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이야기

주역(周易)과 노벨 물리학상

코알라 아빠 2017. 9. 3. 10:56

닐스 보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1921년


1922년


1924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로버트 밀리컨

파일:external/ishiaampeloquio.weebly.com/217439656.jpg
닐스 헨리크 다비드 보어 Niels Henrik David Bohr(1885년 10월 7일 ~ 1962년 11월 18일)
아인슈타인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덴마크 출신의 위대한 물리학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iels_Bohr.jpg

파일:external/ncc.phinf.naver.net/0003_.jpg


기사 작위를 받은 닐스 보어의 문장.
보어가 직접 디자인했으며, 상보성의 원리를 태극으로 표현하였다. <출처: Niels Bohr>





수소의 선 스펙트럼을 설명하면서 원자의 구조에 대한 가설(보어 모델)[2]을 내놓아 1922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설명하는 과정에서 양자론을 도입했기 때문에 이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불확정성 원리를 내놓는 데 영향을 주었다.

1911년에 트리니티 칼리지로 가서 J.J 톰슨에게서 지도를 받았으나 보어의 영어가 서툴렀고 톰슨의 무관심함으로 맨체스터 대학교의 어니스트 러더퍼드에게 가게 된다. 여기서 당시 최신 원자 모형이었던 러더퍼드 모형에 대하여 접하게 되면서 1913년에 자신의 원자 모형을 발표하게 된다.

큰 키, 큰 머리로 눈에 띄었다는 모양이다. 사진 중에는 배우 존 트라볼타를 연상시키는 사진도 있다. 운동도 즐기는 스포츠맨 타입이나 꽤 수줍어 했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26세 때의 그를 본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동료는 "소년 같다"고 평하기도. 중년 때는 후학들에게 꽤나 우러러 보였던 모양. 제자인 오토 프리슈[3]는 편지에 보어와 만났던 일화를 쓰면서 "신이 내 코트 단추를 만졌다"라고까지 했고, 파인만은 회의장에서 보어를 만났을 때를 "거물들에게도 보어는 위대한 신이었다"라고 회상했다.[4][5]

지금도 코펜하겐에는 보어 연구소가 자리잡고 있다. 덴마크에서 유명한 과학자다보니 집도 근사한데, 덴마크 맥주회사인 칼스버그가 기부해줬다. 거기에 수십 년 간의 관리비까지 그냥 지급해주어서 그의 후손들은 편하게 잘 먹고 잘 산다고(…). 그의 아들 오게 보어도 1975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고 평생 보어 연구소에서 소장 자리를 맡았다.

그가 원자의 구조 외에 중요한 일을 한 것이 있다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 모든 국가에게 개방정책 및 공동 관리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원자력의 폐쇄적 이용에 따른 핵무기 무한 경쟁시대를 우려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정치인들에게 계속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그의 예견대로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되었다.

그는 윈스턴 처칠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직접 만나며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처칠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은 지금 정치를 하는 건가, 과학을 하는 건가?"과학자는 정치참여하지 말란법있나?

107번 원소 '보륨'의 이름은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상보성 원리

입자와 파동의 협주

코펜하겐 대학에서 1911년 박사 학위를 받은 보어는 영국으로 건너가 처음에는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J. J. 톰슨(J.J. Thomson, 1856~1940)과 함께 연구하다가 맨체스터 대학으로 옮겨 러더퍼드(Sir. Ernest Rutherford, 1871~1937)와 함께 원자의 구조에 대해 연구를 했다. 1916년에는 다시 덴마크로 돌아와 코펜하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21년에는 코펜하겐 대학에 이론 물리 연구소(후에 닐스 보어 이론물리 연구소)가 설립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설립된 이론 물리 연구소는 양자 물리학 발전에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양자 물리학의 산실이 된 코펜하겐 이론 물리 연구소

코펜하겐에 있는 닐스 보어 이론물리 연구소<출처: Thue at en.wikipedia.com>


보어가 소장으로 있던 코펜하겐의 이론물리 연구소는 곧 원자 물리학과 양자 물리학 연구의 세계적 중심지가 되었다. 물리학 연구에서 과학자들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보어는 유럽은 물론 세계의 젊은 학자들을 적극적으로 이론 물리 연구소로 초청했다. 보어는 젊은 연구원들과 함께 연구하며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함께 등산이나 카누 타기와 같은 여가 활동을 즐기기도 했다.

물리학자로 이 연구소에서 연구했던 빅토어 바이스코프(Victor We isskopf, 1908~2002)는 이 당시 보어가 동료들 가운데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젊은 연구원들과 함께 활동하고 토론했으며, 항상 생기가 넘치고 난관적이며 익살스럽고 열정적인 사람이었지만 연구를 할 때면 적극적인 자세로 자연의 가장 깊숙한 수수께끼를 파고들며, 인습의 굴레에서 벗어난 정신의 소유자였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보어의 적극적인 태도는 그대로 코펜하겐 정신이 되었다.

이론 물리 연구소에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공동연구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수개월 또는 수년 동안 연구소에 머물면서 거의 아무런 제약 없이 연구에 열중할 수 있었다. 후에 빅뱅이론을 제안한 러시아의 조지 가모프(George Gamow, 1904~1968)의 설명을 통해 이론 물리 연구소의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다. 1928년부터 1929년까지 이론 물리 연구소에서 연구했던 가모프는 독일에서의 연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틀 동안 머물 예정으로 코펜하겐에 들렸다. 가모프는 보어를 찾아갔다. 언제나 젊은 학생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던 보어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보어는 가모프에게 물리학에서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가모프의 설명을 듣고 난 그는 즉석에서 “정말 흥미 있는 이야기로군요. 당신 이곳에 1년 머물러 주십시오.” 라고 제안했다. 가모프는 연구소의 생활에 대해 “연구소에서의 연구는 매우 쉽고 간단한 것이었다. 매일 무엇이나 원하는 것을 하면 되었다. 원할 때 연구소에 오고 원할 때 집에 갈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보어는 자신이 연구소에 초대한 사람들에게는 열심히 일하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보어와 마찬가지로 물리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알려지지 않는 영역을 탐험하는 선구자들이었다.


빅뱅 이론으로 유명한 러시아 과학자 가모프, 젊을 때 코펜하겐 연구소 일원이었다(왼쪽)
보어의 이론 물리 연구소를 호평한 오펜하이머(오른쪽)

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1904~1967)는 이론 물리 연구소의 연구 성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때는 영웅들의 시대였다. 양자 물리학은 어떤 한 사람이 이루어낸 성과가 아니었다. 양자 물리학은 많은 나라에서 온 다수의 과학자들의 협동연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닐스 보어의 매우 창조적이고 섬세하고 비판적인 정신이 그 사업을 안내하고, 제한하고, 심화하고, 마침내 변화시켰다." 새로운 양자 물리학은 수학적 계산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수학적 계산에 의해 도출된 결과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를 해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한 해석을 위해서는 보어와 그의 연구소를 방문했던 사람들이 심도 있는 토론을 벌여야 했다. 이 토론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수학적 기술을 실험 및 실험 결과들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보어의 첫 번째 제안 : 양자 세계의 이중성을 설명하는 상보성의 원리는 입자와 파동의 협주(協奏曲)이다!

양자 물리학의 중심이 되는 코펜하겐 해석은 코펜하겐의 이론 물리연구소에서 골격이 잡혔다. 코펜하겐 해석은 보어 개인의 과학적 업적이 아니라 이론 물리 연구소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많은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보어 개인은 두 가지 원리를 제안함으로써 양자 물리학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기여했다. 그 중의 하나가 1927년 '양자 이론의 철학적 기초'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최초로 제안한 '상보성 원리(complementarity principle)'였다.

상보성 원리란 원자를 구성하는 양성자나 전자와 같은 입자는 파동과 입자와 같이 전혀 다른 두 가지 성질을 가지지만 원자를 구성하는 입자들과 관계된 현상을 완전히 기술해 내는 데에는 두 가지 성질 모두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빛은 간섭이나 회절과 같은 실험에서는 파동의 성질을 보여주고, 광전효과 실험에서는 입자의 성질을 나타낸다. 그러나 한 가지 실험에서 두 가지 성질이 동시에 나타나지는 않는다. 전자나 양성자와 같은 입자들도 같은 성질을 가진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보어는 빛이나 입자들이 가지는 이러한 이중성을 상보성 원리로 정리한 것이다.

보어의 두 번째 제안 : 물리량은 측정 과정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원자를 구성하는 입자들과 관계된 물리량은 그러한 물리량을 측정하는 측정 과정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실험을 통해 측정된 물리량들은 하나의 구도 안에서 이해될 수 없지만 대상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 꼭 필요하다는 것이 상보성 원리이다. 이러한 해석은 어떤 대상의 물리량은 측정과는 관계없이 객관적인 양으로 존재한다는 기존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이었다. 양자 물리학에서는 측정 과정과 분리된 물리량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측정 과정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측정과 물리량에 대한 변화된 견해를 나타내는 이러한 코펜하겐 해석은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를 비롯한 몇몇 물리학자들은 이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보어의 초기 업적을 사고영역에서 이루어낸 최고의 업적이라고 크게 칭찬했었다. 그러나 그는 양자 물리학이 원자적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새로운 물리학이라는 보어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대상의 물리적인 상태는 측정과는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우리가 서로 다른 측정을 통해 다른 성질을 확인하는 것은 우리의 실험이 대상의 모든 성질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의 그런 생각은 슈뢰딩거가 아인슈타인과 함께 오랫동안 의논한 끝에 제안한 사고실험인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해서는 다음 이야기에서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보어는 아인슈타인과 벌였던 토론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아인슈타인의 도전적 반대가 보어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물리학자 아브라함 파이스(Abraham Pais, 1918~2000)는 후에 "아인슈타인은 보어의 영원한 정신적인 논쟁 상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이 죽은 후에도 보어는 마치 아인슈타인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그와 논쟁하곤 했다."고 설명했다.

상보성의 원리를 물리학 밖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상보성 원리의 철학적 의미에 흥미를 느낀 보어는 이 원리를 좀 더 일반적인 경우에도 적용시켰고, 이런 일반화는 많은 논란을 불러 오기도 했다. 보어는 생명체는 하나의 개체로서의 생명체와 분자의 집합체로서의 생명체로 볼 수 있지만, 개체로서의 생명체와 분자의 집합체로서의 생명체는 같은 실험으로 동시에 다룰 수 없다고 설명했다. 생명체 안에 있는 모든 세포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려고 한다면 생명체는 죽어버려서 개체로서의 생명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윤리학의 정의와 자비 사이, 심리학의 사고와 감정 사이, 문학의 형식과 내용 사이 그리고 과학 이론의 틀과 내용 사이에도 상보성을 적용했다.

미국의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Freeman John Dyson, 1923~현재)은 보어가 주장한 넓은 의미의 상보성을 과학과 신학 사이에도 적용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신학과 과학이 인간의 경험을 전체적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좁다고 주장했다. 신학은 미분 방정식을 포함하지 못하며, 과학은 신성함을 포함하지 못한다. 우주를 종교적인 경험을 통해 파악하면 정량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고, 우주를 과학적 경험을 이용하여 파악하면 신성한 것은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신학과 과학에 상보성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종교적인 면과 과학적인 면을 동시에 관측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과 우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과 과학의 상보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자 물리학에서의 상보성 원리와 일반화 시킨 상보성 이론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하기는 어렵다. 양자 물리학에서의 상보성 원리는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나 양성자 같은 입자가 가지는 물리적 성질을 설명하는 실험 결과와 부합하는 가장 합리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에 적용된 상보성은 대립되는 면을 가지는 여러 가지 사실을 상보성 원리에 억지로 꿰어 맞춘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억지스러워 보이는 상보성의 일반화는 양자 물리학에서의 상보성 원리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상보성 원리 - 입자와 파동의 협주 (물리산책)



2. 몇 가지 일화들[편집]

1. 대학 물리학 수업중에 한 교수가 "기압계를 가지고 고층빌딩의 높이를 측정하라."라는 문제를 내었다.

교수의 예상답안은 빌딩 옥상에서의 기압과 지상에서의 기압차를 이용해 측정하는 답이었지만, 대학생이던 보어는 "기압계에 줄을 단 다음, 기압계를 빌딩 아래로 늘어뜨려 그 줄의 길이를 잰다"고 대답했다

자신의 생각대로 따라오지 않는 보어에 대해 교수는 화가 났고, 중재에 나선 다른 물리학 교수가 6분 안에 물리학 지식을 이용한 답안을 내놓으면 정답 처리하겠다고 했다. 학생은 5분 동안 조용히 이마를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중재자는 시간이 별로 안 남았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 말에 학생은 해답은 여러 개 있는데 어떤 걸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다시 서두르라는 말을 들은 학생은 몇 개의 답안을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기압계를 가지고 옥상으로 올라갑니다. 그런 다음 옥상 꼭대기에서 기압계를 떨어뜨려 그것이 땅에 떨어지는 시간을 잽니다. 건물의 높이는 0.5gt^2 의 공식으로 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압계는 박살이 나겠지요.

다음으로 해가 떠 있다면 기압계의 높이를 측정하고 다시 그걸 땅에 세워서 만들어지는 그림자의 높이를 잽니다. 그런 뒤 건물 그림자의 길이를 재면 단순한 비율 계산만으로 건물의 높이를 알 수 있습니다.

훨씬 과학적으로 하고 싶다면 기압계에 짧은 줄을 묶고 진자처럼 흔듭니다. 진자운동은 먼저 땅에서 하고 다음으로 건물옥상에서 합니다. 높이는 진자의 주기 T=2pi(l/g)^(1/2)를 사용하여 계산 됩니다.

건물 외부에 비상계단이 있다면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서 기압계를 몇 개 쌓으면 건물높이 만큼 되는 지 건물벽에 대 보면서 올라갑니다. 그 숫자를 확인한 후 기압계의 길이를 곱하면 됩니다.

물론 따분하고 진부한 방식으로 하고 싶다면 기압계로 옥상의 기압과 땅위의 기압을 측정한 다음 밀리바를 미터로 나누어도 건물의 높이를 알 수 있습니다.(학교가 바라던 정답 처음부터 이렇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하하 사실 난 너희들이 싫었어!) 하지만 저희는 기존의 사고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하라는 훈계를 끊임없이 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수위실 문을 두드려 '새롭고 멋진 기압계를 갖고 싶으면 이걸 드릴 테니까 건물 높이를 알려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6]

사실 이 일화는 거짓이다. 링크 이야기에 신빙성을 주기 위해 실존 인물을 토대로 삼은 듯.



2. 아인슈타인이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 불만을 표하며 "신은 우주를 가지고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자 보어는 이렇게 답했다.

"여보게 하느님께 자꾸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게."

원래 의미는 신이 주사위를 던지는 지는 우리가 상관할 수 없다 쯤이 된다. 물론 보어와 아인슈타인은 그전에도 친한 사이였다. 혹은 '과학을 논하면서 하느님을 들먹이지 말라' 는 요지의 말을 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3. 그는 유대계 사람이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독일에게 점령당한 덴마크에서 곧 수용소로 잡혀갈 입장이었다. 가까스로 스웨덴으로 빠져나간 다음 영국으로 도망쳤는데, 스웨덴에서 그를 데리러 온 비행기는 민간용 비행기가 아닌 민항기처럼 색을 바꾼 전투기 모스키토였다. 보어는 덩치가 컸기 때문에 비행기 중에서도 폭탄 저장고 위치에 자리잡았고, 비상시를 대비해 낙하산과 조종사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무전기가 달린 헬멧을 제공받았다. 정작 그는 머리가 너무 커서 그 헬멧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결국 조종사가 "고도가 높아지니 산소마스크를 쓰세요"라는 말을 듣지 못 했기에 영국에 도착하기 전에 산소부족으로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당시 조종사는 보어가 죽었을 거라고 믿었다. 더 흠좀무한 사실은 조종사들이 만약에 구출작전이 실패하여 나치에 체포될 것 같으면 보어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4. 보어는 제임스 프랑크와 막스 폰 라우에의 노벨상 메달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3.의 상황에서 두 사람과 자신의 메달을 독일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왕수에 녹여서는 살던 집 찬장에 놓고 덴마크를 탈출했다. 집을 뒤지던 독일군들은 왕수가 든 병은 건드리지 않았고, 종전 후 환원시킨 금덩이로 협회에서 다시 메달을 제작해줬다.



5. 1941년 9월 경,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만난 사건은 과학사가 사이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이 만남에서 오간 대화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이젠베르크가 핵무기의 개발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했다, 결백을 증명하려고 했다, 독일의 핵무기 개발능력이 없으니 연합국의 개발도 취소해 달라 등등 다양한 설이 있다.

딱 한 가지, 이 만남 이후로 하이젠베르크와 보어 사이가 소원해진 것만은 사실. 이전에는 형제처럼 지낼 만큼 친한 사이였다.
이 사건을 다룬 연극 코펜하겐이 있다.



6. 보어와 그의 제자들은 서부영화를 매우 좋아했었는지 연구중 지치면 서부영화를 보면서 쉬었다고 한다. 보던 중에 그들은 영화광들이 흔히 하는 의문이 생겼다. '왜 악당이 불의의 기습을 거는데 선역이 먼저 총을 쏴 이기게 될까?' 누군가 '의식적 기습보다 무의식적 반응이 더 빠르다'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들은 물총으로 즉시 실험에 나섰다. 선역은 보어, 악역은 당시 학생이었던 조지 가모프. 가모프가 물총으로 기습을 걸었고 결과는 보어의 승리로 끝났다. 이를 통해 그들은 가설이 성공했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오오. 학생이 교수님을 이겼다가는 후폭풍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잠시 넘어가자.



7. 보어는 글쓰기를 지독하게 싫어했다고 한다.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하여 이후 몇 년 간 논문을 쓸 때는 보어가 말하는 것을 그의 어머니가 받아 적었다고 한다. 편지도 쓰고 또 고치고 또 고치기를 잘해 절친한 물리학자 볼프강 에른스트 파울리에게 와 달라는 편지를 보내자 파울리가 편지의 최종교정본이 오면 그 때 가겠다(...)고 할 정도였다. 글쓰는 재능이 좀 없었던 듯. 보어가 논문을 쓰며 "문장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겠다"고 어려워하자 물리학자 폴 디랙이 "나는 문장을 끝낼 줄 모르면 시작하지 말라고 학교에서 배웠다"고 쏘아붙였다. 물론 악의가 담긴 문장은 아니었고 디랙이 원래 좀 이런 사람이었다.



8. 대체로 물리학자들이 수학에 매우 능하지만 보어는 수학에 능하지 못 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냐면 간단한 삼각함수의 적분도 어려워해서 조수의 도움을 받았다고.이 점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다. Mathematics and War에서 보면 수학을 끔찍이 못했다는 주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7], 진지하지 않은 토론 중에서 나왔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그가 수학에 재능이 있다는 말이 있다.[8] 무엇보다도,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수학을 못했다면 수학적 접근법, 수학적 모델을 이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거 볼 시간에 수학을 익히자



9. Hearts of Iron II에서 덴마크의 핵 기술진으로 나온다. 핵물리학, 원자공학, 수학의 3신기를 모두 갖춘데다 레벨도 8로 상당히 높은 편이지만 정작 덴마크가 베저 훈련 이벤트로 순살당하는지라 쓸 데가 없다... 그나마도 43년에 사라지기 때문에 덴마크가 살아있어도 의미가 없다. 아니 그 전에 덴마크가 핵 개발할 능력이 있는지부터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10. 서양의 근현대 과학자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주역 등의 동양철학에 심취한 사람이다. 상보성 원리는 주역의 음양이론을 양자물리학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라 여긴 모양이다. 게다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태극을 아예 가문의 문장으로서 채택하고는 노벨상 타러 갈 때 옷에 팔괘도까지 그려 넣어 갈 정도였다. 이 링크이 링크를 보면 된다. 심지어 30여년 전의 신문에도 나왔다.

[1] 태극문장 맞다. 아예 문장 정의문이 백색 배경,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된 태극도(Argent, a taijitu Gules and Sable)라고 되어 있다. 모토도 그렇고 자신의 최대 업적 중의 하나인 상보성 원리를 나타내기 위해 고안한 것으로 추측된다.[2] 원자핵 주변을 태양계처럼 전자 입자가 도는 형태. 불확정성 원리를 통해 전자가 원자핵 주위에 '구름'처럼 확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전까지는 원자의 기본 구조로 자리잡았다.[3] Otto Robert Frisch, 리제 마이트너의 조카이고 그녀와 함께 핵분열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4] 교과서에서 원자 모형을 제시한 공로만 나오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잘 모르지만 그 당시나 지금이나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비견할만한 물리학의 거장이다.[5] 정작 파인만 본인은 보어 부자(父子)랑 아이디어를 논의하면서 아니다 싶으면 "그건 바보같은 생각이에요!"라고 말해서 이 위대한 신을 흡족하게 했다고 한다. 흠좀무. 대인배 배틀 보어는 아들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저 친구를 눈여겨 봐 둬라. 내 말에 '네, 네.'밖에 할 줄 모르는 얼간이들은 신경쓰지 말고."[6] 이 문답은 드라마 《카이스트》에도 나온다.[7] "Indeed, one contributor to this summer's newspaper debates in Denmark has ever claimed ... that, in particular, he was extremely bad at mathematics."[8] "He displayed great abilities in mathematics and science.", "During his last two years at school Niels specialised in mathematics and physics."




'주역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역에게 길을 묻다   (0) 2017.09.03
아인슈타인과 주역   (0) 2017.09.03
81수리해설  (0) 2017.08.29
명궁활용법  (0) 2017.05.29
대선주자 사주룰이  (0) 2016.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