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면
마지막 장면
구원은 없다
1960년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달콤한 인생〉은 당시 이탈리아의 퇴폐적인 상류사회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에는 펠리니 감독의 분신과도 같은 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가 배우나 상류층의 스캔들을 추적하는 잡지사 기자 역을 맡고 있는데, 배우의 실제 이름과 동일한 마르첼로라는 주인공이 겪는 일주일간의 생활을 통해 현대인의 가치 상실에 대해 은유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달콤한 인생〉에서 보여준 방탕에 대한 풍자를 넘어선 신랄한 공격과 그럼에도 퇴폐적이고 광적인 인간 군상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매혹 사이의 긴장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힘을 잃지 않고 있다.
〈달콤한 인생〉의 첫 장면은 이 영화의 종교적인 관점을 상징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멀리 헬리콥터 2대가 하늘을 날아오는 것으로 시작하면 헬리콥터에 거대한 예수 조각상을 매단 모습이 보이고, 헬리콥터는 고대 로마 건물과 도시 외곽 지역 고층 건물 위를 날아간다. 지상에서는 아이들이 환호를 지르며 헬기를 쫓아 달려가기도 하고, 일하던 공사장 인부들이 잠시 일손을 멈춘 채 손을 흔들기도 한다. 여기에서 두 팔을 벌리고 날아가고 있는 예수상은 로마 시내를 굽어보며 마치 강림하는 것 같다. 건물 옥상 위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고 있던 아가씨들은 헬기를 향해 예수 동상을 어디로 옮기냐는 등 소리를 질러보고, 헬기에 타고 있는 마르첼로는 한 아가씨에게 데이트를 위해 전화번호를 외치지만 프로펠러 소음은 그 목소리를 삼켜버린다.
이것은 바로 당시 로마 사회에서 무기력해진 신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신의 부재를 알리는 첫 장면으로 시작해 신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정신적 방황과 도덕적 타락을 그리고 있다. 마르첼로라는 주인공을 따라 단테의 『신곡(神曲)』에서 사후세계를 떠도는 순례자처럼 영화는 타락한 세계를 떠돈다. 마르첼로는 상류사회의 방탕한 파티를 찾아다니는데, 파티는 늘 무절제한 타락의 축제로 끝을 맺는다. 인간 존재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파티가 벌어지지만 쾌락의 절정 후에도 사람들은 항상 미몽에서 깨어나듯 불쾌감과 상실감에 시달릴 뿐이다.
〈달콤한 인생〉의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과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종교에 대한 펠리니의 관점이 부각된다. 해변의 별장에서 광란에 가까운 허무한 파티(여장 남자의 등장이나 변태적인 스트립쇼 등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가 끝난 새벽, 사람들은 술에서 깨기 위한 듯이 하나둘씩 바닷가로 향한다. 해변에는 어부들이 커다란 괴물 같은 흉측한 형체의 가오리를 잡아 올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 몰린다.
마르첼로는 물고기가 계속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데, 카메라는 사람들을 노려보는 듯한 숨이 끊어진 물고기의 뻣뻣이 굳은 한쪽 눈을 클로즈업으로 강조한다. 여기에서 물고기와 그 눈은 그리스도 또는 신의 상징인데, 펠리니는 그 모습을 비정상적이고 괴기스럽게 보여줌으로써 현대인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종교와 신의 존재에 대해 다시 반문하고 있다.
오프닝 장면에서 ‘아름답지만’ 허구인 조각상과 마지막 장면에서 ‘추하지만’ 실재하는 물고기라는 두 가지 기독교 상징이 등장하는데, 두 장면에서 마르첼로는 모두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한다. 펠리니는 영화의 마지막에 구원의 상징으로 마르첼로가 예전에 소설을 쓸 조용한 장소를 찾던 중에 시골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청순하고 수줍은 이미지의 소녀를 등장시킨다.
백사장에 앉아 있는 마르첼로와 저만치 떨어져 서 있는 그 소녀는 수줍게 마르첼로에게 웃음을 보내며 그가 기억을 더듬는 걸 도와주려는 듯 타자치는 시늉을 하며 무어라고 말한다(이제는 다른 삶을 시작하라는 걸까?). 그러나 마르첼로는 파도 소리에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 기억을 하지 못하는 마르첼로가 계속 알아들을 수 없다는 동작을 보이자 소녀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결국 마르첼로는 파티를 함께 했던 한 여자의 손에 이끌려 저주받은 무리 속에 섞여 사라진다. 그리고 마지막 숏은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얼굴 클로즈업에서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려 카메라를 정면으로(관객의 얼굴을) 응시하는 데서 끝난다.
소녀의 얼굴은 순수함의 상징으로 정신적이고 자연적인 세계를 나타낸다. 신의 대리인인 천사와도 같은 소녀와 마르첼로가 끝내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는 이 마지막 장면은 서글프게도 그가 끝까지 구원받지 못함을 상징한다. 마르첼로는 자신의 영혼을 팔았던 ‘달콤한 생활’에 안주하며 탐닉하고 있으며 그에게 더 이상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트래비 분수에서 실비아(아니타 에크버크)의 아름다운 모습은 마르첼로의 당혹감과 불편함, 그리고 극도의 고통을 표현하는 장면이다. 그는 실비아를 ‘커다란 인형’ 같다고 조롱했지만 그녀에게 반하는 자신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한밤중에 길 잃은 고양이에게 줄 우유를 찾아오라는 어처구니없는 심부름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힘들게 돌아왔을 때 그녀는 그런 요구를 한 사실도 잊고 있다. 그러고는 실비아가 있는 분수 속으로 따라 들어가 내면의 경고를 무시하고 “당신은 천지창조 첫 날의 첫 번째 여자요”라는 멋진 이탈리아식 유혹의 말을 던진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그날 밤은 실비아의 술 취한 애인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 것으로 끝난다.
마르첼로는 한때 진지한 작가였지만, 지금은 유명인사의 공허한 파티를 찾아다니며 춤이나 추는 얄팍한 가십 기자가 되어 있다. 일탈을 꿈꾸며 엉뚱한 행동을 해보지만 아무 스릴도 느낄 수 없고 사람들은 그를 귀찮게 따라다니는 존재로 멸시한다. 〈달콤한 인생〉에서 마르첼로와 함께 일하는 사진작가로 파파라초(paparazzo)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후 이 이름에서 오늘날 유명인사를 쫓아다니며 특종을 노리는 공격적이고 비열한 사진기자를 일컫는 ‘파파라치’(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과 연관되어 화제가 된)라는 신조어가 탄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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