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이야기

12지신 - 띠 이야기

코알라 아빠 2016. 7. 3. 14:23

 

쥐띠, 자(子) 

 

쥐는 남극과 뉴질랜드 이외 지구의 전지역에 살고 있는 설치류 동물로서 포유류 가운데 가장 큰 목(Order)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쥐는 집쥐로 원래는 서남아시아 원산이었으나 15~18세기 해양문화의 발달과 함께 전세계로 퍼져나간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 문헌에 쥐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오는 것은 신라 때 사금갑(謝琴匣) 이야기이다. 쥐의 예언으로 거문고 갑 안에 숨어 있던 내통자들을 잡아 나라의 위기를 막았다는 설화이다. 보다 사실적인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혜공왕 때 강원도 치악현에서 8천 마리에 이르는 쥐들이 이동하는 괴변이 있었는데 그해 눈이 내리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김유신 장군 등 능원에 새겨진 12지신상이나 양산 통도사의 12지신상 그림에도 쥐가 등장하고 있다. 고려 때의 것으로는 무덤의 현실내부 벽화나 밀랍으로 된 소형 12지신상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쥐의 생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겸재 정선의 <서투서과>에 수박을 갉아먹는 쥐가 나오고 신사임당도 쥐 그림을 남긴 바 있다. 이밖에도 쥐를 소재로 한 미술품이나 생활용품들이 많으나 대개는 12지신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고 있다. 쥐가 신앙물로 등장한 것은 12지신에 들면서부터이다.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12지신앙에서 쥐는 맨 앞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쥐는 음양오행상 음(陰)과 수성(水性)에 들어 있다. 방위로는 북쪽이고 시간으로는 밤11시에서 새벽1시에 해당한다. 쥐는 다른 설치류처럼 상하의 문치(앞니)에 치근이 없어서 계속 자라나므로 그때마다 무엇인가를 갉아서 닳게 해야만 한다. 꼬리는 몸집에 비해 매우 길고 털이 적고 비늘이 덮여 있어서 병 속으로 집어넣어 기름을 핥아먹기에 알맞도록 되어 있다. 행동이 매우 민첩하고 잔꾀도 많다. 종족끼리는 질서가 분명해 부부침실과 새끼방·화장실과 식량창고 등이 따로 구분되어 있다. 쥐는 화산이나 지진, 또는 홍수나 산불 등 자연재해를 미리 예고해주는 영물로도 알려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쥐가 집안에서 갑자기 보이지 않으면 불길한 징조로 여겼고 어부들은 배 안에 쥐가 보이지 않거나 쥐 울음소리가 들리면 불길하다 하여 출어를 삼갔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지방에서는 배 안에 배서낭을 모시고 쥐들을 살게 하였다고 한다. 어느 부잣집에 쥐가 대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하루는 무너져 내려 그대로 두면 주인네 식구가 모두 죽을 위기였다. 그때 어른 쥐가 나서서 여태껏 자기네들을 잘살게 해준 주인네를 구해주기로 하였다. 그래서 훤한 대낮에 집안에 든 쥐를 모두 마당으로 불러모아 찍찍 소리를 내며 춤추게 했다. 그러자 집안 사람들이 이 괴변을 보러 모두가 밖으로 나왔다. 집이 무너진 것은 그때였다. 이렇게 주인네 식구들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새해들어 첫 상자일(上子日)에는 특히 근신하는 날로 여겨 모든 일을 조심하였다. 특히 이날은 길쌈하거나 의복을 짓지 않았다. 이는 쥐가 무엇이든 잘 쏠기 때문이다. 쥐는 다산(多産)의 상징이다. 그래서 궁중에서는 풍년을 기원하는 뜻으로 상자일에 곡식의 씨를 태워 비단주머니에 넣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상자일에는 쥐불놀이도 행해졌다. 이날 청소년들은 마을 부근의 밭두렁을 태우면서 한해의 건강을 빌고 마을의 풍년을 기원한다. 이때 불기운이 세면 풍년이 든다하여 밤들이 쥐불놀이를 하였다. 쥐는 다복(多福)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당사주에서는 쥐띠를 자천귀(子天貴)라 하여 식복과 함께 다복한 운명을 타고난다고 하였다. 이는 쥐가 선천적으로 눈치빠르고 어려운 여건에서 끈질기게 살아남는 습성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에다 생태적인 해석까지 달아서 밤에 난 쥐띠는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음력 8·9·10월생은 대체적으로 신수가 고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쥐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쥐는 농작물을 해치고 곡식을 훔쳐먹는 해로운 동물이며 더러운 곳에 사는 동물로 인식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도 탐관오리들을 쥐로 묘사하여 노래한 바 있다. 들쥐는 구멍파서 이삭 낟알 숨겨두고 집쥐는 이것저것 안 훔치는 것이 없네. 백성들은 쥐 등쌀에 나날이 초췌하고 기름말라 피말라 뼈골마저 말랐다네. 또 한말의 선비였던 황현의 <매천야록>을 보면 순종 3년(1909년)에 쥐로 인한 전염병이 돌아서 각 항구마다 외국 배들을 검역하였으며 쥐를 잡아오는 사람에게 돈도 3전씩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예로부터 농가에서는 쥐를 내쫓는 풍속이 많았다. 상자일 자시(子時)에 방아를 찧으면 쥐가 없어진다 하여 집집마다 방아소리를 냈다. 쥐주둥이 그스르자 쥐주등이 그스르자며 콩볶아 먹는 풍습도 쥐를 내쫓는 풍속이다. 그러나 쥐의 날이나 동물의 왕인 호랑이의 날에는 쥐가 아무리 많아도 함부로 잡지 않았다. 쥐는 덩치는 작지만 번식력이 왕성하다. 집쥐의 임신기간은 21일, 즉 출산후 몇 시간만 지나면 금방 발정하여 교미한다. 한쌍의 쥐가 한배에 10마리씩 연간 5회새끼를 낳을 경우 3년 뒤에는 3억 5천만 마리로 불어난다는 계산이다.

 

 

소띠, 축(丑)

   

소의 조상은 들소이다. 소는 가축중에서는 비교적 일찍 사람의 손에 의해 길들여진 동물로 정확히 언제부터 인간에 의해 사육되었는지는 모르나, 대개 기원전 3천년 정도로 잡는다. 우리나라는 그보다 늦은 기원전 2천년대로 손꼽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을 보면 고구려의 전신인 부여에서 전쟁이 있을때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규원사화>에도 흰소를 잡아 태백산록에 제사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성계의 조상 이양무의 준경묘에도 아들 이안사가 아버지의 장사를 치를때 소 1백 마리 대신 흰소(白牛)를 잡아 고사지냈다는 전설이 나온다. 임금을 만들어낸 흰소이다. 소를 농사에 직접 이용한것은 꽤 오래되었으나 문헌상으로는 신라 지증왕 3년 <삼국사기> 기록이 최초다. 또 고구려의 안악 고분벽화에는 바퀴가 달린 가마와 여물을 먹고 있는 소 그림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백제에서는 소를 순장(殉葬)했다는 기록도 있다. 소는 그 자체가 재산가치를 가지고 있다. 옛날에는 소가 그리 흔치 않았다. 논이나 밭갈 때 사람이 소를 대신해서 쟁기를 끌었다. 그리고, 일이 많거나 일손이 부족할 때는 소있는 집에서 빌려서 부렸다. 소를 빌리는 값은 사람품값의 보통 다섯배였다. 옛날 함경도와 강원도 일부에서는 나경(裸耕)이라는 특이한 풍속이 있었다. 나경은 정월 대보름날 성기가 큰 총각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목우(木牛)나 토우(土牛)를 몰고 밭갈며 그해 풍년을 기원하는 민속이었다. 예로부터 땅은 풍요의 여신이요, 쟁기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였다. 그래서 쟁기질하는 것은 땅과의 성행위이며 이는 다산(多産)을 의미하였다. 다산은 부락의 안녕과 풍년을 가져다주는 근본이다. 소는 부(副)와 풍요의 근본으로서 소를 위하고 숭상해야 집안의 번창과 마을의 안녕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 민족은 소를 가축으로서보다 가족처럼 생각해 왔고 그러한 순박한 심성은 소를 위한 많은 민속들로 구현되기도 했다. 충청도 일부지역에서는 송아지가 태어나면 사람이 아기를 낳을때처럼 부정타지 말라고 대문에 금줄을 치기도 한다. 어미소가 해산했을때는 쇠죽에다 미역국을 말아주기도 한다. 소는 십이지 가운데 두번째 동물로 축(丑)이라고 하며 축이 나타내는 시간은 새벽1시부터 3시사이이며 달로는 음력 12월에 해당한다. 새해들어 처음 맞는 축일(上丑日)을 소의 날이라 하여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음은 물론이요, 쇠죽에 콩을 많이 넣어 영양을 도우며 이날은 도마질도 삼갔다. 이날 농기구를 만지면 쟁기의 보습이 부러지고 방아를 찧으면 소가 병에 걸린다고도 했다. 또 풍년을 점치는 민속의 하나로 소에게 밥과 나물을 주는데 밥을 먼저 먹으면 그해 풍년이 든다고 했다.

 

 

호랑이띠, 인(寅)

 

호랑이는 사신(四神, 청룡·백호·주작·현무) 중 유일한 실제동물이다. 특히 속담·민담·민화를 비롯하여 문학작품에까지 호랑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옛부터 우리나라에는 호랑이가 많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우리나라를 호담지국(虎談之國)이라고까지 불렀고 중국 문헌 《후한서》동이전에도 호랑이를 신으로 받들어 제사지내는 나라라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 문헌상에 처음 호랑이가 나타난 것은 《삼국사기》이다. 신라 헌강왕조에 호랑이가 궁궐에 나타났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삼국유사》단군신화에도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도록 환웅에게 빌어 곰은 쑥과 마늘을 먹고 신의 계율을 지켜 사람이 되고, 호랑이는 그러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는 과부 호랑이가 혼자 산을 지키고 있다가 성골장군을 위기에서 구해주고 그에게 청혼하여 자식을 낳고 살았다는 설화가 들어 있다. 정초에 호랑이 그림을 대문에 내다붙이거나 부적에 그려넣기도 하고 조정에서는 쑥범(쑥으로 만든 범)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무관의 관복에 용맹의 표상으로 호랑이 흉배를 달아주기도 했다. 글 하는 선비들도 필통이나 베개 등에 즐겨 호랑이를 새겨넣었다. 자식의 입신양명을 위해 산방(産房)에 호랑이 그림을 붙여놓기도 하고 기가 약한 사람에게 호랑이 뼈를 갈아 먹이는 한방요법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장가갈 때 새 신랑이 호신장구로서 장도(粧刀)나 주머니에 호랑이 발톱을 달거나 허리에 찼다. 호랑이의 가죽과 수염도 신령한 힘이 있다 하여 호신물로 차고 다녔다. 여인네 장신구나 장식품에도 호랑이를 새겨넣기도 했다. 심지어 무덤 주위에까지 능호석(陵護石)으로 세워 망자의 명복을 빌기도 했다. 호랑이는 인(寅)이라 하며 가리키는 시간은 새벽3시부터 5시 사이이고 음력 1월에 해당한다.

 

 

토끼띠, 묘(卯)

 

용왕의 딸이 몹쓸 병에 걸렸다. 토끼의 간이 명약이라 하여, 용왕은 만조백관을 불러 뭍에 사는 토끼의 간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를 논의한다. 그 끝에 자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뭍으로 나온다. 자라는 감언이설로 토끼를 유혹하여 이윽고 용궁으로 데리고 들어온다. 토끼는 물 속으로 들어와서야 자기가 속았다는, 뿐만 아니라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아채린다. 그러나 꾀많은 토끼는 자기의 간을 노리는 자들이 많아서 평소에 늘 숨겨놓고 다닌다고 거짓말하여 위기에서 벗어나 뭍으로 돌아온다. 우리의 대표적 판소리계 고전인 <토끼전>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구토설화(龜兎設話)를 제재로 한 우화소설이다. 구토설화의 근원이 된 《삼국사기》김유신 열전을 보면 김춘추가 백제에 복수하려고 고구려로 청병갔다가 오히려 고구려 옛땅을 반환해달라는 요구를 받고 붙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때 김춘추는 고구려를 탈출하기 위해 고구려 신하 선도해(先道解)에게 술대접을 해주었다. 구토설화는 그때 술취한 선도해가 김춘추에게 들려준 <토끼와 거북이>이야기였다. 김춘추는 거기서 토끼의 지혜를 얻어 고구려를 탈출해 나왔다. 구토지설은 그후 토끼전, 별주부전 등의 제목을 달고 세상으로 퍼진다. 판소리에서는 수궁가로 불린다. 우리 조상들은 토끼가 주는 순결함과 평화로움 때문에 일찍이 토끼를 이상향에 사는 동물로 만들어 놓았다. 옛 사람들은 달을 늘 이상향으로 그렸고 그 이상향에는 계수나무와 함께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다고 했다. 우리의 전통 민속화에서 해(日)는 곧잘 발이 셋 달린 까마귀로 표현되고, 달(月)은 토끼로 표현된다. 토끼는 달 없이는 못 산다. 그래서 암토끼는 수컷이 없어도 달과 교합하여 새끼를 낳는다고 했다. 토끼가 어두운 밤 달나라에서 방아찧을 수 있는 것은 눈이 그만큼 밝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끼눈을 명시(明視)라고 하였다. 토끼는 묘(卯)인데 음력으로는 2월 시간으로는 오전 5시부터 7시 사이를 가리킨다. 음력 2월은 농사가 시작되는 달이고 묘시는 농부들이 논밭으로 나가는 시간이니 토끼는 성장과 풍요를 상징하게 된 것이다. 상묘일(上卯日)은 토끼날이다. 이날을 특히 톳날구기라고 하여 남의 여자가 자기 집에 와서 오줌누면 좋지 않다 하여 여자들은 바깥 나들이를 삼가했으며 아침에 남자가 대문을 열어야 일년내내 집안이 편안하다고 했다. 토끼날 실을 짜거나 옷을 지으면 무병장수한다고 하였다. 토끼는 깨끗하고 귀여운 이미지로 인해 특히 공예품에 많이 그려지고 새겨졌다. 국보 제95호 청자칠보투각향로의 받침도 토끼상이고 연적으로도 토끼상을 많이 쓰고 있다. 토끼꿈은 두 가지고 해몽된다. 토끼는 앞발이 짧아서 오르막을 잘 올라간다. 그래서 토끼꿈은 승진을 의미한다. 그러나 토끼의 입은 윗입술이 세로로 찢어져 있어서 태몽으로 꾸면 언청이 자식을 낳는다고 했다. 악몽을 꾸었을 때는 소금을 대문간에 집어넣거나 문밖에다 세 번 뿌린다. 토끼는 민담만큼이나 속담에도 많이 등장한다. 토끼잠이란 토끼처럼 깊이 잠들지 못하고 아무데서나 잠깐 눈을 붙이고 자는 잠을 말한다. 토끼가 제 방귀에 놀란다는 속담도 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말도 있다. 이는 토끼를 다 잡으면 사냥개를 삶아먹는다는 중국의 고사성어다. 즉 필요할때는 소중히 여기다가도 그 일이 끝나면 천대하거나 없애버린다는 뜻이다.

 

 

용띠, 진(辰)

 
우리 문헌에 나오는 용의 기록은 그 역사가 꽤나 깊다. 용의 순수한 우리 이름은 미르(훈몽자회) 또는 미리(아언각비)다. 현재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용은 그 출생지가 약간씩 다르다. 인도에서 온 불교적인 용, 중국의 도교나 유교에서 온 용, 본래 이 땅에 있던 순수 토종 용 등이다. 그 역할을 뭉뚱그려보면 예시예언자·수신(水神)·호국·호법(護法)등 크게 네 가지이다.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 탈해왕은 용의 자식으로 인간세상에 내려온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또 견휜의 설화에서처럼 나라의 창건과 관련된 설화도 용의 예언예시자적 역할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고려사》에는 서해 용왕이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에게 먼 훗날 아들이 왕이 될 것을 예언한 것으로 나와 있다. 고대소설 홍길동에도 아버지 홍 판서의 꿈에 청룡이 나타나서 홍길동의 탄생을 점지해주고 있다. 수신으로서의 용은 자연현상을 마음대로 조화부리는 존재로 신격화되었다. 진평왕 때는 용 그림을 그려놓고 비를 기다리는 화룡제를 지냈으며 고려 헌종은 흙으로 용의 형상을 만들어 토룡제를 지냈다. 또, 조선시대에는 오해와 오강을 정하여 용신제를 지냈다는 기록도 보인다. 성호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용이 싸우면 비가 내리고 독룡이 놀라면 벼락치고 용이 화가 나면 홍수난다라는 부분이 있다. 토속신앙에서는 용왕에게 제사지내며 풍어를 기원하기도 했다. 민간설화에도 용왕·용궁이 많이 등장한다. 용은 호국의 상징이기도 했다. 《삼국유사》에는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의 항복을 받아 국태민안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그 탑을 세운 후 머지않아 삼국이 통일되었다. 신라 원성왕 때는 당나라 사신이 동해용과 청지용·분황사 용을 고기를 만들어 주머니에 넣어가려던 것을 되찾았다는 기록도 있다. 용은 불교를 보호하고 번창시키는 호법의 화신으로 보다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불교의 유입과 함께 인도문물이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아직 신격화되지 않았던 중국의 용은 인도의 사신(蛇神)숭배 사상을 빌어 비로소 신격화되었다. 용은 신격화와 함께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승격되어 팔부신 중의 하나가 되었다. 용을 임금에 비유한다. 고려가요인 <쌍화점>을 보면 우물가의 처녀가 용에게 손목을 잡힌 이야기가 나오는데 즉 우물의 용이 바로 임금이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역성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한 <용비어천가>에 태조 이성계를 포함한 웃대 선조들이 모두 용으로 표현되어 있다. 예컨대 용안(龍顔)· 곤룡포(崑龍袍)·용상(龍床)·용좌(龍座)·용가(龍駕)·용거(龍車)·용덕(龍德) 등의 단어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새해들어 첫 진일(辰日)을 용의 날이라 하는데 이날은 하늘에 있는 용이 지상으로 내려와 우물속에 알을 낳는다. 이 물을 길어다 밥을 지으면 그 해에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맨 먼저 물을 길러간 이는 그 표시로 우물에 지푸라기를 걸쳐놓는다. 집안 우물이든 공동우물이든 용날 하루 전에는 용이 알을 낳을 수 있도록 우물 주변을 청소하였다. 기우제나 기자의식 때에는 반드시 용의 강림을 받았다. 신라때는 삿된 것을 내쫓기 위해 대문간에다 용의 아들인 처용 그림을 그려 붙였다. 심지어 저승으로 가는 상여에도 용은 망자의 명복을 빌며 따라간다. 우리 속담에는 용에 관한 것이 유난히 많다.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은 변변찮은 집안에서 인물이 났다는 이야기이고 길 닦아놓으니 용천배기 지랄한다는 말은 공들여 놓은 일이 보람없이 일그러졌을 때 하는 이야기다. 또한 용 못된 이무기는 심술만 남아 남의 일에 훼방놓는 심술꾸러기를 가르키는 이야기다. 용이 물 밖에 나니 개미새끼까지 까불싹댄다는 말은 잘난 사람이 한번 실패해서 기가 죽으니 하찮은 것들이 함부로 한다는 말이다. 놀라운 상상의 동물인 용은 십이지의 다섯 번째 동물로 진(辰)이라고 한다. 진(辰)이라는 글자는 용의 특징을 그대로 닮아 힘차게 기상하는 모양이다. 진은 시간으로는 오전 7시에서 9시 사이 달로는 음력 3월에 해당한다.

 

 

뱀띠, 사(巳)

 
원래 뱀은 용과 함께 인간의 신앙적 숭배 동물이었다. 12수호신으로 보면 여섯번째로서 용(辰) 다음이 뱀(巳)이다. 사(巳)에는 식물이 싹이 터서 한참 자란 시기라는 뜻이 담겨 있다. 달로는 식물이 한창 자라는 때인 음력 4월을 가리키고 시간은 오전 9시에서 11시사이를 말한다. 뱀은 영특한 동물이고 사람에게 먼저 해를 끼치지 않는다. 뱀은 용과 함께 영험한 힘을 가진 것으로 되어 있어 죽이거나 잡아먹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조선조까지도 뱀을 먹는 풍습은 없었다. 뱀의 쓸개가 눈을 밝게 한다는 말이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있기는 하나 정력에 좋다는 속설은 뱀장수들이 만들어낸 허설이라고 한다. 뱀의 독은 맹독으로 한 마리가 가진 독으로 수십 명을 죽일 수 있다. 특히 뱀탕을 끓였을 때 뜨는 뱀기름은 남성의 성기능을 해친다고 한다. 뱀을 생식한다든가 구워서 먹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몸에 좋지 않다. 독성이 걸러지지 않은 상태로 몸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항간에는 뱀을 먹어 정력이 솟아나 회춘했다는 사람이 있으나 사실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몸이 늙어 말을 듣지 않을 경우 몸 속에 독을 넣어 흔들어대는 것과 같다. 간혹 죽음 직전의 폐병 환자가 뱀을 고아먹는 경우는 있었다. 그것은 이왕 죽을 사람이므로 마지막 죽기살기식의 독용법(毒用法)인 셈이다. 의학적으로 동종요법이라는 것이다. 이는 독을 조금씩 써서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때 쓰는 독은 아주 적은 양이다. 이열치열(以熱治熱)하듯 한의학에서는 이를 독으로써 독을 다스린다는 비술(秘術)로 쓰고 있다. 이 때의 약용은 살모사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뱀을 업구렁이라 해서 신성시하였다. 구렁이가 집에서 서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재물을 내려준다 해서 길조로 여겼다. 물론 죽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업구렁이가 집에서 나갈까 보아 걱정을 하면서 잘 모셨다. 따라서 구렁이라 부르지도 않고 지킴 또는 지킴님이라고 높여 불렀다. 구렁이라 부르는 것은 금기(禁忌)였던 것이다. 이건(李建)의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에 보면 풀이 무성하고 습기가 많을 때는 뱀이 규방이나 처마, 마루 밑, 자리 아래 어디서나 기어들어와 잠잘 때 피하기가 어렵다. 섬 사람들은 뱀을 보면 부군신령(府君神靈)이라 하여 쌀과 맑은 물과 술을 뿌리면서 빌고 죽이지를 않았으며 만일 뱀을 죽이면 재앙이 내려 발굼치도 움직이지 못하고 죽는다고 알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뱀은 중국에서도 신으로 모셨다. 복희씨와 여와씨(女窩氏)는 뱀 몸뚱이에 사람의 얼굴이 달린 형상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물의 신(河神)의 모습도 뱀이라고 믿었다. 일본인들도 뱀 자체를 시조신으로 여긴다. 일본을 건국한 천조대신(天照大神)의 동생 소전명존(素箋鳴尊)은 머리가 여덟 달린 뱀의 몸에서 칼을 꺼내 나라를 지키는 보검으로 삼았다. 이것이 일본 3대 국보의 하나로 전해지고 있는 천총운검(天叢雲劒)이다. 희랍신화의 최초 인간은 케크로스라는 뱀이고 헤브라이신화의 첫여자 에와도 뱀이었다. 에와와 뱀은 같이 어울릴 수 있었고 성행위를 하는 관계였다. 이는 창세기에 기록된 뱀과 이브의 어울림에서 알 수 있다. 즉 태초의 뱀은 서서 다녔고 잘 생겼고 지혜로왔으며 이브와 함께 놀 수 있는 상대였다. 그것은 반대로 말해 이브와 뱀이 한 종족이었다는 반증이 된다. 고구려의 천왕지신총 벽화에는 인두사신상(人頭蛇神像)이 있고 삼실총 벽화 중 교사도(交蛇圖) 가운데도 뱀이 지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신라의 미추왕릉이나 노동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우에도 뱀은 역시 신성한 존재로 새겨져 있다. 뱀이 나쁜 의미로 인식된 것은 나쁜 역할을 도맡아 한 희랍 신화 속의 메두사가 대표적인 존재일 것이다. 뱀은 우리 나라 설화 속에서도 주로 인간을 해치려는 사악한 존재로 묘사됐었다. 강원도 치악산에 있는 상원사(上阮寺)의 연기설화(緣起說話)가 그러한 예의 하나일 것이다. 가난하지만 선한 나무꾼이 살았다. 그는 나무를 해먹고 사는 처지라 늘 산을 오르내리게 되었다. 산이 그의 친구였고 산짐승 또한 그의 친구였다. 그는 약육강식이 횡횡하는 산에서 늘 약하고 불쌍한 짐승들의 편이 되었다. 어느날 그는 꿩 부부가 뱀의 공격에 처한 상황을 보게 되었다. 뱀은 꿩의 새끼를 잡아 먹으려 했던 것이다. 그는 어린 껴병이를 지키려는 꿩의 모성애에 감탄하여 작대기로 뱀을 때렸다. 단 한번뿐이었는데 뱀은 급소를 맞아 죽어 버렸다. 그러던 다음날 나무꾼은 나무를 팔고 돌아오다 고갯길에서 밤을 맞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 그는 불빛이 비치는 집을 찾게 되고 하루 저녁 쉬어가기를 청했다. 주인 여자는 살갑게도 따뜻한 저녁과 술로 주린 나무꾼의 배를 채워 주었다. 술에 취한 나무꾼은 여인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술기운에도 목이 눌리는 것을 깨달은 나무꾼은 있는 힘을 다해 팔을 뻗었다. 놀랍게도 몸을 칭칭 감은 뱀이 입을 벌려 그를 잡아 먹으려 하고 있었다. 이 뱀은 어제 죽은 뱀의 신부뱀으로서 복수하기 위해 여인으로 변신했던 것이다. 그러니 나무꾼은 공연히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꼼짝없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였다. 갑자기 종소리가 들렸다. 땡땡땡땡 자지러지게 우는 종소리에 뱀이 놀라 숨어버리는 바람에 나무꾼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나무꾼은 자신을 구해준 종을 찾아가 보았다. 그곳에는 전날 나무꾼이 살려준 꿩 부부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그를 살려주기 위해 몸으로 보은을 한 것이다. 그 터가 상서롭다 하여 절을 세웠는데 그 절 이름이 바로 상원사이다. <용재총화>에는 한 승려가 죽어 뱀이 된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진광사(晉光寺)의 승려가 시골 여인을 아내로 삼고 몰래 밤마다 출입하다가 죽었다. 죽은 중은 아내를 못잊어 뱀으로 환생하여 낮에는 독 속에 숨어있다가 밤이면 아내와 동침하였다. 이 사실을 안 마을의 사또가 뱀을 궤짝에 넣어 물에 띄워버렸다는 내용이다. 이밖에도 절에서는 탐욕하거나 게으른 중이 뱀으로 환생하여 절 근처에 살면서 다른 중의 본보기가 된다는 전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이 외에도 뱀이 사람을 해치려고 했다는 설화는 꽤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선악의 이분법처럼 좋은 뱀에 대해 나쁜 뱀의 대칭으로 쓰여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뱀이 나쁘게 인식된 것은 남근의 상징으로 또는 남의 여인을 범하는 상사뱀 전설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뱀은 떠돌아 다니는 남성 즉 한량아로 비유된다. 정숙한 부인들을 유혹하는 애욕 그 자체인 것이다. 죽은 사람의 혼으로 태어나는 상사뱀은 자기의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 사모했던 여인을 노리게 된다. 가지밭에 숨어 가지로 둔갑하거나 오이밭에선 오이로고추밭과 무밭에서는 고추와 무로 변신하고 있다가 사모했던 여인이 밭으로 들어오면 재빨리 여인의 음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한번 들어간 뱀은 절대로 바깥으로 나오지 않고 평생 그 여인의 신랑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연유로 색시를 빼앗긴 남성들에게는 뱀은 철천지 원수가 되고 그러한 상사뱀으로 인해 뱀 자체에 대한 나쁜 인식이 심어지게 된다. 상사뱀 설화는 대체로 불교적인 교훈을 말할 때 뱀은 애욕의 화신이라는 관점으로 인용된데서 비롯한다. <법화경>은 뱀의 길다란 형태와 삼각형 머리를 남근의 형태나 성적 기교로 해석해 애욕의 뿌리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애욕과 성희에 대한 근원적 생각은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빨래하러 갔던 여인의 가랑이 사이로 물 속에서 갑자기 솟구친 뱀이 뛰어들었다거나, 동동 떠내려오는 뱀알을 주워먹고 잉태를 했다는 옛날 이야기는 아이의 신비한 출생으로 간혹 미화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뱀은 남성 상징이라는 이야긴데 외로운 여인에게 뱀은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었음직하다. 뱀에 얽힌 이야기는 민간에 많이 전한다. 어느 농부가 논두렁을 자꾸만 뚫는 뱀을 삽으로 찍어 죽인 다음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무럭무럭 잘 자라다가 담이 무너져 깔려 죽었다. 아이가 죽은 땅을 파 보았더니 토막난 뱀의 시체가 있었다는 이야기로부터, 뱀을 죽이려면 완전히 죽여야지 반만 죽이면 살아나서 그 집 간장독에 들어가 멱을 감는다는 이야기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뱀서방 설화> 하나를 덧붙이는 것으로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자. 이 설화는 <맹진사댁 경사> 즉 <시집가는 날>의 근원으로 현대 문학에 변용되어 나타난다. 어느 마을에 아기를 못낳는 부인이 있었다. 남편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씨를 내리지 못하니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였다. 그래서 이 부인은 정안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빌어도 보고 산 속 깊은 곳을 찾아가 바위 치성도 드려보았으나 잉태의 소망은 별바라기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세월도 흘러 부인의 나이 어느덧 오십, 손자는커녕 자식도 없으면서 동네 사람들로부터 할머니 취급을 받았다. 희망을 잃고 한숨을 쉬며 빨래를 하기 위해 개울로 나간 부인은 위쪽에서 동동 떠내려오는 오이 하나를 발견하곤 팔자타령을 하며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조화이랴. 그날 이후로 이 부인에겐 태기가 있어 열 달 후에 아기를 낳았으니 참으로 반갑고 기적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아기를 본 부인은 기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샅 부분까지는 분명히 사람인데 그것도 아주 잘 생긴 사람인데 두 다리가 뱀이 아닌가. 징그러운 뱀이 고추 아래로 길게 붙어있는 것이다. 부인은 운명으로 여겼다. 이런 자식일망정 아들을 점지해 준 삼신할머니께 감사한 마음까지 가졌다. 정성으로 키웠다. 머리도 좋았고 건강하였으며 부모님께 효성하는 마음 또한 지극하였다. 어느덧 이 뱀아이는 열 여섯 살 총각이 되었다. 뱀총각은 장가를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자신의 하체가 뱀이니 어떤 처녀가 시집을 올 것인가. 이때 이웃집에 딸 셋이 있었는데 첫째와 둘째는 혼인 이야기가 나오자 기겁을 하며 차라리 처녀로 늙어 죽었으면 죽었지 뱀과는 결혼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셋째딸은 그것이 운명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하면서 뱀총각을 동정하는 마음에서 결혼을 하겠다고 하였다. 뱀총각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드디어 혼인식을 올리고 첫날밤이 되었다. 뱀과 동침할 시간이 된 것이다. 셋째딸 색시는 불안한 마음을 겨우 억누르며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또한 어찌된 일인가. 뱀신랑은 스르르 허물을 벗더니 멀쩡하고 잘 생긴 남자로 바뀌는 게 아닌가. 꿀같은 밤이 지났다. 아침이 되니 신랑은 다시 뱀으로 변했다. 낮에는 뱀이요 밤에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비밀을 아는 색시는 남들의 숙덕숙덕에 아랑곳없이 행복하기만 했다. 신랑은 과거의 업(業)과 인연을 이야기했다. 전생의 업보가 다하여 결혼 100일이 지난 날 뱀신랑은 완연한 사람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행복한 부부가 되자 큰언니 둘째언니는 시샘이 발동했다. 이제 완전한 사람으로 돌아온 신랑이 과거길에 나서자 막내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중 깊은 비밀 하나를 캐냈다. 뱀신랑은 마지막으로 허물을 벗던 날 뱀허물을 아내에게 주면서 앞으로 삼 년 동안 절대로 남에게 보여서는 안된다는 당부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언니들의 꾐에 빠진 순진한 색시는 이 비밀을 언니들에게 말해버린 것이다. 막내가 밭에 나간 틈을 타서 언니 둘은 이 뱀허물을 찾아내어 불에 태워 버렸다. 어떻게 됐을까? 허물을 잃어버린 신랑은 영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색시는 울며불며 후회했지만 한번 엎질러진 물을 어이할 것인가. 색시는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죄의식으로 날이면 날마다 하늘에 빌고 땅에게 속죄했지만 한번 떠난 남편은 깜깜 무소식이었다. 색시는 결심했다. 남편을 찾아 나선 것이다. 갖가지 고통과 시험을 거친 어느날 색시는 드디어 남편의 소재를 알아냈다. 천길 땅속 깊은 곳 지하국에 남편이 살고 있다고 하여 찾아가니 과연 남편은 그곳에서 세 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아들 딸도 여러명 있었다. 물론 변신하는 뱀이었다. 색시는 현재의 세 부인에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남편을 되돌려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이게 어디 될 말인가. 세 부인들은 오히려 색시를 미친년 취급하며 당장 여기를 떠나라고 호통을 쳤다. 그래서 색시는 남편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함께 돌아가자고 빌었다. 그러나 남편은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자기도 어쩔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때 지하국 임금이 그간의 사정을 듣고는 우선 야단을 친 다음에 어려운 시험 세가지를 통과하면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겠다고 허락했다. 색시는 호랑이 수염 뽑기 등 세 가지 어려운 관문을 가까스로 통과했다. 이리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온 뱀서방 내외는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말띠, 오(午)

 
인류가 지상에 나타났을 때 말의 조상은 이미 사라지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쪽에 조금 남아 있었는데 오늘날 가축화된 말의 시조는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던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 광주와 경북 문경지방에서 석기시대 말의 치아가 발견되긴 했으나 말이 가축으로 길러진 것은 청동기시대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토종말은 제주도 조랑말로서 비록 체구는 작지만 강인한 체질이며 순하고 영리하다. 토종말 외에도 고려시대에는 몽고가 한동안 제주도에서 말을 사육하여 군마로 쓰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김만일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 말의 좋은 혈통을 보존키 위해 우수한 숫말의 귀를 잘라 표시하거나 한쪽 눈을 보지 못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 문헌에 말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이다. 신라의 박혁거세 탄생설화를 보면 백마(白馬)의 울음소리를 듣고 가보니 백마가 알을 품고 있다가 승천하면서 큰 알을 하나 두고 갔는데 그 알에서 박혁거세가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도 후백제의 견훤 탄생설화 등 신성한 탄생을 주제로 한 설화에는 백마가 곧잘 등장한다. 여기서 말은 지상과 천상을 이어주는 신령스러운 교촌자 역할을 맡고 있다. 말은 십이지 동물 가운데 조류인 닭과 상상의 동물인 용과 함께 하늘을 날 수 있는 신성한 서수(瑞獸)로 그려졌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신라 고분인 천마총 벽화이다. 벽화의 주인공은 날개 달린 천마(天馬)다. 천마는 지상에서 이룰 수 없는 희구(希求)를 담고 있다. 천마는 하늘의 옥황상제가 타고 다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상의 말에 날개를 달아 천상을 날게 한 상상은 우리 민족의 말에 대한 신앙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소나 돼지, 심지어 개고기까지 먹으면서도 말고기는 먹지 않았으며 말이 죽으면 따로 무덤까지 만들어 주었다. 경기도 파주 윤관 장군 묘역을 비롯하여 전국 여러 곳에 말 무덤이 있다. 말은 십이지 동물 가운데 용호과 함께 튼튼한 육체와 활기 넘치는 정력의 화신으로서 희망과 밝은 미래를 약속해주는 존재로도 자리잡았다. 속담에 말 가는데 소도 간다는 말이 있듯이 말은 우두머리요, 지도자요, 선구자를 상징한다. 실제로 우리의 민속놀이인 윷놀이에서도 말은 으뜸이다. 도는 돼지, 개는 개, 윷은 소를 상징하고 가장 점수가 많은 모는 말을 상징한다. 즉 단순한 뜀박질이 아니라 말은 힘과 능력을 의미한다. 그래서 옛날 사대부 집안에서는 자손들의 출세가도를 위해 높은 기상과 청정함을 상징하는 백말 그림을 걸어놓았다. 부부의 인연을 맺는 혼례에서도 말은 빠질 수 없는 동물이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에도 혼례를 치르는 신랑이 백말을 타고 신부집으로 가고 있다. 정조가 한 가난한 신랑이 돈이 없어 혼례를 못 치르는 딱한 사정을 알고 말 한 필을 하사하여 혼례시켰다는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말은 또한 신의(信義)의 상징이다. 즉 나라 사이의 공물에서 빠진 적이 없는데, 두 나라 사이의 신의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단군왕검의 아들이 중국의 우왕에게 홍수를 다스리는 법을 전수할 때에도 그 신의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맹세로 우왕이 백마 피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전 《홍길동》에도 도적들이 홍길동을 우두머리로 받드는 과정에서 백마 피를 올려 충성을 맹세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렇듯 동물 중에 말을 상수(上水)로 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말에 대한 신앙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토속신앙인 무당의 굿거리에는 군마대왕(軍馬大王)이 등장하는데 이는 곧 힘을 다스리는 무신(武神)이다. 그래서 당골들은 제단에 짚이나 나무로 말 모양을 만들어 올려놓고 있다. 그런가 하면 말은 서낭신이 타고 다니는 승용차이며 호랑이를 퇴치하는 사냥마이기도 했다. 남해안 충무지방이나 서산지방의 당집에서 흔히 본다. 그 중에서 발가락이 하나 없는 것은 다른 말과의 차별성 때문이 아닌가 한다. 말은 양(陽)을 상징하는 동물로 일찌기 알려져 왔다. 태양이 가장 높이 떠 양기가 가장 충만했을 때를 정오라고 한다. 왕성한 에너지와 정열적인 활동 역시 말의 몫이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적 가부장 사회에서는 일찌기 말을 남성적 동물로 여겨 왔다. 새해 들어 첫 오일(午日)을 말의 날이라 하여 말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였다. 상오일에는 장을 담그면 좋다고 했다.

 

 

양띠, 미(未)

 

羊의 글자 모양을 파자하면 아름다움(美)·착함(善)의 뜻과도 통한다. 이와같이 실제로 양은 성질이 온순한 초식동물이다. 좀처럼 싸우지 않는 평화의 동물이며 뜻을 모아 사는 군집동물이다. 무리끼리 싸우지 않고 욕심도 부리지 않는다. 또 양의 무릎은 털이 없고 굳은 살로 되어있다. 습생상 무릎을 꿇고 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을 옛사람들은 양도 무릎을 꿇고 어미 은혜를 안다고 하였다. 즉 양은 은혜의 동물로 인식되어 왔다. 전남 백양사(白羊寺)에는 어느 고승이 법화경을 독송하자 많은 백양들이 내려와 무릎꿇고 법문을 듣고 산으로 올라갔다고 하여 이름을 백양사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다. 여기에서 양은 수행자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정초에 즐기는 윷놀이에도 양이 나온다. 걸이 곧 양이다. 걸도 큰살이라는 속담에서 보듯이 양처럼 의롭게 한걸음씩 전진하는 것을 옛 사람들은 덕으로 여겼다. 뿐만 아니라 양은 순한 동물이기에 양띠 해에는 딸을 낳아도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구박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양 대신 염소를 기르고 있어서 염소의 수염난 모습을 흔히 할아버지에 비유하여 인자하고 덕이 있는 동물로 여겨져 왔다. 흔히 아이를 낳으면 띠를 보고 앞날을 점친다. 쥐띠는 평생 의식주 걱정이 없으며 닭띠는 무엇이든 파헤치는 습성이 있어 액이 많다는 식이다. 양띠는 성질이 순박해서 참을성이 있고 가정의 화평을 도모한다. 첫번째 상미일(上未日)은 염소날이다. 염소는 순하기 때문에 이날은 무슨 일을 해도 장애가 생기지 않는다. 제주도 등 일부 어촌에서는 이날 보약을 먹으면 효능이 없다 하여 삼가했다. 양은 정력보강재로 쓰이며 특히 여자에게 좋아 여자들의 보신탕으로 많이 쓰인다. 또 우유에 비해 영양이 풍부해서 염소젖으로 우유를 대신하기도 했다. 한국인의 양에 대한 이미지는 모두 엇비슷하다. 순하고 어질고 착하며 참을성있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양은 무릎을 꿇고 어미의 젖을 빠는 모습에서 과거부터 은혜를 아는 동물로 받아들여져 왔다. 또 늙은 아비 양에게 젖을 빨리며 노후를 봉양하는 모습에서 효(孝)를 상징해 왔다. 양은 성격이 순박하고 온화하여 좀체로 싸우는 일이 없다. 겁먹은 듯한 순한 눈망울과 복슬복슬한 털에 덮인 양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평화와 안락이다. 양은 무리를 지어 군집(群集) 생활을 하면서도 동료간의 우위다툼이나 암컷을 독차지 하려는 욕심도 갖지 않는다. 또한 양은 반드시 가던 길로 되돌아오는 고지식한 습성도 있다. 때문에 양은 정직과 정의의 상징이었다. 우리 속담에 양띠는 부자가 못된다라는 말이 있다. 양띠 사람은 양처럼 정직하고 정의로워서 부정을 참지 못하고 너무 맑아서 부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양은 일단 성이 나면 참지 못하는 다혈질이기도 하다. 삼국시대 이후 양은 능묘의 호석(護石), 고분벽화, 석탑, 석관(石棺), 부도(附圖), 동경(銅鏡), 기타 금속공예품 등에서 12 지신의 여덟 번째 동물로 기록돼 있다. 오후 1~3시, 음력 6월을 지키는 시간신(時間神)이며 방향으로는 남남서를 지키는 방위신(防位神)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우리의 옛 조각이나 그림에서 양을 그린 작품은 드물다. 그러나 일단 우리 앞에 나타난 양의 모습은 위기를 만나도 당황하지 않으며 여유와 멋을 느끼게 하는 평화와 정(情)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다. 양을 그린 그림으로는 고려시대 공민왕(恭愍王)의 2양(二羊)과 작자 미상의 산양(山羊)이 있고 도자기로는 원주 법천리 고분에서 출토된 청자양(靑瓷羊) 등이 있다. 조선시대 양 그림 가운데서는 단계(丹溪) 사람 황초평의 설화와 관련된 금화편양도(金華鞭羊圖)가 가장 유명하다. 15세 때 양을 치러 나갔다가 신선에게 이끌려 40여년간 집을 잊고 살았던 황초평의 이야기를 담은 것인데 채찍을 든 소년과 뒤를 따르는 흰 양들의 무리가 그려져 있다. 양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꽤 오래된 것 같다. 삼한(三韓)시대에 양을 식용으로 썼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고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법왕(法王) 1년(599년) 7월에 백제에서 낙타 한 마리, 나귀 한 마리, 양 두 마리, 흰꿩 한 마리를, 헌덕왕(憲德王) 12년(820년)에는 신라에서 검은 숫양 두 마리, 흰양 네 마리, 산양 두 마리, 거위 한 마리를 보냈다는 내용도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양이 그리 흔하지 않았던 탓에 국가간 외교에서 중요한 공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정종(靖宗) 때 개성 근처에서 왕실의 식용으로 양을 사육했으나 사료가 많이 들어 섬으로 귀양보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문헌비고(文獻備考)에도 양에 대한 기록이 있다. 현종(顯宗) 9년(1018년) 2월에 경목감(京牧監)에서 양이 새끼를 낳았는데 그 중에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놈이 있었다. 의종(毅宗) 23년(1169년) 7월에는 금(金)나라에서 2000마리의 양을 보내왔는데 그 중에 한 마리는 뿔이 네 개였다 등의 기록이 보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식육(食肉)은 두말할 것도 없이 소고기이다. 하지만 고려 말 양고기를 으뜸으로 삼는 몽골족이 들어옴으로써 우리나라에도 비로소 양 요리가 들어온다. 중국의 요리법이 적혀 있는 거가필용(居家必用)의 양 요리법이 전수됐고 거가필용에 적힌 식재료 양은 우리나라에서 소, 돼지, 개 등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에서 면양(緬羊) 사육은 고려 때 금나라에서 들어오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뒤 조정에서 양을 제사용으로 중시여겨 조선시대에는 양장(羊場)을 설치하여 사육까지 하였으나 풍토병 등으로 사육 성적이 좋지 않았으며 더욱이 산업용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새해 들어 첫 양날을 상미일(上未日)이라고 한다. 첫 양날에 특기할 만한 민속은 찾기 힘드나 전라남도 지방에서는 양이 방정맞고 경솔하다 하여 일부 해안지방에서 출항을 삼가는 곳도 있다. 경거망동하면 바다에 나가 해난(海難)을 만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는 미불복약(未不服藥)이라 하여 환자라도 이날은 약효가 없다며 약을 먹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일을 제외하고는 양은 온순한 짐승이기 때문에 이날 무슨 일을 해도 해가 없다고 한다. 우리가 정월에 하는 윷놀이에서 도는 돼지, 개는 개(犬)를 뜻하며 걸이 바로 양에 해당한다. 양은 설화, 꿈, 속담 등에서도 언제나 유순하고 인내심이 강하고 상서로운 동물로 그려져 왔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초야에 묻혀 지내던 시절에 양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양을 잡으려 하자 뿔과 꼬리가 몽땅 떨어져 놀라 꿈을 깨었다. 이 꿈 이야기를 무학대사(無學大師)를 찾아가 했더니 대사는 곧 임금에 등극하리라는 해몽을 했다. 즉 한자의 羊에서 양의 뿔에 해당하는 획과 양의 꼬리에 해당하는 ㅣ획을 떼고 나면 王자만 남게 되어 곧 임금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자 실제 양꿈은 길몽으로 해석되었다. 지금까지도 양꿈은 희생, 재물, 종교인, 선량한 사람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돼 왔다. 목축 민족에게는 양이 재산의 척도가 되고 제단에 바치는 희생물이 되며 양의 성품이 티없이 온순해 착한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기독교문화에서는 성서와 연관돼 양이 종교인의 상징이 된다. 서구의 기독교 문명을 받쳐온 성경에서 양 이야기는 무려 500번 이상이나 인용된다. 고대 이스라엘인의 생활에서 양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제의(祭儀)의 필수품이었고 양의 머릿수가 곧 재산을 뜻했다. 또한 양고기는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뒤 이스라엘이나 서양에서 양을 제물로 삼는 번제(燔祭)가 없어진 것은 예수와 양이 동일시된 성서의 유산이다. 서양인들은 양을 가리켜 인간의 이로움을 위해 희생하고자 태어난 동물로 높은 경지의 도덕성과 생생한 진실을 상징한다고 보고 있다. 동양에서도 양은 희생의 상징이었다. 이른바 속죄양(贖罪羊)의 의미이다. 고대 동양에서 소는 소의 솥(牛鼎), 돼지는 돼지의 솥(豕鼎), 양은 양의 솥(羊鼎)에 각각 삶아서 제물(희생)로 썼으며 각 솥은 독특한 장식이 있었다. 양을 중히 여기는 생각은 간혹 양을 성스러운 짐승(聖獸)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으며 먹고 버린 뼈까지 인간의 길흉화복을 예시하는 영물로 간주해 고이고이 간직하기도 했다. 양의 가죽 옷은 제후나 대부 등 높은 신분의 사람만 입을 수 있었는데 논어의 염소 가죽 옷에 검은 관을 썼다는 양상현구(羔裳玄冠)가 바로 그것이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ㆍ문학박사 >

 

 

원숭이띠, 신(申)

 
원숭이는 유럽·오스트레일리아·북아메리카를 제외하나 전세계에 분포해 살고 있다. 북으로는 일본 원숭이가 살고 있고 남으로는 거의 열대지방에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십이지신에 원숭이가 들어 있기는 하나 우리나라에서 원숭이의 생태 흔적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일본이 세조 12년(1466)에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원숭이를 선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김종서가 희귀한 선물이라 하여 예찬시를 짓기도 하였다. 소수의 주장이긴 하지만 이 땅에도 옛날에는 원숭이가 서식했을 것이라고 한다. 즉 중국에 원숭이들이 살고 있고 바다 건너 일본에도 원숭이가 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땅에서도 어느 시기엔가 상당기간 서식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우리의 전통문화와 민속에 원숭이가 번번히 등장하는 것도 그 한 예로 본다. 잡상은 궁궐 등 목조건축의 추녀마루에 길상과 벽사로 장식하는 선인(仙人)이나 동물상을 말한다. 남대문과 경복궁에 가면 볼 수 있다. 잡상에는 불을 제압하는 두우(斗牛, 용의 일종)를 비롯하여 뿔을 갖고 부정을 퇴치하는 해치, 비늘을 가진 압어(押漁)·산예·해태·사자·용봉(龍鳳)·천마(天馬) 등이 있다. 그 기라성 같은 동물 사이에 원숭이가 버젓이 끼어 있는 것이다. 날 우습게 보지 말라는 듯이. 상신일(上申日)은 새해 들어 처음 맞는 원숭이날이다. 이날은 산에서 나무를 베지 않고 또 나무로 집도 짓지 않았다. 이는 원숭이가 나무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이날은 칼이나 낫·도끼 등을 만지면 손을 베거나 다친다고 했다. 또한 여자 대신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 청소하면 가족이 무병하다고 했다. 원숭이는 원숭이도 나무에 떨어질 날이 있다, 원숭이 볼기짝 같다, 원숭이 궁둥이 빨갛다, 잔나비 밥 짓듯, 원숭이 잔치 등으로 속담에도 등장한다. 아이들 노랫말 가운데 원숭이로 시작되는 말잇기(끝말잇기) 놀이가 있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간 것은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는 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긴 것은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른 것은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은 것은 백두산,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속신으로 원숭이를 꿈에서 보면 재수가 없다고 한다. 일부 지방에서는 원숭이라는 어휘를 금기로 하여 대신 잔나비라고 했다. 다만 흰 원숭이꿈은 지위가 올라간다고 했다.

 

 

닭띠, 유(酉) 

 

닭은 닭목의 꿩과에 속하는 조류이다. 닭은 인도나 동남아지방에서 야생하는 들닭을 잡아다 사육개량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6,7세기에 들어온 것으로 문헌은 전하고 있다. 중국의 《삼국지》<동이전>이나 《후한서》에는 우리나라에서 꼬리 긴 장미계(長尾鷄)를 키운다고 기록하였으며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도 꼬리긴 닭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 닭을 기르기 시작한 연대는 정확히 나와 있지 않으나 중국의 《해동역사》라는 책에 조선에서는 닭을 부를때 구구라고 한다라는 기록이라든지 경주 천마총에서 계란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길러온 것으로 보인다. 고려 때의 기록에는 닭이 새벽에 우는 습관을 이용해서 시보용(時報用)으로 궁중에서 여러 마리 키웠다고 되어 있다. 또 여러 날 먼길을 떠날 때 시간을 알기 위해 몸집이 작은 당닭을 갖고 갔다는 기록도 있다. 구전에 의하면 우리의 토종닭은 잡종이나 수입종에 비해 취소성이 강하며 성질이 활달하고 부화와 육란을 잘 한다고 하였다. 몸은 비교적 작지만 한꺼번에 20알 정도를 품어 부화시킬 수 있을 만큼 모성애가 강하다. 산란수는 이틀에 한 알 꼴이다. 몸이 가벼워 날기를 잘 하고 수컷은 꼬리가 길어서 땅에 닿는 것도 있다. 귀뿔은 홍색 또는 유백색이며 안면은 홍색이 대부분이다. 다리의 길이는 중간이고 다리에 털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깃의 색깔은 주로 갈색·등황색·검은색 등이며 흰색 토종은 없다. 겉날개 깃은 녹색을 띤 흑색이며 등과 어깨는 암적갈색 또는 흑색이다. 턱과 얼굴 주위에 흑색 깃털이 나 있다. 예로부터 음력 정월 초하룻날을 닭의 날이라고 하였다. 닭은 모든 것의 처음을 뜻하는 동물이다. 이육사의 시 <광야>에도 닭우는 소리로 태초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거니와 우리나라엔 닭과 관련된 창조신화나 위인들의 난생설화가 유난히 많다.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고 그의 왕비는 계룡의 갈비뼈에서 났으며 김알지가 태어날 때는 숲에서 닭이 울었다 하여 그 숲을 계림이라고 하였다. 이날은 길쌈해서는 안 된다. 또 곡식을 마당에 널지 않으며 빨래도 하지 않는다. 제주도에서는 이날 모임(계)을 갖지 않았는데 이는 닭이 발로 무엇이든 파헤쳐 흩어버리는 습성이 있다 해서 그런게 아닌가 여겨진다. 닭은 대체로 길조로 여겨져 왔으며 다섯 가지 덕이 있다고 했다. 머리에 있는 볏은 문(文)을 상징하고 발은 내치기를 잘 한다 하여 무(武)로 여겼으며 적과 맹렬히 싸우므로 용(勇)이 있다고 하였고 먹이가 있으면 자식과 무리를 불러 먹인다 하여 인(隣, 仁)이 있다 하였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간을 알려주니 신(信)이 있다 하였다. 그래서 닭은 예로부터 길조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알과 고기를 주니 그보다 더한 익조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 조상들의 생각이었다. 또 혼례를 올릴 때 닭을 예상(禮床)에 올리는 것은 오랜 풍습이었다. 이때 닭은 청홍(靑紅) 보자기에 싸서 올려놓거나 동자(童子)로 하여금 안고 있도록 했고 지금도 예식을 마치고 시댁 부모와 상면할 때 폐백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아마 처자를 잘 보살피는 수탉의 도리와 알을 잘 놓고 병아리를 잘 키우는 암탉의 도리를 부부가 되는 이들에게 인지시켜 주기 위함이 아닐런지. 닭은 지네와 상극이다. 그래서 닭이 괴물인 지네를 퇴치하여 어찌어찌했다는 전설은 흔하다. 실제로 닭은 지네나 노랭이처럼 발이 많은 곤충들을 잘 잡아먹는다. 그래서 그것을 퇴치하기 위해 닭을 마당에 내놓아 기르기도 하고 닭이 없는 집에서는 잠시 빌어다 놓기도 하였다. 닭은 사람과 늘 함께 하는 가축이므로 그와 관련된 속담도 많다. 닭 싸우듯 한다는 말은 크게 으르지도 못하면서 만나기만 하면 아옹다옹 다툰다는 뜻이다. 닭대가리라는 말은 사려가 깊지 못하고 지혜가 얕은 사람을 비꼬는 말이다. 닭고집이라는 말은 고집부리지 않아도 될 하찮은 일에 고집을 부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닭은 단백질 공급원으로는 소·돼지 다음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백년손님인 사위에게 씨암탉을 대접하는 풍속이 있었다. 닭을 재료로 하는 음식 또한 지방마다 다양하다. 주로 복날 음식으로 삼계탕과 술꾼들이 즐겨 찾는 닭꼬치를 비롯하여 춘천의 토속음식인 닭갈비, 경상도의 닭개장, 서울의 닭찜, 강화도의 닭곰탕, 북한지방의 닭김치, 닭백숙 등은 아직도 별미다.

 

 

개띠, 술(戌) 

개는 아주 영물스런 동물이다. 십이지 열두 동물중에 호랑이 다음 가는 맹수이지만 사람을 좋아하고 잘 따르는 가축이다. 그래서인지 민담에는 개에 관한 이야기가 유난히 많다. 맹수였던 개가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가축으로 길들여졌는지에 대한 자세한 문헌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야생동물 가운데서는 가장 일찍 가축이 된 것으로 의견들이 모아진다. 십이지에 개(戌)가 들어 있고 제주도에 개를 사육하여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중국쪽 기록과 더불어 신라 지증왕이 개로 인해서 왕비를 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미 사람들과 한 울타리 안에서 생활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개의 조상은 그 생태나 외양으로 보아 늑대나 이리로 추정된다. 또한 지금 일부 지방의 들개처럼 처음에는 반야생 상태로 길러졌을 것이다. 옛 문헌에는 사냥개를 전견(田犬), 집을 잘 지키는 개를 폐견(吠犬), 보신탕용으로 길러진 개를 식견(食犬)이라 하였다. 처음에는 사냥용으로 먼저 가축화되었다가 나중에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하여 식용화되었을 것이다. 개는 여우와는 달리 주둥이와 꼬리가 짧은 편이다. 본래는 저들의 조상처럼 육식성이었으나 인간과 함께 하면서부터 잡식성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위장구조도 초식동물을 크게 닮았다. 그리고 저들 조상과는 달리 밤낮없이 잘 짖는다. 그것도 가축화되면서 그렇게 바뀌었을 것이다. 개는 눈과 귀가 밝을 뿐만 아니라 귀소성까지 있어서 인간에게 충성을 하는데 필요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일찌기 충견으로 사랑받아 왔고 조선 중종 때는 전라도 감사가 개의 귀소성을 이용하여 개에게 통신업무를 맡긴 적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흔히 행동이 못난 사람을 개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꾸짖는데 그 말 속에는 개의 인격성이 다분히 들어 있다. 그래서 소나 돼지의 먹이는 죽이라고 부르고 개의 먹이는 개밥이라고 높여주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우리 풍속 가운데 정월 대보름날 여러 집의 약식을 얻어다가 절구통 위에 앉아 개에게도 던져주고 자기도 먹는 풍속이 있다. 그러면 그 한해는 개와 사람이 모두 건강하다고 했다. 상술일(上戌日)은 개의 날이다. 이날 농부들은 쉰다. 일하면 개가 텃밭에 가서 해를 준다고 믿었다. 이날은 또 풀을 쑤지 않는데 그 이유는 개가 풀을 먹고 병이 난다고 하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는 이 날 연장을 수리하면 좋다고 했다. 개에 관한 속담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 개 따라가면 측간 간다, 개 꼬리 삼년 두어도 황모 안 된다, 개 핥은 죽사발 등이 있다. 또한 본래의 것보다 못할 때 쓰는 접두사로는 개살구, 개참외, 개망나니, 개머루, 개백정 등으로 부정적인 의미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개는 살아서 집을 지키고 죽어서 몸을 바치는 희생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 애완동물 가운데 가장 사랑받고 있다.

 

 

돼지띠, 해(亥)

 

돼지는 멧돼지과에 속하는 잡식성 포유동물로서 현재 1천여 품종이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다. 우리의 토종돼지는 털색이 검고 몸집이 작으며 주둥이가 길다. 피하지방은 비교적 얇으나 체질은 강건하다. 우리나라 토종돼지는 강원도 명파마을의 방목 토종돼지, 김천 지방의 지례돼지, 경남 합천돼지, 제주도 똥돼지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돼지는 잡식성이기 때문에 송곳니와 어금니가 모두 발달해 있다. 임신기간이 모두 114일 전후이며 대개 한 번에 8마리 안팎의 새끼를 낳는다. 돼지는 피하에 땀샘이 발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오줌을 자주 누며 이 때문에 돼지우리는 항상 불결하고 습기차 있다. 돼지의 오줌통은 질기고 수축성이 좋아 옛날에는 오줌통에 바람을 넣어 공을 대신했다. 우리의 석기시대 고분에서 멧돼지뼈가 출토되었다는 것은 그 시대에 이미 멧돼지를 사육했다는 유추를 가능하게 해준다. 《삼국지》<동이전(東夷傳)>의 기록 등을 종합해 미루어보면 약 2천년 전부터 돼지가 사육된 것으로 추정된다. 돼지를 옛날에는 돝이라고 했다. 요즘도 사투리로 도야지 또는 돝이(도치)라고 하는 곳이 있다. 사실은 이들 사투리가 어원에 더 가까운 말이다. 원래 젯상에 올리는 돼지는 통돼지였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통돼지 대신 돼지머리를 많이 올리게 되었다. 그것은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마을 공동단위의 제의가 사라지고 요즘은 그저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끼리만 모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제를 마친 다음에는 제물에서 잔치음식으로 그 용도가 바뀌어진다. 요즘도 제사와는 상관없이 회갑·혼인 등의 잔치나 건물 기공식 등에 돼지가 상에 오르는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잔치돼지는 웃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시장에 가서도 굳이 입을 벌리고 웃는 돼지만을 고른다. 입을 벌린 돼지 주둥이에 돈을 꽂는 풍속은 최근의 일이다. 우리 민족은 용꿈과 돼지꿈을 최고의 길몽으로 쳤는데, 용은 권위와 명예를 주고, 돼지는 부(副)와 건강을 주는 동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죽어서 돼지혈(穴)에 묘를 쓰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도 돼지꿈을 꾸고는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복권을 사거나 경마장을 찾는다. 윷놀이에서 도는 곧 돼지를 의미하는데 이는 행동거지가 민첩하지 못함에서 연유한다. 윷놀이에서 첫판에 도가 나오면 개보다는 한 수 위로 쳐서 살림밑천이라고 했다. 이는 돼지가 복록을 상징하기 때문으로 앞으로 잘될 것이라는 기대심리 때문일 것이다. 상해일(上亥日)은 돼지날이다. 곡식을 태워서 주머니에 넣어 재신(宰臣)에게 나누어주면 풍년이 든다고 했다. 또 이날 얼굴이나 피부가 검은 사람은 왕겨나 콩깍지로 문지르면 살결이 희고 고와진다고 했다. 그러나 머리를 감으면 중풍이 든다고 하여 삼갔다.

 

12지설화 

 

하늘의 천제인 옥황상제가 정월 초일 가장 먼저 오는 12동물을 12지로 삼겠다고 천명했습니다.

고양이는 날짜를 잊어먹어 쥐에게 물어봤는데 꽤가 많은 쥐는 1월 2일이라고 거짓 대답을 했다.

소는 자신이 제일 먼저 출발하여 1등을 노렸습니다만 역시 쥐가 소 머리 위에 타고 있다가 꼴인

지점에 이르렀을 때 폴짝 뛰어내려 내달리는 바람에 쥐가 1등, 소가 2등이 되었는데...

 

3등인줄 알았던 토끼가  졸지에 4등이 된 이유는 자신이 호랑이를 앞지를 수도 있다고 믿었지만

자칫 실수하면 먹이감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스스로 양보하여 4등이 되고, 12등 꼴찌를 한

돼지는 냄새만 나면 땅을 파디비고 먹을것 있으면 먹고 세월없이 가다가 꼴지를 하였다는...

믿거나 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