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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여러 경전들

코알라 아빠 2019. 4. 3. 17:32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舍利子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불증불감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密多 故心無罣碍 無罣碍 故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依般若波羅密多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의반야바라밀다 

 

故得阿褥多羅三藐三菩提 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불교의 여러 경전들>

 

1.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수백 년에 걸쳐서 편찬된 대승불교 반야사상(般若思想)의 핵심을 담은 경전으로, 그 뜻은 ‘지혜의 빛에

의해서 열반의 완성된 경지에 이르는 마음의 경전’으로 풀이할 수 있다. 심(心)은 일반적으로 心臟으로

번역되는데, 이 경전이 크고 넓은 반야계(般若系) 여러 경전의 정수를 뽑아 270자로 응축한 것이다.

한국불교의 모든 儀式 때 반드시 독송되고 있으며, 불교의 모든 경전 중 가장 짧은 것에 속하며, 중심

사상은 ‘空‘, 즉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는 뜻에서 시작하여 물질적인 존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변화

하는 것이므로, 현상으로는 있어도 실체, 주체, 自性으로는 파악할 길이 없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玄奘 스님의 한역본이 가장 많이 읽힌다. ‘色卽是空 空卽是色’은 산스크리트 본을 그대로 번역하면

“현상에는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현상일 수 있다.”가 된다. 현상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것이므로 변하지 않는 실체란 있을 수 없고, 또 변화하기 때문에 현상

으로 나타나며, 중생은 그것을 존재로써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다.

 

四諦, 八正道, 五蘊, 十八境界, 十二緣起, 智와 得, 일체의 관념과 객관적 존재를 본질적인 관점에서

‘空無’라고 갈파한 이 경전의 입장을 단순히 ‘虛無’라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것은 관념과 객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잘못된 견해이다.

 

‘반야바라밀다’나 ‘空‘은 개개인의 참된 마음이다. 걸림이나 공포가 없고, 교만치 않으며, 영원히 맑고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마음이며, 부정을 겪어 그것을 넘어선 대 긍정의 마음이다. 여기서 평화와

통일, 자유와 해탈이 모두 유래됨을 이 경전을 통하여 자각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경전은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 사바하’라는 眞言으로 본문의 내용을 총괄적으로 나타내면서 끝을 맺는다.

 

 

지난날 진언은 그 신비성을 깨뜨릴 우려가 있다고 하여 번역하지 않았으나, 인도의 제바보살(提婆菩薩)

은 “간다간다. 저쪽으로 간다. 결정코 피안에 갔다. 道心 있는 중생이여.”라고 번역하였다. 版本으로는

고려대장경 반야부에 있는 것이 대표적이며, 세조 때 刊經都監에서 번역 간행한 般若波羅蜜多心經諺解

1권 1책이 널리 알려져 있다. 산스크리트 원본은 대본과 소본이 있는데, 모두 일본에만 남아 있다.

 

2.『유마경』(維摩經詰所說經)- 부처님의 在家 제자 ‘유마’ 거사가 병들어 집에 있는데, 문수를 비롯한

부처님의 제자들이 문병 가서 어떻게 해서 아프게 되었느냐고 물어본다. 그는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자기도 아프다고 대답한다. 일체가 不二임을 강조한다. 유가는 여러 면에서 부처님의 출가 제자보다

더욱 훌륭함을 보였다. 재가 수행을 좋게 본다는 점 때문에 특히 중국에서 환영 받던 대승 경전이다.

 

3.『능가경』(楞伽經)- 특히 意識의 문제를 깊이 다룬다. 의식만이 실재라는 唯識, 모든 개별적 의식의

기초가 된다고 믿는 아뢰야식(阿賴耶識),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여래장(如來藏) 같은 사상이 강조

되어 있다. 인도 유가학파나 중국의 유식종 뿐 아니라 선불교 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준 경전이다.

 

4.『법화경』(妙法蓮華經)-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으로 아라한, 연각(독각), 보살 등 여러 가지 구별이

있지만 이는 오로지 일시적 방편일 뿐, 모두 부처님 수레 하나로 귀일되고 이를 통해 모두가 성불

한다는 생각을 강조하고 있다. 一佛乘, 方便 등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비유를 쓰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불타는 집'(火宅)이다. 동아시아에서 천태종이

받드는 경전이다. 특히 일본日蓮宗 계통의 創價學會(소오카가카이)나 入正佼成會(릿쇼오고오세이카이)

에서는 이 경의 題目(다이모쿠)을 일본 발음으로 하여 '나무묘호렌게교'하면서 염불 외우듯 외운다.

이 경전을 영어로는 줄여서 보통 ‘Lotus Sutra’라 부르고 있다.

 

5.『정토경』(淨土經)-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긴 버전과 짧은 버전 두 가지가 있다. 한문 번역으로는

긴 버전은 ‘대무량수경, 짧은 것은 아미타경(阿彌陀經)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이 경에 의하면,

다르마카라(法藏)이라는 보살이 서방 극락 정토에서 아미타불이 되었다. 이 아미타바(無量光) 혹은

아미타유스(無量壽) 부처님의 원력에 의지해서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 경은 ‘관무량수경’과 함께 ‘정토삼부경’을 이루어 중국 정토종이 받드는 소의(所衣) 경전이 되었다.

 

6.『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특히 만물의 상호연관성과 의존성을 강조하고 이를 볼 줄 아는 것이

바로 자유를 얻는 길임을 역설한다.『화엄경』의 마지막 장(한문 불교 경전에서는 각 장을 '品'이라

부른다.)인 "입법계품(入法界品)"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전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善才童子가 53명의

스승을 찾아가 진리를 구한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일본에서 新幹線을 설치할 때 열차 역을 53개로

한 이유이다. 이 경전은 중국 화엄종이 받드는 기본 경전이다.

 

7.『열반경』(大般涅槃經)- 팔리어로 된 부파불교의 Mahāparinibbāna-sutta와 다른 대승 경전이다.

전자는 역사적 부처님의 입멸을 전후한 사건을 객관적으로 기술한데 반하여 이 대승『열반경』은

부처님의 우주적 의미 등 대승의 교리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천태종은 이 경전이 『법화경』

과 함께 부처님이 최후로 가르친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불교 경전들은 주로 기원후 100 ~ 400년 사이에 생긴 것이지만 그 후 8세기까지도 계속해서

이런 경전들이 나타났기에 이 외에도 많은 경전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경(經, sūtras)으로서 모두

부처님이 그 일생 중에 직접 한 말씀을 모은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렇듯 후대에 나타난 것은

그 동안 어디에 감추어져 있다가 다시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경전들은 자연스런 역사의 물결을 따라 각 시대에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 여러 불교 사상을

새롭게 표현하기 위해 새로이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들이다. 물론 이렇게 역사적 부처님과 직접 관계

없이 생긴 대승경전도 ‘여시아문’으로 시작하여 아난다가 부처님께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이것들은 후대 사람들이 '위조'한 경들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런 경우 이른바 "경건한 위조"(pious fabrications)라 하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종교가 역사가

아닌 이상 이런 특수 기법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불교 학자들이나 건실한 불자들 중에

대승 경전에 나온 부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기원전 6세기 부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라 우기며

그 역사성을 고집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기독교 복음서에 예수님의 말씀으로 나오는 모든 표현들이

그대로 예수님이 직접 하신 예수님의 말씀(verba impssima)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훌륭한 태토가 아니겠는가?



<해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제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조견오온개공의 다음에 등장하는 문장이 도일체고액度一切苦이다. 

 

도일체고액은 현장(602-664)과 구마라습(344~413)의 번역본에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시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하지만 에드워드 콘체나 쥬이오 이나가키가 번역한 영어심경에는 도일체고액을 찿아볼 수 없다.

 

심경을 영어로 번역한 이 두 사람은 산스크리스트어 원본에 없는 도일체고액을 번역해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구마라습이나 현장과는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근거가 된다.

 

인도인으로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구마라습과 손오공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서유기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삼정법사 현장은 심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도일체고액을 의도적으로 첨가한 것이다.

 

구마라습은 인도 사람이었고 산스크리스트어를  알고 있었으며 중국인보다 한문에 능통했다는 천재로서 도일체고액이 심경의 원본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구마라습보다  250 후의 사람인 현장도  15년을 인도에 머물며 공부한 사람으로서 산스크리스트어로 심경과 구마라습의 번역본등 다양한 자료를 비교하고 검토하였을 것이다그리고 심경의 원본에 도일체고액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을 것이다.

 

원본에도 없다는 도일체고액이 구마라습과 현장의 한문번역본에 모두 들어 있는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觀世音菩薩 行深般若波羅蜜時 照見五陰空 度一切苦厄 : 구마라습(鳩摩羅什344~413)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현장(玄奬;602-664)

 

                                     

구마라습이나 현장이 활동하고 있었던 1500-17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은 공도 아니고 무아도 아니다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소원하는 것은 잘 먹고 잘 살다가 잘 사는 자손을 남겨놓고 고통없이 죽는 것이고 죽은 후에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모습으로 환생하거나 아니면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으로 가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불노장생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이 땅에서 주어진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만이라도 모진 고생하며 살게 되지 않기를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을 누구나 가지게 되는 것이다.

 

구마라습과 같은 천재가 원본에도 없는 이 구절을 추가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었을 것이다아직 불교의 기본도 모르는 중국 사람들에게 아무리 친절하게 공을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이 낯설고 까다로운 지혜의 말씀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공을 깨우치기만 하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지긋지긋한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못한다거나 생사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종교는 그 생명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지금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는 물론이고 중소형 도시와 외진 산골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의 골목 길 하나에도 서너개의 크고 작은 교회가 신도를 유치하기 위하여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을 정도인 것이다.

 

사찰은 신도 유치를 위한 경쟁을 하지는 않지만 어찌되었든 사찰이나 교회를 찿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의 행복과 구원 그리고 내 것의 확장과 보존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다.

 

산중의 사찰을 찿아가 공과 무아의 지혜를 공부하는 것 보다는 자신의 행복과 발전을 기도하는 것이 신앙의 주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교회를 찿아가 철야 기도를 하는 사람들도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을 통하여 신과 하나가 되려는 기

도를 하는 대신에 현생에서의 행복과 사후 구원을 약속 받기 위하여 오늘도 무릅을 꿇는다이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것이 바로 현상세계를 움직이는 마야의 힘(Leela of Maya.幻影)이기 때문인 것이다.

 

몸과 마음을 나의 실체로 동일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원죄이며 마야의 유희이다그리고 그 거짓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해방이요 해탈이며 구원이다그렇다면 자유란 세상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나라는 관념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무엇때문에 마야의 유희가 작동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공은 상대가 끊어진 절대적 상태이므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인식이 가능해지려면 본래

하나인 절대적 상태가 인식의 주체인 나와 인식의 대상인 너로 나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마음의 창을 통하여 바라보는 언어적인 설명일 뿐이다.

 

왜냐하면 우주는 자유로운 어떤 원리의 나툼이자 표현이기 때문이며 그 안에 있는 그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기 때문이

그래서 마하라지는 우주가 이대로 존재하는 것은 우주가 이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라는 무원인적인 것으로서의 우주

의 존재성을 설명한다.

 

무원인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원인이라는 뜻이 된다그러므로 한 사람이 공의 지혜를 깨우친다는 것은 그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분석을 통하여 공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없다과학은 오직 보이는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현대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지의 경계를 조금씩 밀어내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개체로써의 행복과 구원을 기도하지만 내가 누군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나의 행복과 구원을 기도한다는 것은

그다지 지혜로운 일은 아니다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비로서 나를 위한 기도가 가능해진다.

 

하지만 평범한 일반인들에게 공과 무아를 이야기하는 것은 여전히 부질없는 일이다.

 

누구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령 누군가 그 이야기를 듣는다 해도 공과 무아에 대한 내용을 개념으

로나마 이해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과 무아를 이야기하다 보면 중도.사성제.팔정도.삼법인.육파라밀.연기등이 함께 나타난다현기증이 날만도 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식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공이라는 뜨거운 난로 위에 떨어지는 눈처럼 녹아버린다.

 

              여든 일곱 생을 살았던 사연이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일어나는 것과 같구나.

              횡설수설했던 그 모든 일들이’

              붉은 난로 위에 떨어지는 한 점의 눈이다.

 

-춘성스님(1891-1977)의 열반송-

             

한국 불교는 간화선(看話禪화두를 들고 존재의 근원을 참구하는 수행법)을 가장 뛰어난 수행법으로 인정한다경전공부

나 염불수행등의 다른 수행법들을 비교적 낮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도의 라즈니쉬가 붓다나 예수와 같은 분이라고 극찬한 라마나 마하리쉬(Sri Ramana Maharshi: 1879-1950)

상생활을 하면서도 “내가 있다” 또는 “나는 누구인?”라는 의문을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지혜를 체

화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가 아루나찰라 산 기슭에 자리한 아쉬람에 머루르고 있었을 당시에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바라보는 힘(다르

Darshan)만으로 자신을 찿아온 사람들의 내면을 변화시켰다고 전한다.

 

신이 나를 바라보고 내가 신을 바라보는 상서로운 시선의 교류를 통하여 개체로서의 나라는 생각이 사라지게 되고 궁극적

으로는 신과 내가 합일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별한 것은  라마나 마하리쉬가 가장 자애로운 눈길을 보낸 사람이 어렵사리 그를 찿아온 불가촉 천민출신의 한 가족이

었다어느 날에는 아쉬람에서 오랫동안 살던 소가 죽게 되자 소의 가슴과 이마를 짚어 다시는 몸을 받아 태어나지 않도록

기도하고 나서 “이 소로 인하여 우리 아쉬람이 이만큼 성장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고 한다.

 

                                     

바라보는 주체와 대상이 하나라는 자각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신성을 바라보는 행위만으로도 내면을 정화시킬 수 있다는 사례를 보면 수행법의 우월성을 서로 다투는 것은 부질없는 일

이다.

 

인연에 따라 다른 길을 걸을 수도 있다반야를 공부하기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그래서 어떤

사람은 절대신을 믿으며 신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고 믿는 것이 헐씬 좋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배가 아파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 산에 올라가 이런 저런 약초를 구한 다음 이것 저것을 넣고 서너시간동안 다려서 먹으면 점차 좋아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지혜롭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차라리 효과가 검증된 소화제를 구입하여 아픈 사람의 손에 쥐어 주는 것이 낫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절대신을 믿고 절대신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타력신앙과 달리 불교는 철저한 자력신앙을 바탕으로 삼고 있으므로 사찰은 신도 유치를 위한 별도의 홍보를 하지 않고 있으며 오직 스스로 찿아오는 인연에 의지하는 포교방식을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뛰어난 학승이자 선교사이며 번역가인 구마라습은 이러한 상황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그리고 인도에서 건너온 낯설고 특

이한 종교를 중국 사회에 전파하려면 그 핵심인 공과 무아를 빼놓을 수는 없지만 중국사람들의 이목을 단번에 끌어낼 수

있는 특별한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찿아낸 것이 바로 도일체고액이라는 문장이다이 문장을 심경의 핵심인 조견오온개공 바로 다음에 배치함으로

써 구마라습과 현장은 마침내 자존심 강한 중국인들의 가슴에 공이라는 지혜의 씨앗을 뿌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종교라 할지라도 기도하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다거나 사후 구원을 약속해 줄 수가 없다면 지금처럼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불교 역시 기복신앙이나 인과구원천도업장 소멸그리고 윤회론등을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공과 무아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면 오늘의 그 모습은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구마라습이나 현장과 같이 삼장(..)에 능통한 수행자들이 원본에도 없는 도일체고액을 추가한 행위를 비판하면서 심경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 번역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도일체고액이 불필요한 사족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본의 고졸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망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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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움 시대의 관점으로 1400-1700년 전의 상황을 일방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그다지 지혜롭지 않은 일이다구마라습과 현장의 심경에 등장하는 도일체고액은 중국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구마라습과 현장은 공이라는 지혜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달콤한 박하사탕을 하나씩 나누어 주고 있는 셈이다그리고 그 달콤한 사탕이 사람들의 입 안에서 녹아 없어지기 전에 폭포수와 같은 말을 쏟아낸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

 

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唾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圭碍 無圭碍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多羅三三菩提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약삼보리

 

불경이란 부처님의 말씀을 모은 것인데,  원래의 형태는 구전에 의한 전승이었습니다. 모든것을 기록하는 중국과는 

달리 인도의
전통은 암송을 통해 구전으로 전해내려오는 형태죠...그래서 불경은 암송하기 쉬운 형태로 짜여져 있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불교의 모든 경전 가운데 가장 짧은 경전입니다...그러나 대반야경 6백권의 방대한 사상이 요약되어 있고 

불교의 모든 의식
에서독송되고 있습니다원명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인데지혜의 빛에 의해 열반의 완성된 경지

에 이르는 마음의 경전으로 풀이됩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내용을 용어들 중심으로 조금만 살펴보면....

먼저 제일 처음에 나오는 Aryalokiteshvara Bodhisattva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지고 명호가 불리우는 

관세음보살
입니다...제일 처음에 나오는 Ary는 성스럽다는 뜻이고 뒤에 나오는 alokiteshvara는 관세음의 원래 
범어 이름인데,
뜻은 세상의 모든것을 보고 듣는다는 말입니다...그것을 중국에서 관세음이라고 뜻번역을 한것

이죠. 그리고 Bodhisattva는
Bodhi(體)+sattva(깨달은)로 풀이되는데 이것을 중국에선 보살로 음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svabhava는 사바와라고 읽는데, 이것은 중국어로 自性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고유한 성질을 지닌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물은 얼음이 되든 물이든 수증기든 그 본질이 물이라는 그 어떤 고유성질을 지닌것임에 틀림이 없죠....

그리고 Annutara-Samyak-Sambodhim는 금강경에서 그대로 '아뇩다라샴막삼보리'라고 음역을 했는데 뜻번역으로 

하면 무상정등각
즉 위없는 바른 깨달음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반야심경에서 가장 유명한 주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는 것이 있죠...흔히들 

신묘한 주문으로 알고 
뜻도 모른채 암송을 하곤 하지만, 원래는 범어를 그대로 음역한 것으로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강을 건넜다'즉 이미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의미.

관세음 보살과 '사리푸트라(사리자)"라는 부처님 제자가 등장하는 이 경전은 '관세음 보살'이라고 

알려진 '관자재 보살'의 오온에 

공함에 대한 법문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스크리트어 버전으로 된 이 반야심경 독송은 우리네 절간에서 들려오는 염불소리와는 또다른 느낌을 줍니다.

붓다가 사용하던 언어로 된 이 독송...어쩐지 붓다의 음성을 직접 듣는듯한 느낌으로 들어보세요^^

 

 

 

 <Prajna Paramita Hrdaya Sutram ; 프라ㅈ냐 빠라미타 흐리다야 수트람>


Aryalokiteshvara Bodhisattva gambhiram Prajna Paramita caryam caramano, 
아랴알로키띠슈와라 보디샅트와 감ㅂ히럄 프라슈냐 빠라미따 챠럄 챠랴마노

vyavalokiti sma panca-skanda asatta sca svabhava sunyam pasyati sma. 
뷔야왈로키티 스마아 판챠-스칸다 아쌑따 ㅅ챠 스왑하와 슌니얌 빳샤띠 스마

Iha Sariputra, rupam sunyam, sunyata lva rupam, 
이하 샤리쁘츄라 루팜 슌얌 슌니야따 이와 루팜,

rupa na vrtta sunyata. Sunyataya na vrtta sa-rupam, 
루파 나 위르타 슌니야타 슌-야타야 나 윌따 사루팜

yad rupam sa-sunyata, yad sunyata sa-rupam. 
얃 루팜 사-슌니야타 얃 슌니야다 사-루팜

Evam eva vedana, samjna, sam-skara vijnanam. 
이밤 이바 비댜나, 삼냐 , 삼-스카라 비ㅈ냐남,

Iha sariputra, sarva dharma sunyata laksana. 
이하 샤리부트라 살바 다르마 슌니야타 락쟈나

Anutpanna, aniruddha, amala, a-vimala, anuna a-paripurna. 
아눗빠나 아니루댜(디햐) 아말라 아-비말라 아누나 아-빠리뿌르나

Tasmat Sariputra, sunyatayam na rupam. 
탓스맡 샤리부트라 슌니야따얌 나 루팜.

na vedana, na samjna, na sam-skara, na vijnanam. 
나 비댜나, 나 삼냐, 나 삼-스카라, 나 비냐남

na caksu, srotra, ghrana, jihva kaya ,manasa. 
냐 챡(쟉)서 슈로트라 그ㅎ라나 지ㅎ바 카야 마나사

na rupam, sabda, ghandha, rasa, sparstavya, dharma. 
나 루팜 샵다 간다(갛ㄴㄷ하) 라사 스빨스따뷔야(스파르스타비아) 다르마

Na caksur-dhatu, yavat na manovijnanam-dhatu 
나 챡숴 다ㅎ투, 야와앝 나 마노비냐남-다ㅎ두

Na avidya, na avidya ksayo, 
나 아비디야, 나 아비디야 ㅋ챠요,

yavat na jara-maranam, na jara-marana ksayo. 
야왓나 쟈랴-마라남, ^ 나쟈라 마라나 ㅋ쟈요

Na dukha, samudaya, nirodha, marga. 
나 두ㅋ하 싸무(머)다야, 니로ㅎ다, 마르가

na jnana, na prapti, na abhi-samaya. 
나 냐나, 나 쁘라쁘띠, 나 아ㅂ히 사마야.

Tasmat na prapti tva Bodhisattvanam, 
탓스마 나 프랍쁘띠 ㅌ바 보디삿바남,

prajna-paramitam a-sritya vi-haratya citta avarana, 
프라슈(즈)냐-빠라미땀 아-슈리탸 뷔하럍탸 칱따 아와랴나,

citta avarana na sthitva, na trasto. 
치따 아와랴나 나 싵히(ㅂ)와, 나 트라스토

vi-paryasa ati-kranta nistha nirvanam. 
뷔-파리야사 아티-크란다 니쉬ㅌ하 닐와남.

Try-adhva vyavasthita sarva Buddha Prajna-Paramitam 
트리-야드ㅎ와 위야와스티ㅎ타 살와 부다 프라슈냐(프라ㅈ냐)-파라미탐

A-sritya Annutara-Samyak-Sambodhim, Abhi-sambuddha. 
아-슈리탸 안누따라-삼약-삼보ㄷ힘, 압히-삼붇ㄷ하.

Tasmat, jnatavyam Prajna-paramita Maha-Mantra, 
타ㅅ스맡, ㅈ냐타뷔얌 프라슈냐(프라ㅈ냐)-빠라미타 마하-만트라.

Maha-vidya Mantra, Anuttara Mantra, asama-samati Mantra. 
마하-비댜 만트라, 아누따라 만트라, 아사마-사마띠 만트라.

sarva duhkha pra-samana satyam amithyatva. 
싸르와 두ㅎㅋ하 프라슈아마나 샅얌 아미티얕와.

Prajna Paramita mukha Mantra 
프라슈(ㅈ)냐 파라미다 뭌하 만트라

Tadyatha,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타디이얕하,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삼가떼 보ㄷ히 스와하


 

성스러운 관자재 보살이 심오한 반야바라밀다의 行을 행하시면서 깊이 살펴보셨나니, 

다섯 가지 무더기(= 五蘊)들이 있어서 그들 고유성질(= 自性)이 空함을 보시었다. 

사리뿌뜨라(사리자)여! 여기서 물질[色]은 空性이고 空性이 바로 물질이다. 

空性은 물질과 별개의 것이 아니고 물질은 空性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물질인 것은 곧 공성이며, 공성인 것은 곧 물질이다. 

느낌[受]과 인식[想]과 심리현상들[行]과 알음알이[識]도 바로 그와 같다. 


사리뿌뜨라여, 여기서 모든 법[諸法]들의 空性의 특징은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부족하지도 않고 가득하지도 않다. 


사리뿌뜨라여, 그러므로 空性에는 물질도, 느낌도, 인식도 없고, 심리현상들도 없으며 

알음알이도 없다. 

눈, 귀, 코, 혀, 몸, 마노도 없고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법들도 없으며 

눈의 요소[眼界]도 없고 내지 마노의 알음알이의 요소[意識界]도 없다. 


사리뿌뜨라여, 그러므로 증득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마음에 장애가 없이 머문다. 마음에 장애가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고 顚倒를 넘어서 

궁극의 열반을 증득한다. 

三世에 머물고 계신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위 없는 

바르고 완전한 보리를 완전히 깨달으셨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반야바라밀은 위대한 주문이고, 크게 신령스러운 주문이며, 

위 없는 주문이고, 동등한 것이 없는 주문이며, 모든 괴로움을 평정하며, 

거짓됨이 없기 때문에 진실하다. 

반야바라밀다에서 [이러한] 주문이 설해졌나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다함께 피안으로 가자! 깨달음을 위하여 스와하! 


 

모두가 나와 세계의 공성을 반복하여 확인하는 말씀이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건이나 현상일 뿐이라는 것 즉 조견오온개공을 반복하여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심경은 공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송두리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허상이라면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몸과 마음도 실체가 없는 것이고 몸의 감각기관을 통한 느낌이나 인식행위 또한 무상한 것이며 그렇다면 생사 또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통찰인 것이다.

 

심지어 심경은 붓다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사성제(四聖諦Catur-arya-satya)까지도 부정하고 나서는 깨우쳐야 지혜도 없고 얻을  있는 지혜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마하라지는 이름과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결코   없다고 말한다그림자가 주체를   없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결코   없다는 것이다.

 

상대성을 바탕으로 접근하려는 방식으로는 절대성을   없다는 것이다찿는 자가 찿는 대상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우리가   있는 일이란 우리가 무엇이 아닌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구마라습과 현장은 땅만 쳐다보고 있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있는 달을 바라보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도일체고액(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이라는 달콤한 사탕을 우리들 에게 건내고 있었던 것이다.

 

     :    사성제(四聖諦 : Catur-arya-satya) 붓다께서 성도하신  인도 바라나시 교외의 녹야원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가르

            치신 .

 

 “ 수행자들이여태어남도 괴롭다늙음도 괴롭다병드는 것도 괴롭다.

   죽음도 괴롭다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일도 괴롭다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도 괴롭다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것도 괴롭다.”

 

  고성제(苦聖諦):     삶을 괴로움으로 인식.

  집성제(苦集聖諦):   괴로움의 근원을 찿아냄

  멸성제(苦滅聖諦):   괴로움을 소멸시키고 열반의 세계로 들어감

  도성제(苦滅道聖諦):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