 상해 宋祖英2010魅力中國音樂會

상해 宋祖 2010 魅力中國音樂會에서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와 함께

 

현재 중국에서 가장 실력이 있고 가창력이 뛰어난데다 미모까지 겸비해 많은 중국인드로부터

사랑을듬뿍 받고있는 중국국민가수 쑹주잉 (宋祖英. Song Zuying. 1966년 ). 우리나라로 치면

이미자 급에 해당하는 그녀는 1966 호남(湖南)성 고장(古丈)현 암두채(岩头寨) 향의 묘가

(苗家)마을에서 태어났다. 3세대가 오붓한 함께 살고 있는 집안에서 초급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81고장현 극단에 입단한 그녀는 그후 투쟈족 요족(土家族瑶族) 가무단으로 옮겼다가

1년도 안 돼 중앙민족학원 음악무용학과에 입학, 1987년 졸업한다.


88년, 중국음악가협회 주최 '금룡컵(金龙杯)전국가수초청 콩쿠르'에서 묘족풍을 띤 '阿哥莫走(오빠

가지 말아요)'로 금상을 획득한 그녀는 당시 초청콩쿠르 심사평가위원이었던 유명한 음악교육가

눈에 띄어 그의 문하로 들어간다. 이어 매년 CCTV 음력 설날 밤에 방송하는 춘야회(춘완 春晩)에서

그녀는 '작은 등짐광주리(小背篓)'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이후 중국인민해방군 해군 정치부 가무단

으로 전근한 그녀는 현재 국가1급배우로 우리나라 포상연금에 해당하는 국무원 정부특수수당을 받으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 篓 대 채롱(아름다운 색깔로 꾸민 바구니. 상자) '누'


음역이 넓고 무척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녀는 민족성악적 토양에 예술의 뿌리를 튼튼히 박고

칸토 창법을 그 속에 용해시켜 발성에서 소리와 정서가 함께 두드러지게 함으로써 작품을 정확히 포착

하는 것을 중히 여기는 자기만의 독특한 풍격을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녀가 부른 중국 가곡

'작은 등짐광주리', '사천아가씨(辣妹子)', '행복한 나날(好日子)', '나의 중화를 사랑하네(爱我中华)'

'대지 비가(大地飞歌)', '동서 남북병(东西南北兵)', '병사오빠(兵哥哥)' 등은 중국 세계 중국어권 내

에서 널리 불려지고 있다. 그녀의 팬은 도시,농촌,고원 설산,변강 요새 마을, 소수민족지역을 가리지

않고 전 중국의 어디에나 다 있다. 그래서 국민 가수란 호칭이 붙었다고 할 수 있겠다.


2000년 중국 문학예술계연합회는 그녀에게 <덕예(德艺)를 겸비한〉예술가 칭호를 수여했으며, 같은

그는 <세계중국인음악민가 최고노래상〉을 획득한다. 2002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2003

비엔나 골든콘서트홀(Golden Concert Hall)에서 개인콘서트를 개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송주잉(宋祖英)과 장쩌민(江澤民) 모리화(茉莉花)-宋祖英(송쭈잉) 爱我中华 -- 宋祖英 송조영(宋祖英)_모리화(茉莉花) 2006


중국 가요계의 황후로 불리는 여가수 쑹주잉(宋祖英·48)의 춘완(春晩)불참을 놓고 각종 설이 분분하다. 

‘춘완’은 ‘춘절연환만회(春節聯歡晩會)’의 약칭. 춘절(음력 설) 전날 밤 중국 관영 중국중앙방송(CCTV)

에서 4~5시간에 걸쳐 방영하는 초대형 특집쇼다. 중국과 대만, 홍콩, 마카오, 해외의 유명가수와 배우,

코미디언이 총출동해 벌이는 버라이어티쇼로, 13억 중국에서 가장 시청률이 높다.




CCTV는 그간 춘완 출연진들을 중국 연예계, 문화계에서 인지도와 영향력, 당성(黨性) 등을 반영 엄선해

왔다. 쑹주잉은 1990년 춘완에 처음 출연한 이후 지난 24년간 한 차례도 빠짐없이 춘완 무대를 밟았다.

‘춘완=쑹주잉’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1983년 첫 회 이후 32년째를 맞던 지난 2013년 춘완에서 쑹주잉이

출연자 명단에서 빠졌을 때 설들이 분분했다. 당시 쑹주잉 측은 춘절 직후 잡힌 신년 뉴욕 공연 일정상

춘완 출연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내놓았었다.

그런데 쑹주잉 측의 공식입장과 달리, 24년만의 춘완 불참을 장쩌민(江澤民) 전 총서기의 영향력 퇴조와

연관시키는 시각도 많다. 그간 베이징 정가에서는 장쩌민과 쑹주잉 간에 염문설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쑹주잉과, 시진핑 주석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이 지난 수십 년간 가요계 라이벌이었다는 점에서 '新

국모(國母) 펑리위안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돌았었다.


장쩌민과 쑹주잉의 악수 장면 江泽民和宋祖英首次握手 加长版

음악애호가를 자처한 장쩌민 전 국가주석은 쑹주잉을 각별히 아꼈다고 전해진다. 장쩌민 주석의 각별한

애정과 관심은 베이징 정가에서뿐만 아니라 호사가들 사이에서도 일상적인 화젯거리였다. 장쩌민과의

각종 풍문을 반영하듯, 쑹주잉은 1989년 천안문사태로 장쩌민이 집권한 이래 승승장구한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만 할 수 있을지.

 

宋祖英贴身工作人员 披露江泽民丑闻(潜规则)


https://youtu.be/3XjG7g60TqE

【高層內幕】揭秘慘遭江澤民下密令殺害的春晚青年歌手


쑹주잉은 1991년 중국인민해방군 해군 정치부 문공단(해정문공단)에 편입돼, 2013년 장성급인 해방군

해정문공단 단장에까지 올랐다.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대표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위원도

지냈다. 특히 2006년에는 미국 워싱턴 JFK센터에서 단독 공연 때 당시 워싱턴 DC 당국은 공연 날짜인

‘10월 12일’을 ‘쑹주잉의 날’로 지정해 기념할 만큼, 단순 인기가수로는 과분할 정도의 대접을 했었다.

또 2008년 8월 베이징올림픽 때는 성화 봉송 주자 겸 중국을 대표하는 가수로 뽑혀 세계 3대 테너가수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베이징올림픽 폐막식에서 듀엣곡을 열창하기도 했다.


2011년, 쑹주잉의 막강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해프닝이 또 터졌다. 중국 허난성(河南省)에서 열린 ‘애국

가곡대가창’에서 한 공산당 지방간부가 돌연 무대로 뛰어나가 열창하던 쑹주잉과 함께 사진을 찍은 것.

당시 이 간부는 인터넷에서 ‘파이꺼(拍哥·사진찍는 오빠)’라는 ‘(장쩌민의 여자를 건드린) 간 큰 남자’로

통했다. 한데 현장에서 구속된 데 이어 파면됐다.

장쩌민과 연관된 쑹주잉의 루머에는 음악애호가였던 장쩌민의 개인적 취향이 일정 부분 반영돼 있다.

장쩌민은 피아노, 기타를 비롯 중국 전통 현악기인 얼후(二胡)를 직접 연주할 정도의 음악애호가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를

직접 불렀고, 1997년 미국 국빈방문 당시 하와이를 찾았을 때는 직접 하와이 전통기타를 연주하는 등

악기연주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었다.


쑹주잉이 늦둥이 아들 출산했을 때 “장쩌민의 씨앗 아니냐” 수군거림 베이징 정가에 파다

장쩌민의 공식 자서전을 쓴 로버트 로렌스 쿤은 “2004년 장쩌민의 전화 한 통으로 중국중앙방송(CCTV)

음악전문채널인 CCTV15가 편성됐다”는 사실을 증언하기도 했다. 특히 2007년 베이징 중남해(中南海)

신화문 맞은편에 세계 최대 규모의 오페라극장 ‘국가대극원’을 지었을 때는 “장쩌민이 쑹주잉에게 주는

선물”이란 말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2005년 쑹주잉이 늦둥이 아들을 출산했을 때는 “장쩌민의 씨앗이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베이징 정가에서 파다했다.

결혼 후 13년 동안 아이가 없었던 쑹주잉 부부. 그녀의 남편은 후난성 창사 광전국 부국장 겸 유명한

제작자인 뤄하오(羅浩)다. 쑹주잉은 무명이던 1988년, 당시 창사방송국의 PD로 있던 뤄하오와 후난성

청년가수대상에서 만나 1992년 결혼했던 그들은 각자의 일로 인해 창사와 베이징에서 장기간 이어진

별거와 장쩌민과의 악성 루머 탓에 둘은 이혼 위기까지 갔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쑹주잉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모습을 보인 것은 2012년 18차 당대회에서 시진핑이 총서기에 오른 직후

부터다. 18차 당대회 직후인 2013년 춘완 특집에서 그녀는 셀린 디온과 함께 출연해 전통민요 ‘모리화

(茉莉花)’를 중국어로 불렀다. 하지만 합창이 끝나고 셀린 디온이 자신의 노래인 ‘타이타닉’ 주제가를

독창한 데 반해, 쑹주잉에게는 독창 시간이 주어지지 않아 이런 루머는 더욱 확산됐다.

이때부터 쑹주잉의 ‘황후’ 지위에 이상신호가 감지됐다. 특히 지난해 11월, 중국공산당 18기 3중전회

폐막 직후 시진핑이 ‘군개혁’을 표방하고 나서부터는 신화왕(新華網) 등 당 관영매체들이 운영하는 웹

사이트에 그녀 관련한 각종 소문이 여과 없이 오르내렸다. 특히 일부 네티즌들은 그녀가 이끄는 해정

(해군 정치부)문공단을 표적으로 해정문공단 단장을 지냈다는 쑹주잉의 군공연 녹화물 존재여부를

확인하는 등의 논란을 제기했다.

【高層內幕】宋祖英後院起火 涉内部黑幕海政辦公室出大事


그런데 여기에 쑹주잉의 최대 라이벌이자 시진핑의 부인인 펑리위안의 ‘입김’이 작용했는지가 은연중

관심거리였다. 펑리위안은 22세 때인 1984년에 제2회 춘완 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

모두 21차례 춘완 무대에 등장했다. 쑹주잉과 춘완 출연 횟수를 다투고 있는 국가 일급연예인이다.

사실 나이로는 펑리위안이 쑹주잉보다 다섯 살 많지만, 인기와 영향력 면에서는 쑹주잉 쪽이 오히려

더 높았다. 그러나 그 둘의 관계는 시진핑의 총서기 취임 이후 완전히 역전된다. 펑리위안과 쑹주잉의

스승 진톄린(金鐵霖) 전 중국음악학원장이 자신의 자서전을 출간하면서 “펑리위안이 지금까지 내가

키운 가장 훌륭한 학생이었다”며 “깨달음이 매우 빠르고 각고의 노력을 하는 학생이었다”고 격찬을

아끼지 않은 반면, 쑹주잉에 대해서는 “쑹주잉은 부지런한 학생이었고, 출세 이전이나 출세한 이후나

사람들한테 늘 잘했다”는 평가를 내렸는데, 단순히 욱일승천하는 현재 권력에 대한 굴복이라고 토를

달기엔 쑹주인에 대한 평가 치곤 너무 인색했다.

그런데 2년 전 춘완의 총감독인 중국의 유명 감독 펑샤오강(馮小剛)이 중남해의 ‘지침’을 받았는지도

관심거리였다. 장이머우와 함께 손꼽히는 중국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풍자와 유머를 주특기로 하는

펑샤오강은 처음 춘완 총감독을 맡으면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30여년 역사의 춘완은 내가 바꾸려고

했던 작은 부분조차 바꾸기 힘들다”며 “내 생애 절대로 (춘완 감독을) 두 번 다시 맡는 일은 없을 것”

이라고 말했는데 뭔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쑹과 같은 부대에서 활동했던 가수 후오용(霍勇)은 “쑹 단장은 그동안 가무단 단원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아왔다. 단원들이 안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을 최선을 다해 해결해 줬고, 하급부대와

섬 부대를 가리지 않고 적극적인 위문공연을 해왔다”고 전했다.

 

자선활동에도 열심이었던 쑹은 2006년에는 개인 돈과 성금을 합쳐 약 400만위안(약 7억2,000만원)

후난성 장학기금회에 쾌척하는 둥 이후에도 각종 재단 등에 거액을 쾌척했다고 한다.

 

 

中 허난성 한 간부, 가수 쑹주잉 껴안았다가 현장에서 구속!! 

 

중국 국민가수 쑹주잉(宋祖英), 펑리위안(彭麗媛)

이 때까지는 좋았는데...

 

 

중국 국민가수 쑹주잉(宋祖英), 펑리위안(彭麗媛)

그런데 기쁘다보니 이렇게 너무 나가버렸다. 이 장면 하나로 그의 인생도

'쫑'치고 말았다. 황제 장쩌민의 내연녀를 어디 함부로!!



<뉴스 보도> 허난(河南)성 푸양(?陽)시에서 최근 열린 ‘애국가요대합창(愛國歌曲大家唱)’행사에서

공산당의 한 간부가 갑자기 무대에 뛰어들어 공연 중인 여가수를 강제로 껴안는 돌발 행동을 보여

직무에서 파면되고 법정 구속됐다고 신징바오(新京報)가 30일 보도했다.
 

"행사에는 중국 가요계의 톱가수들이 많이 참가했고 관중은 대부분 정부기관의 간부들이었다"며

"공연 중 한 관중이 중국의 톱 스타 민요가수 쑹주잉(宋祖英)을 억지로 껴안고 사진을 찍는 추태를

별였다"고 밝혔다. 특히, 숭주잉과 촬영을 했던 이 간부는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 네티즌들의 ‘인육

수색(人肉搜索ㆍ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물의를 일으킨 사람의 개인정보를 캐내는 일)을 당했다고

한다. 왕류쥐이(王留聚)라는 이 남자는 푸양시 개발구 후춘향(胡村響) 판공실 주임으로 알려졌다.

(아주경제 홍해연 기자)

 

그런데 세상 참 야속하기도 하다. 누가 황제의 여인인줄 알고도 그랬을라고?! 

 

 군복 입고 나타난 중국의 민요 여왕이자 해군 정치부 가무단 단장(海军政治部文工团团长) 쑹주잉(宋祖英 47)

군복 입고 공식석상에 나타난 중국 민요여왕. 쑹주잉(宋祖英)은 현재 해군 가무단장직을 맡고 있다.


먀오족(苗族·묘족)


1992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동방불패(東方不敗)’. 한족의 명(明)나라에 대항해 먀오족(苗族·묘족)

나라를 세우려는 동방불패(임청하 분)를 주인공으로 한 홍콩 무협영화다. 먀오족의 새로운 리더 동방불패는

‘일월신교(日月神敎)’라는 종교집단을 장악하고 외세(外勢)인 일본 낭인들까지 끌어들여 한족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먀오족끼리 내분을 거듭하다 결국 몰락한다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다.

동방불패로 분한 한족 영화배우 임청하는 이 영화 한 편으로 당대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했다. 영화 속에서

동방불패는 “너네 한족은 금(만주), 요(거란), 묘(묘족), 장(티베트), 몽(몽골), 회(회족) 6족 중 수가 가장

적은 먀오족(묘족)을 제일 괴롭혔다”고 일성을 내뱉는다. 이 말이 역사적으로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되

‘동방불패’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먀오족의 존재를 처음으로 각인시킨 영화로 평가받는다.


중국 전역에 살고 있는 먀오족은 대략 9백만 명 가량. 그중 구이저우 20여 자치 지역에 절반이 거주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등에도 20만여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좡족, 만주족, 후이족

(회족)에 이어 4번째로 수가 많다. 영화 ‘동방불패’에서 먀오족은 타이완을 마주하고있는 푸젠성(복건성)

해안가에 사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먀오족은 서남부 내륙지역에 주로 거주한다.

 

당초 황허 중류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진 먀오족은 한족들에게 밀려 남하를 거듭하다 창장(長江) 이남까지

내려왔다. 지금은 대다수의 먀오족이 구이저우(貴州), 후난(湖南), 윈난(雲南), 광시와 같은 창장 이남에

주로 거주한다. 그 가운데 구이저우성 동남부 산간지방에는 전체 먀오족의 48%가량이 모여 산다. 이 밖에

구이저우와 접경을 이루는 후난성과 윈난성에도 전체 먀오족의 21%, 11%가량이 모여 살고 있다.

 

소수민족의 용광로로 불리는 윈난성과 광시 좡족(壯族)자치구 사이에 있는 구이저우는 먀오족의 근거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이저우에만 족히 20개가 넘는 먀오족 자치주와 자치현이 있다. 먀오족의 자치주와

자치현은 대개 먀오족을 중심으로 동족이나 이족 같은 기타 소수민족을 한꺼번에 묶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치주와 자치현의 규모는 작게는 1만명부터 크게는 27만명까지 각양각색이다. 구이저우는 후진타오

(胡錦濤) 국가주석이 1985년부터 3년간 당 서기를 지낸 곳이다. 당시 후진타오 당 서기는 소수민족의 생활

수준 향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중국 국적이 아닌 해외에 사는 먀오족도 상당수다. 중국 남부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베트남과 라오스에도

각각 80만명과 30만명 가량의 먀오족이 살고 있다. 베트남과 라오스에 살고 있는 먀오족은 ‘흐몽족(赫蒙族·

혁몽족)’으로 불리운데, 베트남에 사는 먀오족들은 베트남 전쟁에도 개입했다. 현지 지형에 익숙한 먀오족

들은 미군과 협력해 공산 베트콩(월맹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미군 포로들을 구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라오스 왕국과 공산반군 사이에 벌어진 라오스 내전 때도 먀오족들은 라오스 왕국을 지원하는 미군의 비밀

용병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1975년 베트남의 적화통일과 함께 인도차이나(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반도가 공산화되자 미군을

도와 싸운 먀오족은 졸지에 정치난민 신세가 됐다. 결국 이들은 베트남과 라오스를 떠나 미국, 태국 등지로

대량이주를 감행했다. 이러한 먀오족들의 대량이주는 먀오족이 전세계로 퍼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일대와 태국에는 각각 22만명과 12만명의 먀오족이 살고 있다. 프랑스에도 1만명이

넘게 산다. 미국과 태국 등지에 살고 있는 먀오족과 중국 내에 살고 있는 먀오족을 포함하면 모두 1000만

명이 넘는다. 인구 면에서 유럽의 포르투칼(인구 1068만명)에 육박하는 ‘거대’ 소수민족인 셈이다.

 

해·달 숭배, 1년 365.25일 달력 사용하는데, 고대 이집트 태양력보다 정확도 높다고 한다. 한족을 포함한

 

중국 56개 민족 가운데 가장 일찍 농경 정착생활을 시작한 민족 가운데 하나인 가장 묘족의 ‘먀오(苗·묘)’

라는 단어 자체도 ‘밭(田)에서 돋아난 풀(草)’을 가리키는 말이다. 위구르족이나 몽골족 같은 북방계 소수

민족들이 유목과 낙농업을 업(業)으로 삼는 데 반해 이들은 농업을 주로 한다. 따라서 먹는 음식도 자연히

쌀을 위주로 한 곡류가 됐다. 강수량이 풍부한 지역적 특색을 이용해 논에서 벼를 재배한다. 쌀 이외에는

옥수수와 같은 밭 작물을 주로 키운다.

 

먀오족은 수풀이 우거지고 물이 풍부한 구이저우, 윈난 등 서남부 오지에 살다 보니 약초(藥草)를 비롯해

뱀과 해충 등을 다루는 일에도 능숙하다. 영화 ‘동방불패’에는 먀오족이 대나무 피리를 사용해 뱀을 능숙

하게 부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매혹(魅惑)’보다 강한 의미의 ‘고혹(蠱惑)’이란 단어도 먀오족들이 다루던

‘음양고(陰陽蠱)’라는 독충에서 비롯됐다는 설이다. 농경 정착생활을 하다 보니 먀오족은 역법(曆法)을

발전시켰다. 먀오족은 태양력을 위주로 한 ‘음양력(陰陽曆)’이란 달력을 사용했다. 1년을 365.25일로 나눈

먀오족의 음양력은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사용하던 태양력보다 정확도가 높다고 알려졌다.

 

4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윤년에 고대 이집트의 달력은 6일이 추가되는 데 반해, 먀오족의 역법에는 단지

1일만이 추가된다. 달력을 사용한 시기도 고대 이집트 달력보다 약 3800년가량 앞선걸로 알려져 있다.

 

일찍부터 자체적인 역법을 발전시켜 자연스레 태양과 달, 별과 같은 우주에 떠있는 사물을 숭배하였는데,

이 때문에 한족들은 먀오족이 사용한 태양력을 근거로 “먀오족의 달력은 중국 역법의 어머니일뿐 아니라

세계 역법의 어머니”라고 자랑한다.

 

영화 ‘동방불패’에서 주인공 동방불패는 항상 해와 달이 그려진 부채를 들고 다닌다. 동방불패가 해와

달을 숭상하는 ‘일월신교(日月神敎)’의 교주로 등장하는 까닭도 먀오족의 전통신앙과 관계가 있다. 명교

(明敎·중국화된 마니교)의 분파로 알려진 일월신교를 한족들은 흔히 ‘마귀의 종교’란 뜻에서 마교(魔敎)

라고 부른다. ‘일월(日月)’은 밝을 ‘명(明)’자를 파자(破字)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 먀오족 사이에

일월신교란 종교집단이 있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

 

전통적으로 한족은 먀오족을 남만(南蠻·남쪽 오랑캐)의 일부에 포함시켰다. 먀오족도 내부적으로 입는

옷이나 거주지역에 따라 홍먀오(紅苗), 청먀오(靑苗), 흑먀오(黑苗) 등으로 구분된다. 1949년 신중국

건국 이후에야 중구난방 불리던 명칭을 먀오족으로 통일했다. 먀오족은 다른 소수민족들과도 확연히

구분되는 복식을 가지고 있다. 특히 묘족 여자들은 은(銀)으로 된 장신구를 즐겨 찬다. 은으로 장식된

화관을 머리에 쓰고 무게만 10~20㎏에 달하는 은 목걸이를 목에 건다. 남자들의 경우 정수리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머리카락을 시퍼런 낫으로 ‘빡빡’ 미는 것이 전통이다. 남겨둔 윗머리는 상투 형식으로

틀거나 아래로 땋아서 기른다. 먀오족 자치주의 일부 묘족 남성들은 여전히 이 같은 두발을 고수하고

있다. 앞머리를 깨끗이 깎는 것은 만주족의 변발과 거의 비슷하다.


먀오족은 음주가무에도 능하다. 대나무 피리 일종인 먀오족 전통 악기 루셩(芦笙)은 중국 전통악기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중국의 이미자로 불리는 먀오족 출신의 가수 宋祖英. 그녀도 어느새 나이 50이

되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폐막식에서 세계 3대 테너 중 하나인 플라시도 도밍고(68)와 듀엣으로

폐막 무대를 장식하기도 했던 쑹주잉은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을 방문해 공연을 갖기도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녀의 급속한 성장배경과 관련해 각종 루머와 스캔들이 나돌았었다. 대표적인

게 “장쩌민 전 주석(한족)의 정부(情婦)”라는 소문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가 공산당에 가입하고

인민해방군 가수가 돼 승승장구하는 시점은 장쩌민의 집권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예전에 “베이징에

있는 오페라하우스(국가대극원)는 장쩌민이 쑹주잉에게 준 선물”이란 소문이 퍼지기도 했었다.

중국에서는 권력자와 여자 예능인 간에 그렇고 그런 관계가 자주 형성되는 걸 해외 가십란을 통해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60년~80년대에 자주 접했던 루머의 재판인 듯하다.

 

한족에 뿌리깊은 반감, 명대에 잇단 반란만주정권 들어서면서 한족에 급속 편입된 먀오족의 역사는

우리의 조선족과 비슷한 면도 있다. 윈난과 쓰촨 등지에 사는 먀오족은 개고기(拘肉)를 즐겨 먹는다.

먀오족들이 민족의 시조로 섬기는 인물도 ‘치우(蚩尤)’다. 제갈량이 숭상했던 전신(戰神)이 바로 그

치우이다. 중국 상고사에서 가장 유명한 '탁록 전투'는 바로 우리의 치우 천황과 중국 최초의 황제

라는 헌황과의 싸움이다. 이 때 치우 천황은 비 구름 바람을 자유자재로 일으켜 천하무적이었다.

중국 역사에서는 우리의 치우 천황이 패퇴한 걸로 나오는데, 이에 대한 반론도 많다. 이 때 치우가

이끈 구려(九黎)족은 먀오족의 선조로 알려져 있다.

 

반면, 우리나라 일부 재야 사학자들은 치우를 우리 민족의 선조로 여기고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붉은악마’가 공식 마스코트로 사용한 도깨비의 얼굴이 바로 치우의 붉으락 푸르락한 얼굴이다.

치우는 한족의 선조 격인 황제(黃帝)와 탁록(涿鹿· 허베이성 장자커우 일대)에서 일전을 벌인 바 있다.

이른바 탁록대전으로, 치우의 초반 9차례 승리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단 한 번의 패배로 중국은 황제를

시조로 하는 한족이 장악하게 된다. 현재 중국 사학계에서는 탁록대전을 ‘황허를 기반으로 하는 한족

문명과 창장을 기반으로 하는 남방민족 간의 대결’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탁록대전을 시작으로 먀오족과 한족 간에 끊임없이 충돌이 이어져왔다. 영화 ‘동방불패’에서도 먀오족

일원신교 옛 교주의 딸은 “한족에게 시집을 가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말하며 한족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을 드러낸다. 실제 영화 ‘동방불패’의 배경이 되는 명대 말기에 먀오족은 줄곧 한족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먀오족은 명代 말기까지만 해도 지방의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토사(土司)’가 전권을 쥐는 반(半)독립

상태였다. 구이저우성 일대에는 과거 먀오족이 한족에 저항했던 성터 등 유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하지만 청대들어 같은 소수민족인 만주족이 중국을 제패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만주정권은 지방유지

‘토사’들의 힘을 빼고,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에게 힘을 싣는 ‘개토귀류(改土歸流)’ 정책을 전개했다.

 

이후 먀오족은 한족의 호적에 편입되고 한족의 성씨를 사용하는 등 빠르게 한화(漢族化)되었다. 결국

소수민족이 소수민족을 굴복시킨 것이다. 하지만 먀오족은 청代 말기 구이저우, 윈난 등지에서 재차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만주 정권을 무너뜨리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https://youtu.be/VrwYmlx4b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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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WO_eJ6M4jT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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