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이야기

상수학 대가, 소옹[ 邵雍 ] 소강절과 서경덕, 그리고 이지재(李之才)

코알라 아빠 2016. 7. 3. 14:17

[소강절 요약]

중국 송()나라의 학자 ·시인.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교의 역철학()을 발전시켜 특이한 수리철학()을 만들었다. 그는 음() ·양() ·강() ·유()의 4원()을 근본으로 하고, 4의 배수()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호 안락선생(). 자 요부(). 시호 강절(). 소강절()이라 불릴 때도 많다. 허난[]에서 살았으며, 주염계()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이지재()로부터 도서 ·천문() ·역수()를 배워 인종()의 가우연간(:1056∼1063)에는 장작감주부(簿)로 추대받았으나 사양하고, 일생을 뤄양[]에 숨어 살았다.

사마 광() 등의 구법당()과 친교하면서 시정()의 학자로서 평생을 마쳤다. 남송()의 주자()는 주염계, 정명도(), 정이천()과 함께 강절을 도학()의 중심인물로 간주하였으며, 강절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교의 역철학()을 발전시켜 특이한 수리철학()을 만들었다. 즉, 역()이 음과 양의 2원()으로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있음에 대하여, 그는 음() ·양() ·강() ·유()의 4원()을 근본으로 하고, 4의 배수()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이 철학은 독일의 G.W.F.라이프니츠의 2치논리()에 힌트를 주었다고 전한다. 그는 《황극경세서()》 62편을 저작하여 천지간 모든 현상의 전개를 수리로서 해석하고 그 장래를 예시하였으며, 또 《관물내외편()》 2편에서 허심(), 내성()의 도덕수양법을 설명하였다. 또한 자유로운 시체()의 시집() 《이천격양집()》(20권)의 작품이 있고, 《어초문답()》(1권) 등이 있어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황극경세서[ 皇極經世書 ]

12권. 역리()를 응용하여 수리()로써 천지만물의 생성변화를 관찰, 설명한 과학적인 수리철학서이다. 12진()을 하루, 30일()을 한 달, 12개월을 1년, 30년을 1세(), 12세를 1운(), 30운을 1회(), 12회를 1원()으로 한다. 그러므로 12만 9600년이 1원이며, 천지()는 1원마다 한번 변천하고, 만물은 이 시간적 순서에 따라 진보한다는 것이다. 6권까지는 역()의 육십사괘()를 원 ·화 ·운 ·세에 배당하여 요제()의 갑진년()에서 후주()의 현덕() 6년(959)까지의 치란()의 자취를 적시하고, 7∼10권에는 율려성음()을 논하고, 11∼12권은 동식물에 관해 논하였다. 皇帝內經과 本草綱目, 이지재(李之才)의 先天象數學을 전수 받았다.

本草綱目은 明代 李時珍이 집대성한 중국 과학 및 철학 정신을 대변한다.

 

서경덕[ 1489 ~ 1546]

조선 중기의 유학자로 학문 연구에서 격물()을 통해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중시했으며, 독창적인 기일원론()의 철학을 제창하였다. 화담() 본관은 당성(), 자()는 가구(), 호()는 복재()이다. 송도(, 개성의 옛 이름) 화담() 부근에 서재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여 화담이라는 별호로 더 알려져 있다. 시호()는 문강()이다.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송도에 머무르며 학문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하여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3절()’로 불리기도 한다.

1489년(성종 20년) 황해도 개성 화정리()에서 종8품 수의부위()를 지낸 서호번()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급 무관의 집안에서 태어나 거의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탐구심이 많아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들에 나물을 캐러 갔다가 종달새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이치를 생각하느라 밤늦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14세 때에는 <서경()>을 공부하다가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에 의문이 생기자 보름 동안 궁리하여 스스로 터득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8세 때에는 <대학()>에서 “그 뜻을 성실히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아는 것을 극진히 해야 하고, 아는 것을 극진히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데 있다”는 구절을 읽고 “학문을 하면서 먼저 격물()을 하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탄식하고는 만물의 이름을 벽에 써서 붙여 두고 날마다 그 사물의 이치를 깊이 탐구했다고 한다.

19세 때에 종6품 선교랑() 이계종()의 딸인 태안 이씨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21세 때인 1509년(중종 4년)에는 경기ㆍ영남ㆍ호남 지방을 돌아보았다. 당시 조정에서는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를 시작으로 잇따른 사화로 수많은 선비들이 참화를 당했다. 게다가 서경덕은 우주의 근원과 자연의 질서를 탐구하는 데 학문의 뜻을 두고 있었기에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는 개성 화담 부근에 서재를 짓고 은거하여 연구와 교육에 전념했으며, 신분에 관계없이 제자를 받아들여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31세 때인 1519년(중종 14년)에는 조광조()에 의해 실시된 현량과()에 천거되었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1522년에는 조식()ㆍ성운() 등과 지리산ㆍ속리산 등을 유람하면서 교유하였고, 여러 편의 기행시를 남기기도 했다. 43세 때인 1531년(중종 26년)에는 어머니의 요청에 따라 식년시() 생원과()에 응시해 합격하기도 했으나 대과()에 응시하거나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았다.

1540년에 다시 김안국() 등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고, 1544년 조정에서 후릉참봉()의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그리고 그 해 원리기(), 이기설(), 태허설(), 귀신사생론() 등을 저술하여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1546년(명종 1) 58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개성의 숭양서원과 화곡서원에서 제향()되었다. 1567년(명종 22년)에 호조좌랑()으로, 1575년(선조 8년)에 우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1585년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문집으로는 <화담집()>이 전해진다.

제자로는 <토정비결()>을 지은 이지함(),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순()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박주()ㆍ남언경()ㆍ민순()ㆍ이구()ㆍ박민헌()ㆍ홍인우()ㆍ장가순()ㆍ이중호() 등 수많은 문인이 있었다. 그러나 서경덕의 주기() 철학은 후대의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지만, 경세론이나 윤리설보다는 형이상학적인 본체론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하나의 학파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의 제자인 허엽동인()이 되고, 박순서인(西)이 되는 등 정치적으로도 나뉘었다.

 

서경덕 철학사상

 

서경덕은 성리학 뿐 아니라 도가 사상이나 역학()ㆍ수학 등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그는 학문을 하면서 격물치지()의 태도를 중시하였고, 성현의 말이라고 해서 그대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회의하고 사색하여 깨닫는 자득지학()을 강조하였다. 그는 스스로 사물의 이치를 따지지 않고 독서에만 의존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라고 비판하며, 직접 자연과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려 했다.

이러한 태도는 성현을 본받고 따르는 의양()을 강조했던 이황() 등 다른 성리학자들과는 많이 다르다. 이황은 “사물을 직접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자부하지 않았고 또 설사 안다고 해도 그 타당성이 의심스러우니 오직 성현을 따르는 것이 배움의 가장 온당한 방법”이라며 의양을 강조했으며, 서경덕에 대해서는 “그의 학설에는 한 편도 병통()이 없는 게 없다”며 매섭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화담()은 자득()이 강한데, 퇴계는 의양의 맛이 많다”고 하면서, 서경덕의 깨달음이 이황과 같이 독서에 의존하는 학자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이처럼 서경덕은 격물을 중시하며, 독서에만 의지하기보다는 자연을 탐구하고 스스로의 합리적 사유를 통해 진리를 인식하려 했으며, 주돈이()ㆍ소옹()ㆍ장재() 등 북송() 성리학자의 사상을 재해석하여 기()를 중심으로 하는 독창적인 사상을 제창했다.

당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주희의 사상을 표준으로 삼아 이()와 기()를 서로 독립된 실재로 구별해서 보는 이기이원론()의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가 기()에 앞서며, 이()가 기()를 주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서경덕은 “기() 바깥에 이()가 없다”며 기일원론()의 관점에서 만물의 운동과 변화를 설명하였다. 그는 장재()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본체를 태허()라 하였는데, 태허를 ‘하나의 기()’로 보았다. 태허의 기가 아직 발하지 않아 말끔하여 형체를 갖추지 않은 상태를 선천()이라 하고, 이미 발하여 만물로 형상화된 상태를 후천()이라 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의 생멸과 변화는 선천에서 후천으로 옮겨가는 이러한 기()의 운동으로 이루어진다.

선천의 기는 본래 하나이지만, 그것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천지만물의 변화가 나타난다. 선천의 일기()는 형체를 갖추지 않아 감각할 수 없지만, 후천의 기는 형체를 갖추어 감각할 수 있다. 그러나 기()가 새롭게 생겨나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또한 기()는 소멸되지도 않는다. 이것을 ‘일기장존설()’이라고 하는데, 서경덕은 이를 촛불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촛불을 켜면 초가 점차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가 흩어져 형체가 바뀔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생겨나는 것은 기가 모이는 것이고, 죽는 것은 기가 흝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서경덕은 기()의 운동은 다른 무언가에 주재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서경덕은 이()가 기()를 주재한다고 본 주자학과는 달리 기()가 스스로의 작용으로 만물로 형상화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어떠한 것도 기()보다 앞서 존재할 수 없으며, 이()는 단지 기()의 작용으로 형상을 갖춘 후천()의 질서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이()와 기()는 서로 구별되는 실재가 아니라, 이()는 단지 기()의 운동을 법칙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일원론()의 관점이 제시된다.

서경덕의 사상은 이황을 비롯해 주리론() 계열의 성리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았지만, 이이 등 주기론() 계열의 학자들에게는 큰 영향을 끼쳤다. 이이는 서경덕의 사상이 이()와 기()는 서로 떠날 수 없다는 ‘이기불상리()’의 요체를 분명하게 터득했다며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서경덕의 일기장존설 등은 비판하며 이()를 궁극적 실체로 인정하여 이기이원론()의 관점에서 주기() 철학을 발전시켰다. 이이의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은 임성주()는 성즉기설()을 주장하며 서경덕과 마찬가지로 기일원론의 관점에서 기의 활동만으로 우주만물이 표현되며 이()는 기()의 작용을 설명해 주는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참조항목 격물치지, 성리학, 송도삼절, 이기이원론, 이기일원론, 화담집, 주기론, 주리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화담 서경덕이 어렸을 때의 일이다. 어머니가 나물을 뜯으러 내보내면 서경덕은 매일 빈 바구니만 가지고 돌아왔다. 어머니가 “왜 나물을 한 줌도 뜯어오지 않느냐?” 하고 묻자, “나물을 뜯으러 들판으로 나가니 종달새가 날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달새가 그제는 땅에서 1치쯤 날아오르더니 어제는 2치쯤 날아올랐고 오늘은 3치쯤 날아올랐습니다. 새가 나는 모양을 보고 그 이치를 생각하느라 늦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서경덕은 늦은 나이인 14세에야 개성의 어느 선생에게서 글을 배웠다. 16세에는 『대학』을 읽은 뒤 그 뜻을 깨닫고는 기쁨에 겨워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34세가 되던 해 그는 남쪽의 여러 곳을 유람하기 위해 길을 떠났고, 그다음에는 제자 토정 이지함과 함께 지리산을 찾아갔다가 남명() 조식을 만나게 된다.

서경덕은 4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습 도중 개성으로 돌아와 송악산 자락의 화담 옆에 초막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서경덕의 호인 화담, 즉 ‘꽃 피는 연못’은 바로 이곳 지명에서 연유하였고, 그때부터 그의 이름이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 그는 조선의 수많은 성리학자들 중에 스승이 없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서당에서 겨우 한문을 깨우치는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한 서경덕의 진정한 스승은 자연과 책이었다. “스스로 깨달아 얻는 즐거움은 결코 다른 사람이 짐작할 바가 아니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한 서경덕은 그런 연유로 아주 독특하고 진귀한 학문적 업적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개성시 산과 내. 개성시와 개풍군 경계에 있는 산. 해발 490m. 예로부터 소나무가 많다고 하여 송악산이라 하였다. 기반암은 주로 중생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아호비령산줄기의 남쪽 끝에 솟아 있는데, 산줄기는 동쪽과 남쪽으로 뻗어 있고 북동쪽과 남동쪽 경사면에 많은 골짜기들이 형성되어 있다. 산꼭대기의 남쪽 경사면은 날카로운 바위들로 되어 있다. 곳곳에 여러 가지 모양을 가진 화강암의 기암절벽들이 있어 풍치가 아름답고 웅장한 감을 준다. 남쪽 경사면의 물매는 급하나 그밖의 경사면의 물매는 느리다.

토양은 대부분이 갈색산림토양이며 그 두께는 남쪽 경사면에서 30~50cm, 그밖의 경사면에서는 30~60cm이다. 산의 남쪽 경사면에는 주로 소나무와 아까시나무 · 메타세쿼이아 · 잣나무 등이, 그밖의 경사면에는 참나무 · 굴참나무 · 상수리나무 등이 분포되어 있으며 그 아래로 족도리풀, 삽주, 도라지, 고사리 등이 자라고 있다. 서쪽 기슭으로는 예성강의 지류인 죽배천이 흐르며 동쪽 능선끝에는 송도저수지가 있다. 크낙새보호구로 지정되어 있다.

이 산에 소나무가 많은 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 태조의 조상인 성골장군의 아들 강충이 송악산 동북쪽의 오관산 아래에서 살았다고 한다. 신라의 감간(벼슬이름) 팔원이라는 사람이 풍수에 관한 방술을 잘 알았는데 마침 부소군에 왔었다. 팔원은 부소산(송악산)의 형세는 좋으나 나무가 없는 것이 약점이니 강충에게 만일 부소군을 부소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바위가 보이지 않게 하면 거기서 삼한을 통일시킬 자가 나올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강충은 군사들과 함께 송악산 남쪽으로 마을을 옮기고 온 산에 소나무를 심었는데, 그때부터 이 산에 소나무가 많아졌다고 한다. 송악산은 부소산(소나무산의 고어), 곡령, 신숭, 숭산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백제시기에는 청목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개성시 송악산

개성시 산과 내. 개성시와 개풍군 경계에 있는 산. 해발 490m. 예로부터 소나무가 많다고 하여 송악산이라 하였다. 기반암은 주로 중생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아호비령산줄기의 남쪽 끝에 솟아 있는데, 산줄기는 동쪽과 남쪽으로 뻗어 있고 북동쪽과 남동쪽 경사면에 많은 골짜기들이 형성되어 있다. 산꼭대기의 남쪽 경사면은 날카로운 바위들로 되어 있다. 곳곳에 여러 가지 모양을 가진 화강암의 기암절벽들이 있어 풍치가 아름답고 웅장한 감을 준다. 남쪽 경사면의 물매는 급하나 그밖의 경사면의 물매는 느리다.

토양은 대부분이 갈색산림토양이며 그 두께는 남쪽 경사면에서 30~50cm, 그밖의 경사면에서는 30~60cm이다. 산의 남쪽 경사면에는 주로 소나무와 아까시나무 · 메타세쿼이아 · 잣나무 등이, 그밖의 경사면에는 참나무 · 굴참나무 · 상수리나무 등이 분포되어 있으며 그 아래로 족도리풀, 삽주, 도라지, 고사리 등이 자라고 있다. 서쪽 기슭으로는 예성강의 지류인 죽배천이 흐르며 동쪽 능선끝에는 송도저수지가 있다. 크낙새보호구로 지정되어 있다.

이 산에 소나무가 많은 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 태조의 조상인 성골장군의 아들 강충이 송악산 동북쪽의 오관산 아래에서 살았다고 한다. 신라의 감간(벼슬이름) 팔원이라는 사람이 풍수에 관한 방술을 잘 알았는데 마침 부소군에 왔었다. 팔원은 부소산(송악산)의 형세는 좋으나 나무가 없는 것이 약점이니 강충에게 만일 부소군을 부소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바위가 보이지 않게 하면 거기서 삼한을 통일시킬 자가 나올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강충은 군사들과 함께 송악산 남쪽으로 마을을 옮기고 온 산에 소나무를 심었는데, 그때부터 이 산에 소나무가 많아졌다고 한다. 송악산은 부소산(소나무산의 고어), 곡령, 신숭, 숭산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백제시기에는 청목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송악산 개성시과 개풍군의 경계로 산 전체가 주로 화강암의 큰 바위로 되어 있으며, 기암괴석 활엽수림의 조화가 뛰어나다.

그 후 서경덕의 명성을 듣고 개성 일대와 서울에서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는데, 서경덕은 출신 고하를 막론하고 배우고자 오는 사람은 누구나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 제자들 중에 빼어난 여류 시인이자 절세미인이었던 황진이1)가 있다. 황진이는 대제학을 지냈던 소세양과 10년 면벽의 지족선사를 정욕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한 뒤 화담 서경덕을 마지막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서경덕은 명성답게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서경덕에게서 우주의 철리, 인성의 본질, 인간의 참된 삶과 사랑을 배웠다. 그래서 황진이는 그곳에서 서경덕과 영원한 스승과 제자 사이로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때부터 기생이 아니라 ‘천리를 터득한 도인’이 되었던 것이다.

여러 사람이 황진이에 대한 글을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이며 ‘오성(이항복)과 한음’으로 알려진 이덕형이 지은 「송도기이()」다. 다음의 인용문은 선조 37년 개성에 부임하게 된 이덕형이 진복이라는 서리의 아버지에게서 황진이의 이야기를 듣고 지은 글이다.

진이(진랑)는 송도의 이름난 창기(娼妓)다. 진이의 어머니 현금은 꽤 얼굴이 아름다웠다. 18세 때 병부교 밑에서 빨래를 하는데 다리 위에 형용이 단아하고 의관이 화려한 사람 하나가 현금을 눈여겨보면서 혹은 웃기도 하고 혹은 가리키기도 하므로 현금도 또한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날이 이미 저녁때가 되어 빨래하던 여자들이 모두 흩어지니, 그 사람이 갑자기 다리 위에 와서 기둥에 기대서서 길게 노래하는 것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물을 청하므로 현금이 표주박에 물을 가득 떠서 주었다. 그 사람은 반쯤 마시더니 웃으며 돌려주면서 “너도 시험 삼아 마셔보아라” 하였다. 마시고 보니 그것은 술이었다. 현금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와 함께 좋아해서 드디어 진이를 낳았다.

진이는 용모와 재주가 뛰어나고 노래도 절창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선녀라고 불렀다. 개성유수 송공(송염 또는 송순이라고도 한다)이 처음 부임했을 때 마침 절일(節日)을 당하였다. 낭료(郎僚)들이 부아(府衙)에 조그만 잔치를 베풀었는데, 진랑이 와서 뵈었다. 그녀는 태도가 가냘프고 행동이 단아하였다. 송공은 풍류를 아는 사람으로 풍류장에서 늙은 사람이었다. 한 번 진이를 보자 범상치 않은 여자임을 알고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이름을 헛되이 얻지 않은 것이로군!” 하고 기꺼이 관대하였다.

송공의 첩도 역시 관서(關西)의 명물이었다. 문틈으로 그녀를 엿보다가 말하기를 “과연 절색이로군! 나의 일이 낭패로다” 하고는 드디어 문을 박차고 크게 외치면서 머리를 풀고 발을 벗은 채 뛰쳐나온 것이 여러 번이었다. 여러 종들이 붙잡고 말렸으나 만류할 수가 없었으므로 송공은 놀라 일어나고 자리에 있던 손님들도 모두 물러갔다.

송공이 어머니를 위하여 수연(壽宴)을 베풀었다. 이때 서울에 있는 예쁜 기생과 노래하는 여자를 모두 불러 모았으며, 이웃 고을의 수재(守宰)와 고관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붉게 분칠한 여인이 가득하고 비단옷 입은 사람들이 떨기를 이루었다.

이때 진랑은 얼굴에 화장도 하지 않고 담담한 차림으로 자리에 나왔는데, 천연한 태도가 국색(國色)으로서 광채가 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밤이 다하도록 계속된 잔치에서 손님들 중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송공은 한 번도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았으니, 이것은 대개 그의 첩이 발 안에서 엿보고 전과 같은 변을 벌일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술이 취하자 비로소 시비(侍婢)로 하여금 파라(叵羅,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서 진랑에게 마시기를 권하고, 가까이 앉아서 혼자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진랑은 얼굴을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는데 맑고 고운 노랫소리가 간들간들 끊어지지를 않고, 위로 하늘에 사무쳤으며, 고음 저음이 다 맑고 고와서 보통 곡조와는 현저히 달랐다. 이때 송공이 무릎을 치면서 칭찬하기를 “천재로구나!” 하였다.

악공 엄수는 나이가 일흔인데 가야금이 온 나라 안에서 명수요, 또 음률도 잘 터득하였다. 처음 진랑을 보더니 탄식하기를 “선녀로구나!” 하였다. 노랫소리를 듣더니 자기도 모르게 놀라 일어나며 말하기를 “이것은 동부(洞府, 신선이 사는 곳)의 여운(餘韻)이로다. 세상에 어찌 이런 곡조가 있으랴?” 하였다.

이때 조사(詔使, 중국에서 오던 사신)가 본부(本府)에 들어오자, 원근에 있는 사녀(士女, 선비와 부인)들과 구경하는 자들이 모두 모여들어 길옆에 숲처럼 서 있었다. 이때 한 우두머리 사신이 진랑을 바라보다가 말에 채찍을 급히 하여 달려와 관(館)에 이르러 통사(通事, 통역)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 천하절색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진랑이 비록 창류(娼流)이긴 했지만 성질이 고결하여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일삼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록 관부(官府)의 주석(酒席)이라도 다만 빗질과 세수만 하고 나갈 뿐, 옷도 바꾸어 입지 않았다. 또 방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시정(市井)의 천예(賤隸)는 비록 천금을 준다 해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선비들과 함께 놀기를 즐기고 자못 문자를 해득하여 당시(唐詩) 보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화담을 사모하여 매양 그 문하에 나가니, 화담도 역시 거절하지 않고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이 어찌 절대의 명기가 아니랴!

내가 갑진년에 본부의 어사로 갔을 적에는 병화(兵火)를 막 겪은 뒤라서 관청이 텅 비어 있었으므로 나는 사관을 남문(南門) 안에 사는 서리 진복의 집에 정했는데, 진복의 아비 또한 늙은 아전이었다. 진랑과는 가까운 일가가 되고 그때 나이가 80여 세였는데, 정신이 강건하여 매양 진랑의 일을 어제 일처럼 역력히 말하였다. 나는 묻기를 “진랑이 이술(異術)을 가져서 그랬던가?” 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이술이란 건 알 수 없지만 방 안에서 때로 이상한 향기가 나서 며칠씩 없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공사가 끝나지 않아서 여러 날 여기에서 머물렀으므로 늙은이에게 익히 그 전말을 들었다. 그 때문에 이같이 기록하여 기이한 이야기를 더 넓히는 바다.

이덕형의 글과 더불어 이능화가 지은 『조선해어화사』도 참조해볼 만하다.

황진이는 한때 이름을 떨쳤다. 종실인 벽계수가 스스로 지조와 행실이 있다 하여 항상 말하기를 “사람들이 한 번 황진이를 보면 모두 현혹된다. 내가 만일 당하게 된다면 현혹되지 않을 뿐 아니라 반드시 쫓아버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이가 이 말을 뜨고 사람을 시켜 벽계수를 유인해왔다. 때는 늦가을이었다. 달밤에 만월대에 오르니 흥이 도도하게 일어났다. 진이가 문득 소복단장으로 나와 맞이하며 나귀의 고삐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명월은 자신의 자를 인용한 것이며, 수(守)는 수(水)로 대신했으니, 즉경(卽景)을 그대로 노래로 옮긴 것이다. 벽계수는 달 아래 한 송이 요염한 꽃을 대하고 또 그 목소리가 마치 꾀꼬리가 봄 수풀에서 지저귀고 봉황이 구소(九霄)에서 우는 것 같음을 들으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심취해서 나귀 등에서 내렸다. 진이가 말하기를 “왜 나를 쫓아내지 않으세요?” 하니, 벽계수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그 노래는 이러하였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히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백호() 임제의 「청초 우거진 골에」의 치제설()이 있으나 그는 훨씬 후세의 사람이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황진이는 갔어도 그녀가 남긴 시들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왔고, 지금도 그녀를 일컬어 조선 500년 역사상 가장 시를 잘 쓴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황진이를 개성의 3절(, 박연폭포ㆍ서경덕ㆍ황진이)의 하나로 부르는 것이다. 황진이의 시 몇 수를 소개한다.

어저 내일이면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
내 언제 신이 없이 임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시는 밤이어드란 굽이굽이 펴리라

화담에서 북쪽으로 재 하나를 넘으면 개성시 장풍군 원고리에 있는 현화사() 옛터에 이른다. 지금은 비석과 탑 그리고 높이가 4.73미터인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고, 석등은 서울 용산 중앙박물관에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서 있다. 현화사는 언제 창건되었고 어느 때 폐사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종 11년(1020)에 임금이 안서도에게 명하여 둔전 1240결을 주게 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은 그 뒤로도 무종, 헌종, 덕종, 숙종, 의종 등 고려 임금들의 행차가 잦았을 정도로 큰 규모였으며, 특히 의종은 이 절에 자주 행차하여 반승과 무차대회, 나한재 등을 자주 베풀었고, 과시()를 열기도 하였다. 또한 유희를 위하여 청령재()라는 별관을 건립하였는데, 청령재를 지을 때 가슴 아픈 이야기가 하나 전해져온다.

현화사 7층석탑

현화사 7층석탑 화담에서 북쪽으로 재 하나를 넘으면 개성시 장풍군 원고리에 있는 현화사 옛터에 이른다. 지금은 비석과 탑 그리고 그 높이가 4.73미터인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다.

한 역졸이 너무 가난하여 밥을 굶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밥을 한 숟가락씩 얻어먹으며 일을 하였는데, 그의 부인이 어느 날 자신의 머리채를 잘라 판 뒤 그 돈으로 밥을 지어 신세진 사람들에게 대접하였다. 그 사실을 안 동료들은 목이 메어 아무도 밥을 먹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의종은 민중들의 고달픈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날마다 술잔치로 세월을 보내다가 이의민에 의해 최후를 맞게 되었다. 그처럼 번성했던 현화사는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게 폐사되고 말았다. 그 서쪽은 대흥동이며, 숙종 때 여기에 산성을 쌓았는데, 바깥쪽은 험하고 안쪽은 평탄하여 참으로 천작()으로 된 요새지다. 관에서 양곡과 병기를 쌓아두고 큰 절을 세워 승려들에게 지키게 하여 갑작스러운 변고에 대비하였다.

한편 천마산은 암벽이 높고 웅장하며 시냇물 또한 넓고 깊게 감돌아 흐르며 그 밑에는 큰 폭포를 이루었는데, 이곳이 바로 개성의 명물인 박연폭포다. 『고려사』「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설명을 보자.

우봉군에 박연이 있는데 그 상하 못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다. 날이 가물 때 여기서 기우제를 지내면 곧 응하여 비가 내렸다. 위에 있는 못 가운데에는 올라가서 구경도 할 수 있는 넓고 편편한 큰 돌이 있다. 문종이 한번은 그 위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바람과 비가 크게 몰아치며 돌이 진동하였다. 문종이 놀라서 겁에 질렸는데 이때 왕을 모시고 왔던 이영간이 용의 죄를 꾸짖는 글을 지어서 못에 던지니 용이 즉시 그 등을 내어놓았다. 이어 용을 때렸더니 못의 물이 전부 시뻘겋게 되었다.

박연을 들여다보면 그 물빛이 시커멓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옛날에 박 진사란 사람이 못 위에서 피리를 불었는데, 용녀가 이에 감동하여 박 진사를 데려다가 남편을 삼았다. 그 때문에 이 못의 이름을 박연이라고 불렀고, 박 진사의 어머니가 와서 통곡하며 못에 떨어져 죽었으므로 그만 이 못의 이름을 고모담이라고 불렀다.

박연폭포 © 권태균

박연폭포 © 권태균 송도3절의 하나인 박연폭포는 남쪽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과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선 층암절벽에 안기어 절경을 이룬다.

박연폭포는 개풍군 영북면 천마산 기슭에 있는 폭포로 높이는 약 20미터이며, 금강산의 구룡폭포 및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로 불린다.

박연폭포 흘러가는 물은 범사정으로 감돌아든다.
에헤 에헤야 에헤 에루화 좋구 좋다. 어럴엄마 디여라 내 사랑아
범사정에 앉아서 한잔을 기울이니 단풍 든 수목도 박연의 정취로다.
에헤 에헤야 에헤 에루화 좋구 좋다. 어럴엄마 디여라 내 사랑아
천기 청랑한 양춘가절에 개성 명승고적을 순례하여보세.
에헤 에헤야 에헤 에루화 좋구 좋다. 어럴엄마 디여라 내 사랑아
구만장천 걸린 폭포 은하수를 기울인 듯 신비로운 풍경에 심신이 맑아지누나.
에헤 에헤 폭포에 흘러내리는 물은 용바위 감돌아 범사정이로다.

「개성난봉가」에도 등장하는 박연폭포를 사랑했던 화담 서경덕의 묘는 개성시 용흥리의 화계계곡에 있고, 판문점에서 조금 떨어진 전재리 황토고개에는 조선 실학의 대가인 연암 박지원의 묘가 황폐한 채 남아 있다.

 

첫날밤, 소강절은 부인을 재워놓고 밤새 점을 치고 있었다. 그가 궁금했던 건 이 첫날밤 행사로 자식이 생겼을까 하는 것. 점을 쳐보니 과연 아들이 들어섰다는 점괘가 나왔다. 내친김에 손자와 그 다음 후손들의 앞날까지 점을 쳤다. 그러던 중, 9대손에 이르러 불길한 점괘가 나왔다. 9대손이 역적 누명을 쓰고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소강절은 임종을 앞두고 유품 하나를 남겼다. “이것을 9대손에게 물려주고 집안에 큰일이 생기면 풀어보게 하라.”는 유언과 함께.

▲ 소강절 초상화

●9대손의 목숨을 구한 점괘

300년 후, 소강절의 9대손은 정말 역적 누명을 쓰고 멸문지화를 당할 처지에 놓였다. 그는 9대조 할아버지의 유품을 열어 볼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고, 드디어 보자기를 풀었다. 그 안에는 “지체하지 말고 이 함을 형조상서에게 전하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는 그 길로 형조상서를 찾아 갔다. 형조상서는 300년 전 대학자인 소강절의 유품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나와 예를 다해 유품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유품을 받기 위해 마당에 내려서자마자, 서까래가 내려앉으며 집이 무너지고 말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가져온 함 속에 있었던 소강절의 편지 내용이었다. 거기엔 “당신이 대들보에 깔려 죽었을 목숨을 내가 구해주었으니, 당신은 나의 9대손을 구해 주시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상서는 그 길로 재수사를 명했고, 9대손의 무죄를 입증해 주었다.

9대손의 운명까지 예측할 정도로 그의 점복술은 그야말로 최고 경지였다. 소강절의 생애에 관해선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고, 대신 이 같은 신비한 얘기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 기막힌 예지력 때문에 그는 신비한 점쟁이의 대명사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강절은 수리(數理)를 성리학적으로 완성한 상수학(象數學)의 대가이다. 그의 예지력은 영감이나 직감이 아닌 바로 ‘수(數)의 이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숫자로 천지(天地)의 이치를 헤아리다

소강절(邵康節·1011~1077)은 북송 시대의 유학자이자 시인으로, 북송5자(주렴계, 소강절, 장재, 정호, 정이)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입신양명의 꿈을 키웠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과거를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옛 사람들은 시간을 뛰어넘어 더 옛날의 사람과도 소통하였는데, 나는 지금 내 주위 사방(四方)에도 못 미치는구나.”하며, 집을 떠나 천하를 떠돌아 다녔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도(道)가 여기에 있다.”고 말한 후, 다시 나가지 않았고 더 이상 과거공부도 하지 않았다.

진정한 소통은 입신양명 같은 외적 확대가 아니라 우주와 직접 연결되는 내면의 확장이라고 깨달은 것일까.

이 무렵 이지재가 소강절이 학문을 즐긴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방문했다. 이지재는 주렴계의 스승인 목수의 제자로 고문에 정통한 학자이자 관리였다. 이지재는 소강절에게 물리(物理)와 성명(性命) 공부를 권했다. 뜻이 깊으면 그 방면에 반드시 스승이 나타난다고 했던가.

그런데 소강절의 경우는 한 술 더 떠서 스승이 제 발로 찾아와 스승 되기를 청했다. 이때부터 소강절은 춘추를 배우고 역학(易學)을 전수받았다. 이지재는 그의 잠재력과 학문적 그릇을 꿰뚫어 보았다. 훗날 소강절의 사상이 주자학(신유학)의 사상적 기틀이 된 것을 보면 이지재의 안목도 대단하다고 하겠다.

소강절은 이지재로부터 도교의 연단술에 운용되던 선천도(先天圖)를 전해 받았고, 그것을 재해석하여 ‘선천역학’이라는 역학의 새로운 해석체계를 세웠다. 이 이론의 핵심은 ‘가일배법’(加一倍法)이라는 단순한 원리에서 시작된다.

가일배법은 하나가 둘로 나뉘는 법칙으로 2 0, 2 1, 2 2, 2 3… 2 n식의 배수로 진행된다. 이렇게 두 배로 분화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만물생성의 이치라는 것이다.

이 중에서 소강절은 숫자 ‘4’에 주목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역사는 ‘4’라는 수의 변천과 순환일 따름이다. ‘춘·하·추·동’과 ‘역·서·시·춘추’로부터 시작된 하늘과 인간의 네 국면은 그 순서대로 생(生; 낳고), 장(長; 자라고), 수(收; 수렴하고), 장(藏; 저장한다)하는 사이클을 가지고 2배수씩 분할된다. 그렇게 분할되어 낳은 것 중에는 ‘인·의·예·지’ 같은 윤리적인 이치도 있고, ‘문왕·무왕·주공·소공’ 같은 역사적 인물도 포함된다.

이런 식으로 확장해 가면 우주만물과 그 시공간을 모두 헤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장수장의 운명적 리듬을 통해 만물의 운명도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소강절의 대표 이론인 원회운세론의 ‘원(元)·회(會)·운(運)·세(世)’는 우주의 시간단위로서 이것은 ‘연·월·일·시’의 주기성과 통한다. 즉, 원(元=12회)은 우주의 1년이고 지구의 시간으로는 12만 9600년에 해당하고, 회(會=30운)는 우주의 한 달이며 지구시간으로는 1만 800년에 해당한다.

그리고 운(運=12세)은 우주의 하루로서 지구시간으로 360년이고, 세(世)는 우주의 한 시간, 지구시간으로는 30년이다. 이로써 인류를 포함한 만물의 역사는 ‘원회운세’ 안에서 피할 수 없는 준칙을 갖게 되었고, 천지(天地)와 인간은 같은 패턴의 시간성 안에서 물리와 생리를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원회운세와 더불어 관물내편과 관물외편 그리고 성음율려를 더해 대작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가 완성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예지력은 ‘초월적 능력’이라기보다, ‘숫자’와 숫자에 연결된 이치를 통해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사물을 관찰한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사물의 관찰, 즉 관물(觀物)이 객관적이기 위해서는 편견의 주체인 ‘나’의 판단을 소거해야 한다. 그래서 소강절은 ‘나로써 사물을 보(以我觀物)’지 않고, ‘사물로써 사물을 보기(以物觀物)’를 강조한다.

결국, 소강절에게 관물은 주체를 만물 속에 깃들게 하는 동시에 만물이 스스로의 이치를 말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는 우주만물이 되고, 내 마음의 움직임은 곧 천지자연의 변화와 다르지 않다. 이를 일컬어 ‘심법’(心法)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수의 이치를 꿰고 마음의 변화를 읽으면 만사를 알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예지력의 원천인 셈이다.

“몸은 천지 뒤에 태어났지만 마음은 천지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네. 천지도 나로부터 나오는데 다른 것은 말해 무엇하리!”

▲ 소강절이 집필한 ‘매화역수’.

●천명(天命)을 깨달은 자의 자유

그러나 그는 이 앎의 위험성을 경계했다. 만일 “수를 써서 지름길로 가려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왜곡”하는 것이고 그렇게 “억지로 취해서 반드시 얻어내려 하면 화와 근심이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욕에 머물러 “요행을 바라는 것은 천명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문을 하고 마음을 수양하는 일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올바름이 바로 도가가 유가의 수양과 만나는 길을 열었으며, 신유학의 기틀로 작용하였다. 이것이 성리학의 토대인 북송5자 중에 소강절이 들어가게 된 연유다.

그는 인생의 후반기를 뤄양(陽)에서 살면서 당대를 주름잡던 사상가인 사마광, 장재, 정명도, 정이천과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평생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의 몸과 사유는 그만큼 자유로웠다. 스스로 ‘유가’임을 선언했지만 다른 북송의 현인들과 달리 불교나 도교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도교의 이론을 잘 활용했고, 또한 그의 시 중에는 ‘불가의 가르침을 배우며’라는 시가 있을 정도로 유·불·도 사이를 자유롭게 노닐었다.

무엇보다 “학문이 즐거움에 이르지 않으면 학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그의 말이나, 정명도가 쓴 그의 묘비명, 즉 ‘그는 편안했을뿐더러 이루기도 했다.’는 구절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천명을 안다는 것은 인생역전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앎 그 자체가 삶이자 자유였다. 때문에 그의 길은 늘 사방으로 열려 있었다.

“눈앞의 길은 모름지기 널따랗게 만들어야 하느니, 길이 좁으면 자연 몸을 둘 곳이 없네. 하물며 사람들을 다니게 하는데 있어서는 어떻겠는가!”

안도균 감이당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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