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바로 읽기

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

코알라 아빠 2018. 11. 20. 17:38

1. 머리말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이 어떤 사람인지는 한국과 미국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다심지어 그의 고향에서조차 그가 한국 땅에서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인지는 알고 있지 못하다우리에게 그가 알려진 것은 하우스만의 회고록이 한국일보에 연재되고이것이 책으로 묶여 출판되면서부터였다이 책이 출판되면서 제임스 하우스만이 한국군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이것조차 이전부터 그의 역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군 관계인물이나 그의 배후 역할에 주목한 언론인정치학자역사학자들에 한정되었을 뿐이었다.

미국에서는 하우스만 개인을 다룬 논문이 이미 2편 나와 있다하우스만에 대한 논문을 최초로 쓴 사람은 밀레였다최근 도널드 클락은 한국군 형성과정에서의 하우스만 뿐 아니라 한강교 폭파 등의 쟁점에 대해서도 언급한 글을 한 심포지움에서 발표했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하우스만의 역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나와 있지 않은 상태이며이는 하우스만이 행했던 역할을 군 형성과정의 비사(秘史정도로만 취급하고 인식하는 데에도 일정한 원인이 있다하우스만이 주로 정보방면의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하우스만과 가까이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정일권이나 백선엽조차 그들의 회고록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하우스만을 언급하고 있는 정도이다정일권이나 백선엽의 책을 아무리 자세히 훑어보아도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적다전직 한국군 장성들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하우스만을 언급하기를 꺼렸다면그 이유는 하우스만이 이들 장성들과 너무나 가까운 사이여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하우스만이 너무나 많은 일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한편 여순사건 때 정보장교 자격으로 최초의 정보군 관계 대책모임에 참석했던 고정훈의 회고록에는 하우스만에 대한 많은 사실들이 나와 있다.

하우스만은 1946년 7월 26일 남한에 첫발을 딛은 이래 국방경비대 고문관미군사고문단장 고문을 지냈고 1950년에는 채병덕과 이승만의 군사고문을 지내면서 한국군 형성과정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그는 한 사람의 키 큰 미군 대위에 불과했지만, 1960년대까지 한국정치의 배후무대에서 정력적으로 활약했다하우스만은 일국의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었고남한 '국군의 아버지'로 자칭했다자신의 회고록 제목 또한 그렇게 지었다어찌보면 당돌하게 보이는 이런 표현은그러나 사실에 가깝다아니 미군 장성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일개 미군 대위가 어떻게 그런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단 말인가하우스만의 일생은 국군의 역사더 나아가 군부가 수 십년 간 좌지우지했던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대부분의 정보 업무가 그렇듯 그는 베일에 싸인 사람이었다하지만 그는 베일에 싸여 감추어지기에는 활동영역이 너무나 컸고고위층의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한국현대사 연구자인 미국의 커밍스는 하우스만이 30년을 한국에서 보낸 가장 주요한 미국 요원이었으며미국과 한국군부 간에 그리고 이들 정보기구 간의 연결자로서 활동했다고 썼다커밍스는 하우스만이 '촌뜨기 같은 언행 뒤에 자신의 기술을 감추고 있는 교활한 공작원'이었으며한국판 에드워드 란즈데일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한 신문 칼럼에서 박노자는 제임스 하우스만의 역할과 행동을 아는 것은 (젊은이들이) "배우지 못한 또 다른 현대사 속에 어떤 모습들이 감추어져 있는가그리고 한국현대사에서 대미 관계는 어느 정도 종속적이었는가"를 아는 것이며하우스만을 한국사 교과서에 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제임스 하우스만을 한국군의 형성과정과 연관시켜 보고자 한다이 같은 측면은 이미 지적되어 온 바이지만여기에서는 아직까지 이용되지 않았던 그의 증언을 토대로 구체적인 실상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한편 하우스만은 '국군의 아버지'라는 얼굴 이외에도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남한 반공국가 형성과정은 '누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될 수 있는가'라는 자격심사과정에 다름 아니었는데이 때 '좌익 빨갱이'는 너와 나를 가르고국민과 비국민을 결정하는 주요한 잣대였다그리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학살은 국민자격을 심판하는 주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다여순사건 진압이 끝난 뒤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는 등 반공체제 구축에 전력 질주하는 바하우스만은 여순사건 진압작전을 주도한 인물이었다이런 측면에서 하우스만은 단지 배후에 있던 인물이 아니라 학살이 있을 수 있게 만든 든든한 말뚝이었다.

 

 

 

2. 한국 부임 이전의 하우스만

 

제임스 해리 하우스만은 1918년 2월 28일 뉴저지주 러니미드(Runnemede)에서 아버지 존 하우스만(John Otto Hausman Sr.)과 스코틀랜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그의 아버지는 건축업자이자 청부업자였는데 이름에서 나타나듯 독일계 사람이었다.

러니미드의 중학교와 뉴저지 오두본(Audubon) 고등학교에 다니던 하우스만은 그의 나이 16세에 군 입대를 결정하게 된다하지만 그의 나이로는 부모 동의를 얻지 않으면 도저히 군 입대를 할 수 없었고결국 그는 형의 이름을 빌어 지원하게 되었다원래 제임스란 이름은 그보다 6살 위인 형의 이름이었다원래 그의 이름은 아버지를 따라 지은 존 오토 하우스만 쥬니어(John Otto Hausman Jr.) 였다그는 자신이 입대한 이유를 '형은 누나를 만나러 가고 혼자 남아있는 상황이었고이런 상황에서 집은 커 보였고 '외로웠다'고 회고했다.

군대에 들어간 하우스만은 메인주 맥킨리 항구에 주둔하고 있던 5보병 연대에 배치되었고, 1940년에는 형의 이름을 공식적인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얼마간 파나마에 근무하기도 한 하우스만은 1941년 1월 24일 소위로 진급했고아들을 낳은 다음에는 아이오와주 데스 모인(Des Moines)항에 여성보조군(Women's Army Auxiliary Corps; WAAC'S) 형성의 임무를 맡고 차출되어 배치되었다이는 하우스만이 원하던 보직은 아니었으나 월급은 많았다하우스만의 상관은 그가 결혼했고아이가 있다는 사정을 고려하여 이 부대에 배치한 것이었다그리고 하우스만은 이 부대 교육에 필요한 군사경험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그 뒤 중위로 승진한 하우스만은 6개월이 조금 넘어서 다시 대위로 승진하였다소위에서 대위까지 6개월만에 빠르게 승진했던 것이다.

그 뒤 하우스만은 미주리주 레오나드 우드 항구에서 활동했던 75보병 사단에 배치되어 벌지전투에서 부상병을 영국으로 후송하는 일을 맡기도 하고작전장교로 289보병연대 1대대에 S-3에 배치되기도 하였다그리고 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본대로 귀환하게 된다한국에 오기 직전까지 하우스만은 펜실바니아 군사행정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난 뒤 하우스만은 1946년 7월에 한국으로 파견되게 된다이 때 하우스만의 나이는 28세였다하우스만은 도쿄의 맥아더사령부를 거쳐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는데다른 동료 군인들은 거의 모두 일본에 머물러 있고 싶어했다하지만 하우스만은 이들과 달리 한국에 선뜻 들어오게 되었는데이는 그가 한국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을 갖고 호감이 있어서라기 보다는군인의 자세에 충실한 판단이었다.

한국에 들어와 러치장군을 만난 하우스만은 점령지 군사행정은 싫다는 의향을 표시했다그의 부임 신고를 들은 러치는 "자네 기록을 보니 병사이므로 프라이스 대령이 국내 보안부서를 조직 중에 있으므로 프라이스 대령에게 신고하게우리는 지금 정치적인 이유로 보안부서 조직이란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입장이지"하고 말했다.

미국과 소련이 남북을 각각 점령한 상태에서 양측은 남과 북에 군대를 만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따라서 남북에는 미소양군과 치안유지만을 위한 경찰이 있었을 따름이었다그래서 남한 군대는 경찰을 보조하는 경찰예비대(constabulary)로 출발했다하우스만은 미군정 하에서 조선경비대 창설요원으로 배속 받으면서 남한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이후 프라이스 대령에게 신고한 후 하우스만은 춘천 8연대에 배치되어연대를 훈련시키고 확장하는 일을 1개월 정도 맡았다이 당시는 경기도의 1연대만이 한국 내의 유일한 완전한 규모의 연대였다하우스만은 춘천 8연대의 생활에 대해 "내 군대경험 12년에 비추어 그 곳의 모든 것이 정상이 아니"라고 느끼고 있었다.

한편 하우스만은 춘천 8연대 활동에 대해 주기적으로 경비대 총사령관이었던 배로스(Russel D. Barros) 대령에게 보고하곤 했는데배로스는 하우스만의 보고서를 눈 여겨 보았다드디어 배로스는 하우스만을 찾아와 서울로 와서 자신의 수석보좌관 일을 맡아달라고 청하였다. 1946년 8월부터 하우스만의 본격적인 활동이 서울에서 시작되었다.

 

 

 

3. 한국군 형성과 하우스만- '국군의 아버지'

 

하우스만은 1946년 춘천 8연대 근무를 거쳐 서울로 올라와 배로스 휘하에서 조선경비대 집행국장(Executive Officer)이자 고문관으로 근무했다그 뒤 경비대 총사령관이었던 배로스 대령이 제주도지사로 발령이 나고송호성이 아직 임명되기 전이었을 때에는 하우스만이 사실상의 사령관 대행으로 있으면서 사실상의 총사령관 임무를 수행했다.

하우스만은 김완룡이지형을 시켜 미군 조직법을 번역해 군대조직법을 만들게 하는 등 군사훈련법군통제법군형법 등의 작성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다하우스만의 지휘하에 경비대에서 사용할 군사용어도 영어와 일일이 대조해가며 새롭게 만들었다.

하우스만이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배치 받아 처음 느낀 것은 군대와 경찰간의 충돌이 매우 자주 일어난다는 점과 지방 좌익의 영향으로 중앙의 통제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초기 국방경비대 창설과정에서 하우스만은 철저하게 실용적인 기준을 갖고 실전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우대했다당시에 군대에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일본 육사를 졸업했거나 만주군 출신으로 일본제국주의 군대를 위해 복무했던 사람들밖에는 없었다이러한 기준이 적용되자 일본군 출신들은 영달을 꾀할 수 있는 두 번째 호기를 맞았다이들은 국방경비대의 엘리트로 성장하게 되었다이형근이 그랬고채병덕이 그랬고정일권이 그랬으며백선엽이 그랬고박정희가 그러했다.

하우스만의 친한 한국군 친구들은 모두 일본군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일본군 출신들을 좋아했던 이유는 그들이 더 강한 군사훈련을 받았다는데서 찾았다한편 하우스만은 광복군 출신들을 상당히 무시했다그는 광복군이 장개석 장군의 '부속기계 같은 존재'였으며, '저속한 말로 불평할게 많다'고 하였다.

하우스만이 광복군을 싫어했던 중요한 이유는 광복군 출신들이 일본군 출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공산주의자를 적대했다는 사실에 있었다하우스만은 그 예로 송호성은 공산주의에 대해 나쁘다는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점은 여순사건 때 이승만 정부와 미군이 이 사건의 발발 요인을 극우와 극좌세력이 연합하여 일으킨 반란으로 보는 시각과도 맥을 같이 한다여순사건 발발 초기에 이범석국무총리는 이 사건이 김구와 군대내 반이승만 세력이라는 극우세력과 남로당 극좌세력이 일으킨 반란으로 설명했고미군은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입장을 공식화하지 않았지만 김구에게 끊임없는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그리고 이승만을 위협하는 김구라는 존재에 대한 시각은 김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다른 미군 병사가 언제쯤이나 본국으로 돌아갈까 골몰할 때하우스만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한국문화를 익혔고 한국말도 알아듣기 시작하는 충성스런 군인이 되어가고 있었다국방경비대가 만들어져가고 있던 시기에 전국을 순회하면서 군 내부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던 하우스만은 한국을 이해할 수 있는 미국 군인이 되어 어느새 누구나 조언을 구하는 '한국통'이 되어 갔던 것이다.

광복군보다 일군만군 출신을 우대하는 것에서 나타나듯 하우스만의 철저한 반공주의는 인사정책을 통해 구현되었다하우스만이 한국 사정에 밝아지면서미국 장군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정책과 조치가 적합한지 그리고 한국군과 정치인을 움직일 수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 하우스만을 필요로 했고하우스만을 통해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켰다한국군 장교들에게 하우스만은 작전과 군대 운영을 '조언(실제로는 지휘)'하는 고문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출세와 영달을 보장해 주는 직선 코스였다그의 마음에 들면 승진할 수 있었지만마음에 들지 않으면 생명도 내놓아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때 채병덕 총참모장이 이범석과 가까운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해임하려 한 적이 있었다이범석은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겸임하고 있었는데그는 민족청년단이라는 큰 조직을 이끌면서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다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을 견제하기 위해 일단 정부 요직에 앉힌 다음수많은 청년단체를 모두 해체시켜 버리고 이를 대한청년단으로 통합했다이범석은 자신의 사지가 짤려 나가는 아픔을 겪었지만 내각의 일원으로서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이범석과 채병덕은 친한 사이이기는 했지만이범석이 중국에서 무기를 들여와 팔고자 했을 때 하우스만의 조언으로 채병덕이 반대하면서 사이가 틀어져 있었다그것을 잘 알지 못했던 이승만은 채병덕 후임으로 김석원을 생각하고 있었는데김석원은 이승만의 열렬한 추종자인 임영신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그런데 하우스만은 김석원을 군인으로는 보지 않고 있었다.

이승만이 채병덕을 교체하려 하자 하우스만은 "대통령 각하만약 채병덕을 총참모장직에서 해임시키고 김석원을 임명한다면 미군사고문단을 철수시킬 것입니다."라고 말해 버렸다.

한국전쟁 직후에 채병덕에서 정일권으로 바뀌는 과정에서도 하우스만이 있었다이승만은 군인들의 사기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총참모장을 교체하려 하였는데채병덕 후임으로 누구를 추천하느냐고 하우스만에게 물었고하우스만은 정일권이라 답했다물론 정일권의 미군 군사고문으로 일하게 된 사람은 하우스만이었다이렇게 하우스만은 군 수뇌부의 인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이는 하우스만이라는 미군 고문관이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하우스만은 "그 때 모든 사령관의 파면임명이 내 손을 거쳐갔으며 내가 사령관과 미 대통령 사이를 연결해주는 사람이었고나는 그 두 사람의 유일한 통로였다내가 어떤 사람도 거치지 않고 직접 대화 가능했으며내가 원한다면 국방부장관과도 바로 대화가 가능했다그래서 내가 모르면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하우스만은 지적 능력이 뛰어난 것도재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하우스만의 역할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왜냐하면 하우스만은 한국군에 많은 인맥과 경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한 미군사고문단이 정식으로 출범할 때한국 근무기간을 훨씬 넘긴 하우스만은 전근 해야만 했다그러나 이승만은 "다른 고문관은 필요치 않아나는 하우스만을 필요로 해"라고 말했다결국 미고문단장은 하우스만이 계속 한국에 남아 있기를 권했고이미 한국어도 상당히 알고 있었고한국 장교들의 면면을 줄줄이 꿰고 있던 하우스만은 그대로 남게 되었다.

드디어 전쟁 중이던 1951년 하우스만은 한국을 떠나 국방부 국방정보부(DIA)로 자리를 옮겨 한국을 담당하게 되는데하우스만이 일했던 참모총장 고문 후임에는 짐 하웬이 임명되었다그러자 이승만은 하우스만이 있으면 참모총장 고문자리가 있고하우스만이 가면 참모총장 고문자리도 간다라고 하면서 하웬을 연락장교로 배치하였다.

하우스만의 마음에 차고 안 차고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가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 였다하우스만이 좋아하고 아꼈다고 해도그가 공산주의자로 밝혀지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그것도 하우스만이 사형 장면을 찍는 필름을 돌리는 앞에서김종석의 운명이 그랬다김종석은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수재였다하우스만은 김종석의 군사적 능력과 군인의 자질에 대해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고 장차 한국군을 이끌어갈 대들보로 생각하였다하우스만은 그를 조선경비대 내의 작전교육과에서 초대 과장으로 일하게 하였다하지만 여순사건 뒤 숙군 바람이 몰아치면서김종석은 공산주의자로 분류되어 1949년 9월 서울 부근 수색에서 처형당했다이 때 하우스만은 이 처형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16밀리 무비 카메라에 담았다그리고 이 필름을 '한국 좌익 총살 시청각 교과서'로 활용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된 뒤부터 하우스만은 이대통령국방장관육군참모총장로버츠 고문단장 등이 참여하는 군사안전위원회에 참가했다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면서 임시군사고문단([PMAG], 나중에 군사고문단[KMAG]으로 변경)이 만들어지자하우스만은 군사고문단장과 국군 참모총장 사이의 연락 임무를 맡았고 이승만을 면담하는 일도 잦아졌다이승만은 수시로 하우스만을 경무대로 불러 군사관계를 묻곤 했다이승만 대통령은 "군대에서 당신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에게 알려달라그를 교체하겠다"라고 하였다대통령은 개별보고서를 요구하곤 했는데군대의 사기문제라든지 군 조직 개편 등에 관한 보고서도 요구했지만 어떤 특정 사건특정 인물에 관한 보고서도 요구하곤 했다.

하우스만이 총참모장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그는 단지 참모총장의 고문일뿐 이었으나, '모든 작전에 책임을 졌다'. 사령관을 임명하는 일부대를 배치하고 그것이 중대대대연대이건 그들에게 임무수행을 명령한 일그리고 그 사령관을 감독하는 일들이 하우스만이 했던 일이었다사령관이 임무를 완수했는지그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를 감독했고 또 그 결과를 검토했다게릴라 토벌작전 때에는 빨치산들을 몇 명이나 체포했는지죽였는지부상자는 몇 명인지 등을 체크하는 일도 하우스만의 일이었다결국 하우스만은 고문이었지만미군이 국군을 지휘하는 상황에서는 하우스만 또한 자신이 조언하는 상관을 지휘할 수 있었다.

한번은 정일권과 고문관 하우스만이 토벌중인 백선엽 부대를 조사하러 나간 적이 있었다그런데 빨치산이 매복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는데도정일권은 체면 때문에 예정된 길을 가자고 주장했다이때 하우스만은 "당신은 부참모총장이고 나는 참모총장의 고문이다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이 길로 가기를 명령한다"고 말하였다.

하우스만의 이런 권능은 하우스만이라는 한 개인의 능력은 아니었다이러한 에피소드는 미국군과 한국군의 당시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고하우스만은 그 집약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4. 여순사건 진압의 계획자 학살의 말뚝

 

1948년 10월 19일 저녁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는 제주도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지창수 상사가 지도한 14연대는 이날 저녁 여수로 진입하여 경찰서와 철도경찰관공서를 순식간에 점령했고다음 날 아침에는 통근기차를 이용하여 순천으로 북향했다.

광주 5연대가 여수주둔 14연대 반란 소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다음날인 20일 오전 8시 20분이었고이 사실이 서울에 보고된 것은 9시였다이날 아침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에게 반란 소식이 보고되었고로버츠 고문단장은 즉시 관계자로 구성된 회의를 주최했다이 회의에는 미군측에서 하우스만(미 군사고문단 G-3), 존 리드(미 군사고문단 G-2), 트레드웰대위(전 5여단 고문), 프라이 대위(현 5여단 고문)가 참석했고국군측에서는 채병덕 국방부 총참모장정일권 작전참모부장백선엽 국방경비대 G-2 책임자고정훈 국방경비대 정보장교가 참석했다이 자리에서는 여수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기동작전군(Task Force)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 회의를 주도한 것은 미군사고문단이었다참모총장과 국방경비대 총참모장도 고문단장의 호출에 불려 나왔다왜냐하면 비록 이승만 정부가 세워지고 대한민국 정부가 독립을 선언했다 하더라도 군대 지휘권은 1948년 8월 24일 이승만-하지간에 체결된 협정에 따라 여전히 미군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다미군은 진압작전에 군대를 보내면서 군사고문단 장교가 꼭 대동하도록 했다송호성 사령관도 미군이 '임명'하였다그리고 하우스만은 송호성의 명령에 반하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문관이었다.

이로써 하우스만은 리드(Reed)와 더불어 남한에서 직접 전투작전을 지휘하게 되었다이는 하우스만이 이전의 국방경비대에서 활동했던 시기의 활동과도 그 성격이 약간 다른 것이었다하우스만은 국방경비대를 확충하고 군대를 운영하는 일에는 관여했지만직접 적에 대한 작전을 책임지고 주도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우스만은 미 임시고문단을 대표하는 작전책임자로그리고 송호성 총사령관의 고문자격으로 이 기동작전군 사령부에 배속됐다로버츠는 하우스만에게 공식 명령 네 가지를 주지시켰다고 하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한국군사령부가 사태진압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면 즉각 작전통제권을 관장할 것.

둘째기동작전사령부를 구성하고 적절한 감독행위를 할 것.

셋째결과를 신속히 고문단 본부에 보고할 것.

넷째면밀한 작전계획을 세워 이를 성공적으로 이행할 것.

 

이 명령의 내용을 보면 한국군사령부가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면 즉각 작전통제권을 미군이 장악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사실상 한국군은 미국의 손아귀에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문서에서나 사용될 상당히 완곡한 표현에 불과했다국군은 반란군 세력을 진압할만한 교통통신장비나 작전 경험도 전혀 없었다실제로 미군사고문단은 반란이 터졌을 때 무기군수훈련이 부족한 한국군이 과연 이를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에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의 역할은 단지 군 작전을 옆에서 지켜보고 조언해주는 이상이었다모든 면에서 미군의 지원은 절대적이었다하우스만은 그의 회고록에서 "내가 그 때 공식명령으로 휴대한 임무서에는 토벌사령부가 효율적인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면 내가 직접 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과진압사령부의 조직 및 작전과정의 운용을 위한 지워 및 감독을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돼 있다는 것만 밝힌다"고 말한 바 있다.

미 임시군사고문단은 일단 기동작전군을 구성한 다음에는 장비와 물자를 실어 날랐다하우스만이 광주에 파견되는 것과 동시에 화차 2량에는 무기 화약 식량 등이 실려 광주로 떠나갔다당시 국방경비대는 대부분 일본식 38, 99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제주도 파병을 위해 14연대 정도에만 M-1이 지급된 형편이었는데미군은 사건진압에 파견된 부대원들에게 모두 미24군 탄약고로부터 지원된 M-1 소총으로 무장시켰다.

제대로 된 비행기 한 대 가지지 못한 국군은 미군에게 수송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미군의 C47 수송기는 하루 한 번씩 서울-광주간을 오갔다광주에서 서울로 올리는 1일 작전 보고와 서울에서 내려오는 1일 작전 명령이 이 비행기에 실려왔고탄약무기식량 등을 수없이 실어 날랐다어느 하루는 쌀 6육류 20박스를 싣기도 했다쌀은 한국산 이었지만 육류는 미국에서 가져온 것이었다무쵸 주한 미대사는 국무장관에게 "지난 10월에는 여수순천지역에 대한민국 사람들탄약통신장비를 수송하느라 미국 수송기가 러시를 이루었다"는 전문을 타전했을 정도였다. 10대의 L4 경비행기도 지원되었다. 5대는 광주에 배치되었고, 5대는 전주에 두어 부대간의 연락용으로 쓰거나여수순천을 공중정찰하는데 사용되었다.

통신은 광주에 주둔한 미20연대가 갖고 있는 장비를 지원했다최신 무전기 M208이 작전 하루 이틀 뒤에 보급되어 작전체계를 갖추게 되었다가끔 반란군은 경찰 전화선 껍질을 벗기고 통화내용을 도청하곤 했는데최신 무전기는 안전한 작전 수행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물자 지원에도 불구하고 여수와 순천은 즉시 진압되지 않은 채초기에는 진압군이 반란군에 협조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사태가 위급해지자 이승만 대통령과 로버츠 군사고문단장은 반란의 진원지인 여수와 순천을 빨리 탈환하고자 시도했다미군 수뇌부는 "이승만 정부가 곧 전복 당할 처지에 있다여수는 어떤 값을 치루더라도 진압해야 한다"고 진압군을 재촉했다.

하지만 하우스만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하우스만은 진압작전은 순천에서 부대를 멈추고 전선을 구축하여 바다까지 밀고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이 전선에는 될 수 있으면 소규모 부대만을 남겨 놓고 대부분의 부대는 북쪽으로 행진시켜 지리산을 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우스만이 이런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은 여순사건에 대한 그의 판단 때문이었다그는 이 사건이 군인과 지방좌익세력의 합세로 인해 여수에서 다른 지역으로 파급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했다그는 여수 14연대의 최초 봉기 때 골수 추종자는 불과 40명에 불과하며전투에서는 첫 조우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일차공격을 가해 반란군의 자만심을 꺾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지창수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은 북한과 호응하여 남한에 항상적인 소요를 일으킬 빨치산 유격투쟁을 조직적으로 준비하는 것이라고 그는 파악했다하지만 여순사건의 발발은 조직적이거나 계획적인 것은 아니었다. 14연대 반란은 공산당 조직이 사전에 관련되어 있지 않았고여수의 공산주의자들조차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순봉기는 한국전쟁 전 남한에서 일어난 최후의 대중적 봉기였다는 점에 그 중요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하지만 하우스만은 여순사건을 북한과 연관지어 사고했고그렇기 때문에 지리산 입산을 극구 저지하려 했던 것이다.

하우스만에게 주요한 것은 여수순천의 신속한 탈환만이 아니라 반란군이 산 게릴라로 침투할 것이 확실해 보이는 백운산지리산 등의 퇴로를 우회적으로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한 정부와 무쵸대사로버츠 단장 등은 여수순천을 탈환하는 것에 변함없는 우선 순위를 두고 하우스만의 건의를 채택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하우스만의 판단이 옳았다. 14연대 반란군들은 지리산 등에 입산했고 장기 게릴라 투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하지만 하우스만이 판단을 내리게 된 근거는 그릇된 것이었다여순사건 이후에 본격화되는 게릴라투쟁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기 보다는 상황에 이끌려 벌어진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여수 진압작전에는 38선 경비임무를 맡은 부대를 제외한 남한의 거의 모든 대부대가 참가함으로써한국군은 처음으로 연합작전 경험을 얻게 되었다이전에 있었던 군대와 경찰간의 마찰은 이제 군의 압도적 우위로 결판났다사건이 발발한 요인에는 친일 경찰에 대한 경비대의 반감이 작용했기도 했거니와진압작전 과정 자체를 군대가 완전히 주도했기 때문이었다분규를 진압하는데는 소규모 화력이 아니라 정규군의 압도적 화력이 역시 중요했다미국이 제공한 화력 덕분에 진압군은 순천을 24여수를 27일 완전히 제압했다.

그러나 여순사건 진압은 14연대 반란군과 진압군만에 한정된 전투는 아니었다진압군 작전은 정규 14연대 반란 군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전 시민을 반란군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모두 적으로 삼는 무차별적인 공격이었다그 결과 여순진압작전은 무수히 많은 민간인 희생을 불러왔다.

10월 27일 여수 전 시내를 포위하면서 작전을 시작한 진압군은 기관총을 난사하며 잔여 세력의 저항을 제압하는 동시에 시민을 집밖으로 몰아내고 민가를 샅샅이 수색했다반란군으로 의심되는 조금의 저항이라도 보이면 기관총을 쏘아댔고조금이라도 의심나면 사살되었다.

순천과 여수를 점령한 진압군은 제일 먼저 전 시민을 국민학교 같은 공공장소에 모이도록 명령했다나오지 않으면 반란군으로 간주된다는 말을 듣고는 만일 진압군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서 모두 모이라는 장소에 나왔다.

당시 심사의 기준이 된 것은 교전중인 자총을 가지고 있는 자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흰색 지까다비(地下足袋 일할 때 신는 일본식 운동화)를 신은 자미군용 군용팬티를 입은 자머리를 짧게 깎은 자였다주민들 가운데 흰 고무신을 신고 있는 사람도 반란군으로 간주되어 끌려 나왔다의심되는 사람의 변호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압군의 협력자 색출과정은 12월 중순까지 약 한 달 반 동안이나 계속 되었고이 때문에 시내는 공포분위기로 완전히 뒤덮였다위헌적인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협력자 색출과정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수단이나 방법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진행되었고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의 기본권리조차 무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혐의 사실을 증명하는 주위 정황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이나 기준은 찾아볼 수 없다협력자 색출은 단지 믿음직하지 못한 혐의만으로도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에 의해 희생된 인명의 숫자조차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이러한 유혈 과정 속에서 이승만 정권은 소장파 국회의원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반공체제 확립의 법적 지주를 마련한 셈이었다학교에서는 학도호국단이 만들어졌고좌익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보도연맹(保導聯盟)에 가입해야만 했다보도연맹 가입자들은 한국전쟁 직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좌익수들과 함께 제1차적인 학살 대상이 되었다.

여순사건이 종결된 뒤 미 국방부는 '효율적이고 신속한 진압작전의 공로'를 인정해 1949년 1월 10일 하우스만에게 미 공훈장을 주었다이 훈장은 은성무공훈장 다음가는 4번째 서열쯤의 훈장이었고전시가 아닌 평상시에 이런 훈장은 드문 일이었다아니미군은 당시 남한 상황을 전시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하우스만의 훈장에는 학살의 공도 포함되어 있을까?

 

하우스만이 국방경비대와 국군에서 활동하던 시기는 남한에 반공국가가 세워지는 때였다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도움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했다. 194950년 사이에 미국무성과 주한미대사관을 오고간 문서의 대부분은 인플레이션 억제와 이승만이 병력과 끊임없는 물자 지원요구로 채워져 있다.

한국전쟁 때 패주하던 이승만과 채병덕 총참모장이 미국 개입 소식을 듣고 감격스러워 했고 그래서 군 작전권을 대전에서 종이쪽지 하나로 맥아더에게 헌납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였을지 모른다.

미국의 정치적군사적 지원으로 남한은 반공국가의 모양을 점점 갖추어 갔지만 제주도와 여수에서는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고이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이 죽었다얼핏 국군경찰청년단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학살의 배후에는 이 사실을 묵인한 미국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남한에서 가장 강력한 반공조직체이자 반공이데올로기의 보루로서의 대한민국 군대가 만들어진 것은 여순사건 뒤 대대적으로 실시된 숙군 때부터였다숙군과정을 주도한 김창룡은 만주에서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공산주의자들을 검거한 경력이 있었고북한에서 소련군을 피해 구사일생으로 남하했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과정은 빨갱이 사냥 이상의 것이었다김창룡은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면담하고 그의 두터운 신임을 얻으면서 군대 내부에 침투한 빨갱이에 대한 사냥을 마음놓고 자행했다단지 반공이라는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사적인 원한이 있는 사람자기에게 마음 들지 않는 인간을 가차없이 숙청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움켜쥘 수 있었다.

김창룡의 뒤에는 이승만이 있었지만김창룡은 하우스만에게도 직접 보고하고 있었다그리고 하우스만은 숙군 상황을 매일 매일의 일일보고를 통해 이승만에게 보고하였다.

김창룡과 하우스만은 반미반일 성향을 가진 공산주의 박멸에 뜻을 같이하고 있었고열성적이었다김창룡은 군내부의 숙청뿐만 아니라 보도연맹원 학살 등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학살을 직접 주도하고 시행한 인물로서 '스네이크 김'으로 악명을 떨친 인간이다하지만 이런 악명은 하우스만에게도 해당되어야 할 것 같다한번은 무쵸 주한 미대사가 재판도 없이 제주도에서 민간인 20명을 총살한 사실을 보고 받고 놀란 적이 있었다그 때 하우스만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것은 좋은 신호이다과거에는 이같은 민간인 200명 또는 더 이상이 집단으로 처형되었는데이제 숫자가 20명으로 줄었다이것은 진보이다."라고무쵸조차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던 이 의연한 대답은 그의 황폐한 정신 상태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무쵸 대사는 이 말을 잊을 수가 없었고나중에 워싱턴에서 하우스만을 다시 만났을 때, "자네가 당시 그렇게 말했다네"라고 상기시켜 줄 정도였다.

이런 그의 심성 때문에 그는 미군들 사이에서조차 `무서운 사람'으로 꼽혔다김창룡이 '스네이크'였다면하우스만은 이 뱀이 활개치고 놀 수 있는 공간과 담력을 키워준 '대사형(大蛇兄)'이었다.

하지만 하우스만은 자신의 손에 붉은 피를 묻히려고 하지는 않았다민간인학살을 지켜보고 옆에서 이 과정을 점검하던 다른 미군 장교들과 같이하우스만 또한 학살현장을 목격했지만 스스로가 학살에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군인들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장면에 대한 언급도 그러하다.

 

경비대 군인들이 마을 주민을 데리고 가서 나무 막대기에 묶어 놓고 끝이 뾰족한 대나무 막대기로 어떻게 사람을 죽이냐를 보여주면서 주민을 처형했다또 주민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한 뒤 구덩이 가에 서게 하여 다른 주민들이 대나무 막대기로 그 사람을 찔러 구덩이에 빠뜨린다그러나 대나무는 상처만 내지 실제로 죽이지는 못하므로 경비대 군인들이 구덩이에 넘어진 주민들 위에 석유를 부어 산채로 태워 죽이곤 했다제주도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자행되었다.

 

하우스만은 경비대 군인들이 자행한 학살을 단지 '목격'만 하고 자신의 손은 하얗게 남겨두었을까?

물론 하우스만은 학살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다하우스만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수 천명의 공산당을 처형한 사실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을 때이는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떼었다다시 질문이 이어졌지만 하우스만의 대답은 "잔학 행위는 없었다"였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는 죽여도 좋다라는 하우스만의 반공주의는 끈질긴 것이었다. 1948년 6제주도 9연대에서는 문상길 중위가 그의 부하와 함께 박진경 연대장을 사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다음 달 박진경 대령 암살범인 문상길 중위와 그의 부하들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다.

박진경은 일본 외국어학교 출신으로서 영어를 잘 해 미군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군정장관 딘은 그를 총애하여 직접 진급 계급장을 달아주러 제주도로 내려올 정도였다박진경은 이에 부응하여 15세 아이를 사살하는 등의 무차별 체포작전을 폈고이는 도민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박진경을 쏜 군인은 "박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다"라고 재판정에서 말하였다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인권옹호연맹이나 법학가동맹은 국가와 민족을 해치는 민족반역자를 총살한 동기를 참작하여 감형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그러나 문상길은 몇 달 뒤 사형되었다.

전임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은 처형 광경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총살형은 수주일 후에 수색에서 집행되었다. 3인은 총살장에서도 평소와 별다른 점이 없이 하나님께 "우리들의 영혼을 받아들이시고 우리들이 뿌리는 피와 정신이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밑거름이 되게 하소서"하고 기도 드렸다고 한다그리고 최후에는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한 후 '양양한 앞길을'하는 군가를 부르면서 형을 받았다고 한다그런데 또 해괴한 것은 참관한 하우스만 대위가 다가가 넘어진 시체에다 자기 피스톨을 꺼내 난사했다는 것이다하우스만 대위는 경비대 정보책임자로 박진경 대령과 절친한 친구였으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에게 박대령을 추천한 장본인이었다총살 현장의 광경은 참관자들의 마음속에 이렇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문상길의 처형은 군 내부 좌익세력 척결의 신호탄이었다하우스만이 한 짓이 여기에 그친다면 그래도 다행이겠지만이후의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 남하하기 시작한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서울을 압박했을 때였다대통령은 라디오로 서울을 지킨다는 허위방송을 전국민에게 떠든 채 몰래 달아나 버리고채병덕은 사무실에서 위스키를 비워가며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인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경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었다8군에 의하면 국군 9만 8천 명 가운데 한강을 건너온 군인은 불과 2만 4천 명 뿐이었고경찰 병력 중 피난 간 사람은 4,500명에 불과했다다리 위에서는 피난 가려는 시민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고 인민군을 피해 피난 가던 국민들은 모두 수장되었다어떤 미군 장교는 이 폭파로 인해 5800여 명이 죽었을 것이라 추정했다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초대 육사교장이었던 이형근은 현장을 목격한 뒤유엔군의 도강을 막기 위해 인민군이 선수를 친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누가 한강교 폭파의 명령을 내렸는가이승만 정권은 전쟁 중이던 1950년 9폭파 책임을 물어 최창식 공병감을 적전비행죄(敵前非行罪)로 몰아 사형까지 시켰지만최창식 부인 옥정애의 재심청구 요청으로 1964년 10월 결심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한강교 폭파의 책임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그 죄가 돌아갔다최창식에서 채병덕으로 죄인이 바뀌었지만두 경우 모두 정치적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점은 공통된다.

그럼 진짜 명령자는 누구인가당시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퇴역을 맞아 한국을 떠나 있었고라이트(Wright)부단장은 일본에 있었다또한 책임을 맡아야 할 선임 통신장교인 챨스 스튜리스는 자신은 한국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며 하우스만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다사실상 하우스만이 최고 책임자였던 것이다.

516 후 재심판결에서는 채병덕을 한강교 폭파의 명령권자로 밝혔는데채병덕의 고문관은 하우스만이었다또한 하우스만은 자신은 한강교 폭파와는 관련이 없다고 말하였다그는 김백일이 폭파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했지만김백일은 하우스만의 지휘를 받는 입장이었다한강교는 하우스만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폭파되었는데하우스만이 단지 행운아이었기 때문일까?

당시 최창식 공병감의 미군측 고문이었고 나중에 충무무공훈장까지 받았던 크로포드(Richard I. Crawford) 육군소령은 폭파 당시 최창식은 자신과 같이 짚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기 직전이었으며나중에 최창식의 누명을 벗겨주려 했으나 하우스만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말했다고 증언하였다크로포드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최병덕에게 폭파 지시를 내린 것은 '미군 장교'였고그는 국군 참모총장의 고문이었다고 증언했다만약 한강교 폭발로 서울시민 몇 백 명의 생명을 일시에 빼앗은 사람이 채병덕이라면그 사람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사람은 바로 하우스만이었던 것이다.

 

 

 

5. 한국정치사와 하우스만의 개입

 

하우스만은 이승만 정권시기에 한 사람의 미군 대위에 불과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이승만 정권 초기에 하우스만은 장관들만이 참석하는 국무회의에 미국인의 신분으로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그는 한때 경무대에 들어앉아 살기도 했는데그것은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대통령이 부르면 언제나 응하기 위해서였다.

하우스만은 10여 년이 넘게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주기도 했지만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는 최후 통첩을 한 것도 하우스만이었다.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데모가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불붙자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더 이상 남한의 통치자로 머물러 있게 하지 않았다이에 하우스만은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을 통해 미국의 지지 철회를 통고하였다하우스만은 송요찬에게 "당신이 가서 미국 정부는 경무대의 탱크를 철수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알려라"라고 말했다이것은 이승만 정권의 종말을 알리는 발언이었다당시 하우스만은 송요찬의 고문이었다.

이승만 정권 몰락 후 1960년 727선거를 통해 들어선 장면을 하우스만이 지원하지 못했던 것은 이후 군부정권의 등장과 관련하여 미국의 대한정책에 대한 미묘한 시사점을 제공한다정권을 획득한 민주당 신파의 수장이었던 장면총리는 이전 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하우스만에게 군사자문 역할을 부탁하였다하지만 미 대사관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이에 대해 장면은 "일등병으로부터 장군에 이르기까지 한국군을 돕기를 꺼리지 않았던 하우스만이 총리인 나를 도와주지 않는 다는 것은 대단히 섭섭한 일이다"라고 토로했다고 한다이제까지 이승만을 도왔던 하우스만이 장면 정권을 도우면 안 된다는 미국의 결정은 장면 정권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장면 정권은 4월혁명에서 제기된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요구를 수용할 것인가아니면 이를 물리치고 확고한 지배력을 다시 회복할 것인가의 기로에 처해 있었다장면 정권시기의 정책들-한미경제협정과 데모규제법반공법의 2대 악법-은 기본적으로 4월혁명을 거스르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학생과 혁신세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무능력 또한 갖고 있었다이 때 등장한 박정희와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는 미국에게 확실히 새로운 카드가 될 수 있었다그리고 미국은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미 쿠데타 음모를 감지하고 있었다.

미국대사 특별보좌관이라는 공식 직함을 가지고 있던 주한 CIA 지부장 피어드 실버는 장도영을 만나 쿠데타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타진한 적이 있는데이는 하우스만이 건네 준 정보였다군대 내부 사정에 정통했던 하우스만이 군부의 쿠데타 음모를 누구보다 더 잘 수집할 수 있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하우스만은 1960년 3월 1한국 군부 내의 쿠데타 기도를 상부에 보고했으며이런 정보는 "나 이외에 누구도 그런 정보를 입수할 수가 없다"라고 증언했다.

군부 쿠데타 주모자인 박정희는 여순사건 때 광주에 내려와 작전참모로 일한 적이 있었다그는 여순사건이 진압된 뒤에 군부 내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11월에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질 운명이었는데자신이 알고 있던 남로당 조직체계를 밀고하고 하우스만과 김창룡원용덕백선엽 등의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이 구명운동을 벌임으로써 생명을 건졌다.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5월 18일 박정희는 미8군에 있는 하우스만의 집을 찾아왔다박정희는 자신의 공산주의 경력을 해명하려 했으나하우스만은 이미 알고 있는 얘기였기 때문에 더 이상 그의 얘기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하우스만은 박정희와 만난 뒤 바로 자진에서 미국으로 날아가미 육군 참모총장합참의장국무성, CIA에 박정희와 한국 상황에 대해 브리핑했다.

하우스만은 "그 당시 나는 한국전문가였고하우스만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렇다고 나를 믿고 신뢰"했었기 때문에 미국 정관계에 박정희를 신임하도록 얘기할 수 있었다하우스만은 한국 상황과 박정희에 대한 훌륭한 정보를 제공한 보답으로 미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공로표창을 수여 받았다.

 

 

 

6. 맺음말

 

하우스만은 커밍스가 얘기하는 '한국군의 아버지'로서 뿐만 아니라 '학살의 방조자이자 수행자'로 역사에 기억되어야만 할 것이다한 쪽이 비교적 공식적인 역사였다면하우스만이 관여한 학살의 역사는 지금까지 은폐된 어둠의 역사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한국군의 형성은 반공체제의 형성과정이었고 이는 또한 국민에 대한 폭력적 편가르기이자 학살을 의미했다이승만 정권은 반공체제를 굳건히 하는 과정에서 군에 대한 숙군을 실시했고그 결과 군대를 가장 강력한 물리적 기구로서 이용할 수 있었다그리고 한국군의 형성과정은 반공주의를 그 중심적 이데올로기로 하고 있었다반공체제 구축과정은 평화롭고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그것은 국가폭력 기구를 전면에서 사용하면서 국민과 비국민을 구별했고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은 반공체제 구축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반공체제 형성의 굳건한 지원자이었던 하우스만은 1981년 한국 땅을 떠났다. 1946년에 한국에 왔으니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하지만 전두환노태우라는 2세대 군부인맥은 그후에도 10년이 넘게 남한을 통치했다.

하우스만이 한국 땅을 떠날 때수도방위사령부 시절부터 아주 친하게 지내던 보안사령관 노태우 육군중장은 1981년 6월 24하우스만을 불러 두 명이 같이 찍은 사진이 들어 있는 기념패를 하우스만에게 주었다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제임스 H. 하우스만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 신생국가에서 오늘날 대한민국까지의 부침 동안 옆에서 큰 도움을 준 영원한 친구에게. 1981년 7월 1"

한국군 창설과정 때부터 군에 관여한 하우스만이 보면 전두환노태우 같은 군인은 꼬맹이 같은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군사정권이 수십 년을 지배했던 한국에서 그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배후 실력자'로서 활동했고미국과 한국에서 수많은 훈장을 수여 받았다그 훈장들은 그가 흘린 땀에 대한 보답이었을까아니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피의 대가였을까이승만의 반공극우체제는 물론이거니와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독재와 50년간 이루어졌던 민간인학살의 핏방울이 그가 뿌려 놓은 유산이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얘기일까?

1981년 7월 1일 군사고문직을 떠나면서하우스만은 한편으론 "긍지를 느꼈지만사랑을 키워온 한국과 친구들을 떠나면서 매우 큰 슬픔을느꼈다고 한다그가 느낀 긍지는 무엇이고그에게 한국은 무엇이며 그의 한국인 친구들은 누구였을까?

하우스만은 1987년 영국 테임즈 텔레비젼과의 인터뷰에서 카메라가 꺼지자 한국인을 가리켜 "일본인보다 더 나쁜' '야비한 놈(brutal bastard)'이라고 하였다그가 몇 십년 동안의 한국생활에서 드러내지 않았던 인종주의적 편견이 백인의 카메라 앞에서 솔직하게 발설되었던 것이다한편 그는 이런 야비한 한국인에게 "처형된 시체에 가솔린을 뿌리는 방법과 그렇게 하여 공산주의자 처형방법과 비난을 은폐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에 대해서는 긍지를 느꼈다백색 미국인으로 야비한 황인종의 나라 한국에 와 적색 공산주의자의 씨를 말리는 법을 가르쳐 준 하우스만그는 부시가 태어나고 주지사를 지냈던 남성의 고향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1996년 10월에 죽었다.



출처: http://doradobi.tistory.com/3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