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음악

로리타 (Lolita, 1997)

코알라 아빠 2017. 5. 26. 12:24

 

 

로리타

Lolita, 1997 



1955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판되어 화제가 되었으나, 파격적 소아성애 묘사로 인한 외설 논란이

일어 다음해에 판매 금지된다. 그러다 1958년 미국에서 재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파리 출신으로 문학 강사인 37세 중년 남자 주인공 험버트는 미국 뉴저지에 방을 얻어 생활 하던

중, 하숙집 여주인 '샬로트'의 열두 살 난 외동딸 '롤리타'의 야생마 같은 말괄량이 이미지에 처음

본 순간부터 기묘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녀의 곁에 있기 위해 샬로트와 결혼한다.

 

어느날 우연히 남편인 험버트의 일기를 보고나서 롤리타에 대한 남편의 마음을 알게 된 샬로트는

충격을 받아 밖으로 나가다가 교통사고를 일으켜 죽는다. 험버트는 롤리타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한다. 그러나 롤리타는 험버트의 병적인 애착에 염증을 느껴 다른 남자(퀼티)와 도망치고 3년의

추적끝에 험버트는 롤리타를 가로채 간 퀼티를 찾아내어 살해하고 투옥된다. 험버트는 복역 중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사망하고, 롤리타 또한 그 한달 후 딸을 사산하고 자신도 죽고 만다.

 

이 충격적인 소설은 어린 소녀, 작은 요정들에 대한 성적도착증()을 다룬 이야기로

님페트, 롤리타 콤플렉스, 롤리타신드롬이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https://youtu.be/b6QtURKYYbA

parla piu piano katherine jenkins

 

"그녀의 애칭은 '로'. 키는 145cm. 양말은 한 쪽만 신었고 별명은 롤라. 슬랟스를 입었고 학교에선 '돌리'

호적상 이름은 돌로레스. 내 품에 안겼을 땐 언제나 로리타였죠."

 

험버트가 소아성애자가 된 계기는 퍽 구구절절하다. 14살 때 만난 첫사랑 소녀를 잊지 못한 험버트.
그는 첫사랑 소녀가 죽은 순간을 영혼이 얼어버렸다고 표현한다. 애틋한 사연을 가졌다고 허용될 욕망도

아니건만, 그의 욕망을 설명해내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이토록 구구절절한 사연이 필요하다.
우리가 모든 비정상을 옹호하거나 합리화하려 애쓸 때처럼 말이다.

 

인간이라면 응당 싱그럽게 어리고 미학적인 것을 추구하기 마련인가보다.
여느 철학자들이 수 없이 이야기했듯 이 미학이라는 것은 지독히도 주관적이라, 통념적인 잣대를 들이밀기가 꽤 어렵다.

험버트의 욕망은 한 때의 치기라고 단정 짓기에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은밀하다.


여기서 우리는 정서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이 일치할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러니까, 사랑에도 종류가 있고 정도와 선이 존재한다는 것.
그 선을 밟아버린 롤리타와 험버트는 이미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둘은 일반적인 연인같은 프로세스를 거친다.
섬짓한 압박감을 느끼고 서로의 존재에 대해 불안해하고 성적으로 탐구하는 그런 과정들 말이다.
그것도 고작 열 네살 짜리 소녀와.

 

과거에 친구들과 로리타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다.
그때 나는 어쩌면 그것이 젊은 것에 대한 동경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다.
잘 설명하면, 모든 죽는 것들이 가진 사명 같은 것 말이다.
내가 가졌었지만 지금은 소유하지 못하는 젊음. 그 입이 찢어지도록 웃을 수 있는 싱그러움에 대한 동경 혹은 질투. 그런 것들이 사랑으로도 치환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어리석었다. 사랑의 시작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그저 본능적인 것.

본인 주체에 대한 성적 정체성이라든가 이성을 볼 때 더욱 신경쓰는 취향이라든가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마음이 없다.
하지만 이건 정말 다르지 않은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미성숙한 대상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 정말 범죄행위인가 이제 헷갈릴 지경이다.
이 영화를 괜히 본 걸까.

 

팔다리가 잘린 인형이라든가 어린 소녀같은 옷차림 혹은 여린 사지같은 것들은 로리타를 표상한다.
이 때문에 때로는 어린 소녀를 사랑하는 성인 남성의 심정은 지배욕이나 정복욕과도 닮아있다 느꼈다.
온전히 한 인간이라는 개체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마음이 로리타와 평행이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 정서는 꽤 심오하게 넓은 듯 하다.
대체 이해할 수 없다. 겪어보지 못했기에.


 

그럼에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건, 이 비주류의 것들을 수면 위로 굳이 끌어들이는 예술가라고 자칭하는

부류들은 예술가가 아니라는 것. 언제부터 예술이 변명의 구덩이가 되었던가.
예술이라는 구덩이를 미리 파두고 사회에 지뢰를 던져둔 후 자신은 그 구덩이 속으로 쏙 들어가버리는 것.
언제부터 이처럼 무례하고 무책임한 것이 예술이었던가.

 
그저 단순히 낮은 차원의 형태에서 미학적이라는 이유만으로 포장되어 팔릴만한 범죄는 있어선 안된다.

제발 책임감 좀 가졌으면.
그런 작은 무신경들이 사회의 다수의견을 형성한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공인이라면 더욱.


로리타에 대한 험버트의 엇나간 소유욕은 점점 히스테릭해진다.
그는 스스로가 온전히 소유할 수 없는 로리타 주변의 것들을, 아니 로리타의 삶마저 망가뜨리기에 이르고,

이런 부분에서는 오히려 험버트가 로리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미숙하다.
사람은 왜 대체 모든 부분의 성장이 일정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가.


오랜 시간 후 험버트는 로리타를 찾아갔고, 뼈에 사무치게 통감한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로리타를 사랑했노라고.


로리타는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퀼티는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한 남자였죠."



키스도 하고 몸도 섞고 그토록 오랜 시간 함께한 험버트가 아닌 성불구자 퀼티.
여기서 감독은 관객에게 이야기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오로지 육체의 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로리타는 왜 험버트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오랜 시간 따라다닌걸까.

탈출을 꿈꾸다가도 곧 돌아와서는.


영화 <은교>에서 은교와 서지우의 정사신 장면에서 은교와 서지우가 나누는 대사는

정사신 그 자체보다 강렬하다.


"여고생이 왜 남자랑 자는 줄 알아요?"
"너 나 좋아해서 그러는 거잖아."
"외로워서 그래요. 나도. 외로워서."


어쩌면 모든 것은 인간이 떼어낼 수 없는 본질적 외로움 탓일지도 모른다. <어느 블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