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란

이슬람

코알라 아빠 2018. 8. 3. 16:20

전세계 70억 인구중 종교인은 40억명 57%다.

70억중 기독교가 24억명 34%다.  기독교를 세분해서 보면, 

카톨릭 (천주교) 13억명, 개신교 (기독교) 6억명, 동방정교회 (러시아 기독교) 3억명

성공회 (영국 국교에서 유래된 기독교) 1억명, 기타 기독교  1억명


70 억중 이슬람이 16억 명으로 23%를 차지한다. 이슬람을 믿는 국가들을 보면,

중동 전지역, 이란,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사우디 아라비아, 예맨, UAE 등등

북중아프리카,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수단등등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자키스탄, 그리고 터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ㄷㄷ, 아프카니스탄, 필리핀, 브루나이, 중국 일부 등등 전세계에 이슬람이 

널리 퍼져있다. 


무슬림은 '순종하는 사람'이란 뜻이며, 이슬람을 믿는 이슬람교도를 말한다. 

기독교 국가가 유럽, 미국, 캐나다, 호주, 한국등 대부분 선진국이고 출산율이 저조한데 반해 이슬람 국가들은 

대부분 못 사는 나라들이고 출산율이 왕성해서 2100년이면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의 숫자가 기독교인 숫자를 

넘어 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외 종교로는 힌두교 8억명 11%, 불교 4억명 6%, 유교 4억명 6%, 유대교 1,500만 명이 있다. 재미 있는 것은 

정령 숭배를 하는 사람들이 1500만명이 있는데 이들은 모든 자연에 정령이 잇다고 생각하고 정령을 믿는다.


우리나라는 종교를 믿는 사람이 50%를 차지하는데 이중 불교 22%, 개신교 20%, 카톨릭 8%를 차지한다. 

상대적으로 종교인이 많은 편이고 그중 개신교 비중이 높다.


AD (Anno Domini) 란 예수 출생 이후 시대를 말하는데,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는 기원전 3~년경에 태어난 

유대인이다. 마리아가 임신한 곳은 나사렛이고, 예수가 태어난 곳은 베들레햄이다. 그 후 나사렛으로 돌아 온 

예수는 이 곳에서 성인이 될 때 까지 생활한다. 그러나 동방박사(조로아스터교 성직자)를 따라 페르시아, 인도

등지에서 성장했다는 설과 이집트에서 자랐다는 설도 있다. 베들레햄이나 나사렛 지방에서 예수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AD 33년 십자가에 못 박혀 사망한지 3일만에 부활한 예수. 기독교에서 '부활'을 빼고나면 종교 자체가 성립이

불가능할 정도로 부활설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 내용이다. 

그 후 로마제국의 탄압 속에서 전도와 부흥에 힘 쓰던 기독교는 서기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으로 공식 종교로 포교활동이 승인이 되고, 14년여에 걸친 종교적 논의를 거쳐 325년 니케아 종교 회의를 

통해 틀을 갖추고나서, 서기 380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정식으로 로마 제국의 국교로 격상된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건국 후 부터 가져 온 다신교에서 1천년만에 일신교로 돌아 선 것이다. 로마가 서기 476년 

멸망했으니 일신교로 된지 100년만에 망한 것이다. 서로마 멸망 후 암흑의 중세가 시작되었고, 기독교와 교황이 

유럽을 지배하는 중세 1천년이 시작된다. 이슬람인 오스만 투르크 술탄 매호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제국 (동로마제국)을 멸망 시킨 것이 1453년이고, 이로서 중세의 기독교에 의한 암흑기가 끝이 난다. 

 

암흑의 중세는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후 100년만인 476년 (기독교의 부흥) 로마 제국이 멸망과 함께 시작 되어, 

동로마제국이 이슬람에게 망한 1453년 (기독교의 몰락) 끝이 났다. 그러나 그 암흑기는 기독교 세계만의 문제다.


AD 380년 로마의 국교로 공식 승인을 받고 세력을 확대해 가던 기독교는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에 이어,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에서 태어난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된 이슬람의 강한 도전을 받는 과정 속에서 1050년 경 

교리상의 불일치로 동방교회와 로마 카톨릭으로 분열하고 만다. 


이슬람은 서기 1099년까지 그 세력을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한다.

이 때 로마 카톨릭과 러시아등 슬라브족의 동방 정교회가 분리된다. 

이슬람의 도전에 위기를 느낀 유럽 기독교는 교황을 중심으로 1096년 십자군을 조성해서 200년간 예루살렘 수복과 성전이라는 기치하에 이슬람과 부닺친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회복했지만 200년간의 8차례의 십자군 전쟁은 결국은 성과도 없이 실패하고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의 손에 들어 간다. 


1517년 종교개혁을 통해서 로마카톨릭과 기독교 (프로테스탄트)가 분리된다.

마르틴 루터가 교회의 부패와 면죄부 판매에 반대해서 95개 반박문을 내면서 교회 제도 개선을 통한 종교개혁을 이끈다. 그는 성경의 권위와 은혜, 믿음만을 강조한다. 이때부터 시작된 유럽의 르네상스는 믿음의 종교 폐쇄성을 타파하고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계몽주의 과학의 시대를 열어간다. 과학과 기술에 개방적이고 도전적인 유럽은 급성장해서 산업화 해외개척 자본화등으로 할렘에서 폐쇄적으로 성장한 술탄의 이슬람과 구중궁궐에서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외부와의 교역을 중단한 중국 명나라를 제치고 전 세계의 주도권을 확보한다. 지금까지는 유럽과 미국이 전세계를 주도해 왔으나 지금은 변혁의 시대다. 중국이 급부상중이고 이슬람도 비록 지금 분쟁 지역이 많지만 발전 가능성도 많고 암튼 관심 지역이다. 


이슬람의 창시자 선지자 무함마드는 570년 메카에서 태여나 632년 메카에서 62세에 사망한 아랍인이다.  그는 상인이고 무역으로 성공한다. 그는 25세에 15살 연상인 40세의 하디자와 결혼한다. 하디자는 부자로 무함마드의 무역 상업을 지원한다. 가브리엘 천사의 나타남과 말씀을 듣고 이슬람을 창시한 그는 622년 52세에 메카 지역 기득권 반대 세력의 탄압을 피해 메디나로 이동한다 이를 헤지라 (성천) 이라고 부른다. 그는 폭력을 피하고 평화적 방법으로 이슬람을 전파한다. 그는 온유하고 배려심이 많다. 여자및 이방인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는 평등주의자다. 624년 메카군의 공격을 격파하고 세력을 크게 확산한 그는 630년 60세에 평화로운 외교 협상을 통해 고향인 메카에 입성한다. 그리고 2년후에 사망한다.


선지자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의 추종자들은 빠른 시간내에 세력을 급속히 확산한다.후계자인 종교 지도자 칼리프를 선출한 그들은 633년부터 664년까지 30년만에 근거지인 메카 메디나 (지금의 사우디 아라비아)를 북상해서 이란, 이라크,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방, 아르메니아등 대부분의 중동 지역을 점령한다. 

661년부터 750년까지 100년간 지속된 최초의 칼리프 세습 왕조인 우마이야왕조는 북아프리카 이집트, 리비아, 튀니즈등 전지역을 점령한다. 이들은 현재 이슬람의 90%를 차지하는 수니파의 본산이다. 이란 (예전의 페르시아) 에 근거지를 둔 시아파는 전체 이슬람의 10% 를 차지하는 소수파이나 현재 IS 등 테러단체의 근간이다. 우마이야 왕조는 711년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 를 점령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진군하다가 푸아티아 전쟁에서 프랑스에 패하고 (당시 프랑크) 서유럽 진출에 실패한다. 


우마이야 왕조를 이은 압바스 왕조는 750년부터 1258년 몽골족에게 망할때까지 500년을 지속한다. 이들은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1099년 예루살렘이 1차 십자군에 의해 점령될 때까지)  200년간 이슬람의 황금시대를 이룬다. 

921년 볼가강 유역의 불가르족이 (지금의 불가리아) 이슬람화되고 (수니파)

960년 중앙아시아 유목민인 튀르크족이 텐산산맥 남북로에서 이슬람화된다 (수니파) 이로써 이슬람의 주력 세력은 초기의 아랍인 (수니파) 에서 이란인으로 (전의 페르시아) (시아파) (이집트도 시아파다) 그리고 다시 튀르크인 (수니파)로 옮긴다.

1071년 아르메니아의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이 빈잔틴군을 격파하자 튀르크족은 자신만만해지고 지속적으로 동로마제국 (비잔틴제국)을 공격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서방 기독교 교황 우르바노를 중심으로 한 십자군이 1096 출병 1099년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200년간의 십자군 전쟁이 계속된다.

1492년 스페인에서는 이슬람 무어인의 최후의 거점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키고 마지막 무슬림을 서유럽에서 쫓아낸다. 

" 알라외의 다른 신은 없다 " 라고 주장하는 무슬림들은 

5세기에서 15세기까지 지속된 1천년의 중세때 지중해에서 해적질에 주력했다.

" 신앙심 없는 개자식들인 기독교인들을 죽여라" 

그들은 지중해 연안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납치와 약탈 그리고 인질 배상금을 받는데 혈안이 된게 당시의 무슬림들이었다. 




불교는 ?

2010년에 MB정부의 사대강 사업에 반대해서 낙동강에서 소신공양 (자신의 몸을 불태워 죽다) 하신 문수스님은 자연과 생명이 죽어가는 것에 분노한 것이다. 독성 조류로 범벅이 된 강은 보로 막힌 수문을 열어야 했다. 


살라딘은 기독교들에게 점령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 영웅으로 칭송된다.

그는 이슬람 국가인 이집트 시리아의 술탄으로서 1174년부터 1193년까지 20년간 재위햇으며 탄생은 1138년 , 사망은 1193년 55세다. 

그는 수니파의 수장으로서 이슬람 세력의 부흥에 성공한 온건하고 자비로운 군주였다. 아유브 왕조의 창시자로서 그는 이집트, 이라크, 메카, 히자즈 (메카를 중심으로한 사우디 아라비아 서해안 일대. 홍해를 ㄸ라 남북으로 수천키로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 예멘등을 통치햇다. 이라크 북쪽 티그리스 강 유역의 고대도시인 티크리트에서 태여난 그는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자랏고 죽음도 다마스쿠스에서 맞이햇다. 그는 당시 세력을 떨치던 튀르크인이 아니고 변방민족인 쿠르드족 출신이다. 

쿠르드족은 소아시아, 페르시아 산악지대에서 목축업을 하던 오래된 역사를 가진 민족이나 한번도 나라를 가진 적이 없는 불행한 민족이다. 그들은 용맹하고 호전적이다. 아랍권을 통일 시킨 살라딘과 800년후 이라크와 아랍권을 분열과 혼란으로 몰아놓은 사담 후세인이 모두 쿠르드족이다.

살라딘은 1187년에 50세에 기독교에 빼앗긴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이에 놀란 서유럽은 부랴부랴 십자군을 편성해서 살라딘을 공격한다.

제3차 십자군 원정은 1189년부터 1192년까지 3년간 지속되었는데 영국왕 사자왕 리처드, 프랑스왕 필리프2세, 신성로마제국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1세 (바르바로사) 가 출동했으나 프리드리히는 노쇄해서 출병 초반에 죽고 필리프2세는 일찌감치 귀국하고 영국왕 사자왕 리처드만이 3년내낸 이슬람군과 싸웠다. 결국에 승패를 결정짓지 못한 리처드는 살라딘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1192년 영국으로 귀국한다. 

리처드가 영국으로 귀국한 다음해인 1193년에 살라딘이 55세로 사망한다.


살라딘은 어떻게 이집트 시리아의 술탄이 되었나 ?

조상의 업이 자손에게 돌아간다. 그니까 열심히 살고 은덕을 베풀면서 살아야한다.

살라딘의 조부 샤디의 친구 비흐루즈는 그리스인 노예 출신인데 페르시아 궁정에서 술탄의 신임을 받아 고위 관리로 근무하고 있엇다. 비흐루즈는 샤디를 티크리트 태수로 임명한다. 

 

샤디의 아들이고 살라딘의 아버지인 아유브가 태수직을 승계받는다. 

아유브는 이슬람의 또 다른 전쟁 영웅인 장기를 만난다.

1138년에 아유브 일가는 티크리트를 떠나 북쪽으로 200KM 에 있는 모술로 이동한다. 이들의 이동은 장기의 탈출을 도운 것도 이유가 되지만 아유브의 동생인 쉬르크가 여성을 폭행한 비흐루츠의 측근을 살해하자 비흐루츠가 이들을 처혛하려해서 도망친 것이다. 모술로 이동전인 1137년에 살라딘이 출생햇다. 

1154년 알레포와 다마스쿠스 술탄인 누르 알딘이 다마스쿠스 점령에 큰 공을 세운 아유브는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임명된다. 17세의 살라딘은 다마스쿠스 궁정에서 25세까지 청년기를 보낸다. 그는 조용한 성격이고 뛰어나거나 특이하지도 않앗다. 

삼촌인 용맹한 장군인 쉬르크가 살라딘을 동직으로 임명한다

살라딘은 30세인 1169년에 이집트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총독이 된다.

살라딘에게는 언제나 행운이 따라서 정적등이 자연사로 사라지곤 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예루살렘 왕 아말리가 이집트를 공격한다. 

그는 1차 십자군의 1세대 영웅이며 초대 예루살렘 왕이 된 보두앵의 아들인 보두앵 3세의 동생이고 보두앵 4세 (문둥이 왕) 의 아버지다. 

당시 이집트는 파티마 왕조 (909년 창건) 시아파 종주국으로서 내부 정세가 안정되었다. 칼리프들은 꼭두각시로 놀고 먹기만 하고 실권은 와지르 (총리)에게 잇었다.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프도 같은 상황) 십자군인 아말리의 공격에 놀란 이집트 총리 샤와르는 다마스쿠스의 술탄 누르 알딘에게 구원을 요청햇고 알딘은 장군 쉬르크에게 출병을 명한다. 1164년 쉬르크는 조카 살라딘을 데리고 출병한다. 이집트로...

이들은 5년간 진흙탕 싸움을 벌인다. 

쉬르크는 이집트 총리 샤와르를 체포해서 처형한다.

이집트 칼리프는 쉬르크를 총리및 사령관으로 임명하나 쉬르크는 2개월후 급사한다. 예루살렘 왕 아말리는 년간 전투후 이집트를 포기하고 돌아간다.

이집트에 남은 것은 살라딘 뿐이다.

살라딘은 30세에 이집트 파티미드 칼리프 아디드로부터 쉬르크의 후계자로 인정받고 와지르 (총리) 직위를 받고 실권을 장악한다. 칼리프는 상징적인 존재로 힘이 없다. 아디드는 20세에 병사한다. 살라딘은 금욕,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핵심 병력을 장악한다. 그는 5만 수단군의 반란을 6년만에 진압한다.

살라딘은 다마스쿠스 술탄인 누르에게 충성하는척하고 이집트를 장악하고 독자적인 입장을 취한다. 살라딘의 아버지 아유브는 충고한다.

" 누르와 무력 대결을 피하라. 이기는 방법은 겸손과 회유뿐이다. 항상 낮은 자세로 임하고 절대로 야심을 드러내지 말라. "

살라딘은 이집트 아유브 왕조를 창시하고 왕이 된다. 술탄. 재물을 부하들에게 나눠준다

그의 눈에 뜨지 않는 성격이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1183년 45세에 시리아 알레포를 점령하고 시리아 술탄을 겸임한다.

1187년 50세에 팔레스타인 북부 티베리아 호수 근처에서 1.2만명의 십자군을 이기고 기독교도에게 뺏긴 예루살렘을 80년만에 탈환했다 

살라딘은 시아파 암살단 Assassin (이집트 파티미드 왕조가 지원) (본거지는 카스피해 남쪽 엘부르즈 산맥의 알라무트성) 의 공격도 피했고 항상 운이 좋앗다.

살라딘은 키가 작고 몸이 약했으나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그들의 모든 요구를 가능란 모두 들어 주엇다. 그는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이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