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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가 내 친 엄마였다니…" 힘든 성장기를 보낸 헐리웃 스타들

코알라 아빠 2017. 4. 30. 11:35

"누나가 내 친 엄마였다니…" 힘든 성장기를 보낸 헐리웃 스타들

 

유년기와 십 대 시절부터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그 덕분에 지금의 성공한

연기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스타들...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은 무엇이었고, 무엇이 그들을

그 고난에서 극복하게 했는지를 살펴본다면 지금의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외할머니를 엄마로, 친엄마를 누나로 알고 살았던 '잭 니콜슨'

 

헐리웃의 대표 연기파 배우 잭 니콜슨의 유년기는 애처로울 정도였다. 그의 모친 '준 프랜시스 니콜슨'은

1937년 10대 시절 무대의 쇼 걸로 활동하다 이탈리아계 미국인 남성과 눈이 맞아 한 순간의 사고로 잭을

낳게 된다. 하지만 잭의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잭과 모친을 모두 버린 채 도망가게 되자, 그의 모친은 잭을

자신의 부모에게 맡기게 된다. 어린시절 외할머니의 손에 길러진 탓에 잭은 자신을 양육해온 외할머니를

친엄마로 알고 지내야 했으며, 친엄마를 누나로 인지하며 자라야 했다.


잭 니콜슨이 자신의 숨겨진 가정사를 알게 된 시기는 1974년, 그의 나이 37세로 [차이나타운]으로 스타급

연기자의 반열에 오른 때였다. 타임지 기자가 그의 가정사의 배경을 취재하다 이같은 사실을 알려지게 된

것. 이러한 슬픈 가정사를 알게 된 당사자인 잭 니콜슨 역시 큰 충격에 빠졌지만, 자신의 안정된 성장을

위해 진실을 숨기며 살아야 했던 어머니와 외할머의 선택을 이해하며 감사함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살인범 아버지 때문에 힘든 시기를 지내야 했던 '우디 해럴슨'
배우 우디 해럴슨은 자신의 개인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과 두 형제를 키우며

고생한 홀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그만큼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깊은 효자지만, 아버지에

대해서는 증오와 안타까움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한평생 그와 형제들을 홀로 키워야만 했던 배경에는 상습 범죄자 였던 아버지 때문이었다.

폭력, 살인을 저지르며 인생을 반을 감옥에서 보내던 그의 아버지 찰스 해럴슨은 1979년 연방법원 판사를

살해한 인물로 유명해졌다. 그 사건으로 그의 아버지는 무기 징역을 선고받게 되고, 흉악범들만이 갇히는

'슈퍼맥스'라는 전문 감옥에 수감되다 2007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우디 해럴슨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가 7살 때 이혼하게 되었고, 감옥에만 오래 갇혀 지낸 그의 아버지의

이력 때문에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해 좋은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 온 살인범의

아들이란 멍에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버지가 남긴 상처에 방황하지 않았던 배경에는 어머니의 지극정성

덕분이었다고 고백하며,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아버지로 부터 상습구타를 당했던 '샤를리즈 테론'

 

미모와 카리스마를 동시에 지닌 멋진 여배우 샤를리즈 테론은 어린 시절 '인간 말종'이라 불러도 무방한

친 아버지로부터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해야만 했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은 없었으나,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는 아무런 이유 없이 샤를리즈 테론과 자신의 아내를 상습적으로 폭행했다. 그럼에도 샤를리즈와

어머니는 그를 아버지이자 남편이라 생각하며 안정된 가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런 와중에도 샤를리즈

테론은 유년 시절부터 남다른 발육과정을 거치며, 촉망받는 발레리나 이자 모델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던 1991년 7월 21일, 아버지가 술에 취한 채 15살의 샤를리즈 테론과 아내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게

되는데. 그 강도가 다른 날보다 너무 심했다. 촉망받는 재능을 가진 딸에게까지 폭행을 가하는 남편에게

화가 난 그녀의 어머니는 참다못해 갖고있는 총으로 남편을 쏘게 된다. 두 모녀를 한평생 괴롭혀온 악마

와도 같은 아버지였지만 이 살인 사건을 직접 현장에서 목격한 그녀로서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곧바로 경찰에 자수한 후 현장에서 체포되지만, 얼마 후 정당방위로 풀려나게 되고,

두 모녀는 이 사건으로 더욱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샤를리즈 테론은 2003년 작품 [몬스터]에서 여성 연쇄 살인범 에일린 워노스를 연기했을 당시 자신의

힘든 과거를 회상하며 "내 인생보다 더 힘든 삶을 산 그녀의 인생을 연기한 덕분에, 과거의 나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15세 부터 소년 가장 이었던 '짐 캐리'

 

최고의 '희극 배우' 짐 캐리도 자신의 십대 시절을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고 회상한다. 회계사였던 그의

아버지가 갑작스레 실직하게 되면서 캐리는 그의 나이 15살에 집을 나와야 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

해야 했던 나이에 그는 어려운 집안 살림을 보태기 위해 학업보다는 생계를 위한 일을 해야 했다. 그러던

중, 일자리를 구하던 아버지가 가족 전원이 들어와 일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타이어 공장 근처의 조그만

방을 얻게 되는데, 졸지에 그를 포함한 삼남매는 그의 부모와 더불어 타이어 공장의 직원이 되버린 캐리

삼남매는 낮에는 학교를 저녁에는 공장에서 일해야만 했다.


캐리는 공장 수위와 심부름꾼으로 일하면서 코미디언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아마추어 코미디언으로 활동

하게 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코미디언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올인하다시피 캐리의 꿈을 지원하게 되고, 결국 16세의 어린 나이에 성공해 20세에

TV 무대에 가지 진출해 어려운 집안 환경을 일으키게 된다.

 

 

 

범죄자 어머니 때문에 교도소에서 태어난 [가십걸] 스타 '레이튼 미스터'
드라마 [가십걸]로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패션을 선보이며 주목을 받게된 레이튼 미스터의 출생은 이와

정반대 였다. 그녀의 부모는 마약 사범으로 교도소에 수감되는데, 어머니 콘스탄스가 복역 도중 임신한

탓에 1986년 레이튼 미스터는 교도소에서 태어난다. 


딸의 유년기를 교도소에 보내게 한 것을 미안하게 느낀 그녀의 부모는 교도소에 나와 레이튼이 자신들과

다른 좋은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게 환경을 바꿔주었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성장하도록 도왔다. 그 때문에

레이튼은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11살 부터 모델 활동을 하다 자연스레

연예계 활동을 하며 지금의 월드 스타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딸의 성공이후 그녀의 어머니인 콘스탄스는 종종 여러 사건사고를 치며 레이튼을 속상하게 만들었는데, 2011년 몸이 아픈 남동생의 병원비에 보탠 금액을 어머니가 쇼핑, 성형에 몰래 쓴 사실이 알려지자 레이튼은 자신의 어머니를 고소하게 된다. 이에 그녀의 어머니 콘스탄스는 "내 딸을 위해 모든것을 다 지원했는데, 경제적인 지원은 커녕 폭행까지 일삼았다" 라며 맞고소까지 하기에 이른다. 레이튼 미스터의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철없는 부모들 때문에 방황기를 보낸 '드류 베리모어'

 

드류 베리모어는 여섯 살의 나이에 [E.T]의 아역으로 출연하며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게 된다.

하지만 소녀는 정작 자신을 낳아준 친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 배우인 아버지 존 드류 베리모어는

딸이 태어나기도 전에 가족을 버리고 떠나갔으며, 엄마는 딸의 인기에 취해 파티와 알코올에 중독되어,

딸의 육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에 여섯 살의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대중과 매스컴의 관심은 어린 드류를 너무 힘들게 만들어

9살에 술을, 10살에 마리화나를, 12살에 코카인에 손을 대다 14살에 자살 시도까지 경험하게 되었고, 십 대

시절부터 재활원 생활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방황하던 드류는 그녀의 대부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대모인 소피아 로렌의 도움으로 친부모에게선 받지

못한 애정과 관심 속에서 방황을 끝낸다. 그 덕분에 그녀는 다시 성인 배우로 돌아와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자신의 자녀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열심히 쏟고 있다.

 

자료참조: therichest.com, fame10.com

가난과 성적 학대로 고통스러운 십대를 보낸 '애슐리 쥬드'

 

원조 미녀 배우 애슐리 쥬드는 유년기부터 가난했다. 컨츄리 가수인 어머니와 언니가 생계를 책임졌지만,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탓에 전기, 수도, 전화 등 공과금을 제 때 못 내 자주 끊기는가 하면 심지어 비누까지

만들어 쓰거나 써야 식료품비를 아끼기 위해 손수 채소를 기르기도 했다고. 그러던 그녀가 남들과 같은 삶을

살게 된 시기는 그녀가 20살이 되던 해로, 어머니와 언니가 뒤늦게 성공한 때였다고 한다.  


십 대 시절 그녀의 시련은 가난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15살 한 남자에게 두 번이나 강간을, 16살에는 다른

성인 남성에게 성추행을, 그리고 가까운 친척에게서 성적 학대를 받았던 그녀는 이러한 고난과 아픔을 대학

시절 공부와 연기에 집중함으로써 극복해 나가 지금의 헐리웃의 스타로 거 듭날 수 있었다고 한다. 


2011년 자신의 불우했던 시절이 담긴 자서전을 출간할 당시 "내 책이 성적 학대를 겪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어 진실을 말할 힘을 갖길 바란다"고 말하며, 성적 학대로 고통받는 이들을 도우려 했다. 

 

 

 

 

총, 마약과 함께 십 대 시절을 보낸 '50 센트'

 

래퍼이자 배우인 그의 활동명 '50 센트'의 유례는 그 누구보다 불우하고 치열한 십 대 시절을 보낸 그의

성장기와 관련 있다. 1975년 뉴욕 퀸스 사우스 자메이카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커티스 제임스 잭슨 3세.

생모는 퀸스의 유명한 마약판매인 이었으며, 잭슨의 유년기에 라이벌 조직에 의해 살해당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십 대 시절부터 마약 판매일을 도왔으며, 총과 마약을 소지한 채로 학교를 오가고 해야 했다. 


유년기부터 십 대 시절까지 총과 마약에 의해 목숨을 위협받았던 그에게 랩은 삶의 낙이었고, 지옥 같은

일상을 벗어나게 해 줄 탈출구였다. 이지 이, 닥터 드레, 아이스 큐브와 같은 래퍼가 되고 싶었다는 그는

1996년 친구와 함께 랩을 연마하며 꾸준히 활동하다 2000년 첫 앨범 'Power Of the Dollar'를 내놓는다. 


래퍼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으며, 범죄와의 인연에 종지부를 찍고 새 삶을 개척해나가던 중, 2000년 5월

할머니네 집으로 가던 도중 한 남자로부터 총격을 당하게 된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혀의 앞부분이

절단돼 일상 대화에서 혀짧은 목소리를 내야 하는 불편을 겪게 된다. 하지만 이 상처는 그만의 전매특허인

어눌한 랩 발음의 기원이 되고, 에미넴과 닥터 드레에게 큰 인상을 남겨, 그들로부터 백만 달러의 계약을

성사시키는 계기가 된다. 


'50센트'라는 활동명은 뉴욕의 유명한 범죄자 케빈 마틴의 별명에서 따왔다. 그와 같은 삶을 살았고,

어감이 좋다는 이유에서 이 예명을 차용했다고 한다. 


성공한 래퍼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최근 과소비, 투자 실패, 법정 합의금 등의 악재가 겹치며 3600만 달러

(한화 약 420억원)의 채무액을 지고 파산했다고 한다.

 

 

망나니 아버지 때문에 힘든 시기를 겪어야 했던 '니키 미나즈'

 

가수에서 연기자로 활동 보폭을 넓히고 있는 니키 미나즈는 유년 시절을 고향인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보내다 5살 때 부모와 함께 미국 뉴욕으로 거주하게 된다. 하지만 뉴욕의 이민 생활에 지친 탓인지 그의

아버지는 마약과 술에 중독되었고, 그로 인한 화를 가족들 앞에 풀었다. 니키 미나즈는 끔찍했던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올 때마다 어머니와 우리 가족은 두려움 속에 살아야 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물리적, 언어적 폭력을 자행하며 우리에게 큰 상처를 안겨주었다."고 말했다.


그 아버지가 미나즈와 오빠가 친구 집에 놀러 간 사이 기어코 일을 저지른다. 홧김에 집에 불을 지른 것.

집이 불타는 와중에도 아버지는 불을 끌 시도도 하지 않았고, 집에 갇힌 어머니는 혼자 불을 끄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겨우 탈출해야 했다. 니키 미나즈에게 있어 지금도 그 순간은 악몽과도 같았다.

 

 

 

 

알코올 중독 부모들 때문에 스스로 성장해야 했던 '데미 무어'

 

데미 무어가 유년시절부터 십 대 시절까지 매우 험난성장기를 보냈다는 건 잏기 알려진 사실이다. 그년의

아버지는 결혼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그녀를 임신한 채 새로운 남자와 재혼한다. 그녀의

시련은 바로 이 계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고정된 직장 없이 여러 직업을 바꾸고 그만둬야 했던 계부는 30

차례 넘게 이사를 가야 했다. 게다가 알코올 중독에 도박 빚이 대추 나무에 연줄 걸리듯 했었다니...


그런데 설살가상 그녀의 어머니도 만만치 않은 알코올 중독자였다는 점. 그러니 무어의 성장기가 온전치

못했으리라는 건 불문가지. 그런데 십 대 시절부터 모델 활동을 해온 무어 덕분에 집안 경제는 그런대로

굴러갔던 모양이다.

 

무어의 친모와 계부는 이혼과 만남을 반복하다 각기 다른 비극을 맞이하게 되는데... 알코올 중독을 극복

하지 못한 채 실패한 삶을 산 계부는 1980년 자동차 배기가스를 들이마시며 자살을 하고, 무어의 어머니

또한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지 못하고 술에 빠져 살다 뇌종양에 걸려 1998년 54세의 나이에 세상을 뜬다.

 

 

 

아픈 과거를 그복한 성공의 상징 '오프라 원프리'

 

오프라 윈프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자 20세기의 가장 부자인 흑인계 미국인으로 꼽힌

오프라 윈프리의 과거사는 그 누구보다 참담했다. 고난과 과거의 아픔을 지니고 성공한 유명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늘 그녀가 첫 손가락에 꼽힌다.


1954년 오프라 윈프리는 미시시피 주의 한 시골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여섯살 때까지 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이후 어머니와 같이 살게 됐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오프라에게 무관심했다. 그러다

잠시 테네시주에 있는 아버지에게 보내져 따스한 보살핌을 받기도 했지만, 다시 어머니와 살게 되면서

혼돈과 방황의 길로 빠져들게 된다.


9살에 사촌오빠로부터 성폭행을 당했고, 14살에 미혼모가 돼 아들을 낳게 되지만, 아들은 2주 후에 죽게

된다. 이후 다시 아버지와 살게 되면서 차츰 안정을 찾기 시작한 그녀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연극부와

토론부에 들어가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아픈 과거를 극복하게 된다.


그러던 중 우연히 라디오 프로에서 일하게 되는데... 열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지역의 저녁 뉴스의

공동 진행자가 되고, 이를 토대로 대학 4학년 때 볼티모어의 방송국 뉴스 앵커로 데뷔한다.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진행이 문제로 인해 앵커에서 해임된 그녀는 대신 방송국이 제안한 토크 쇼를 진행하게 된다. 


누구보다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감성적인 오프라 윈프리에게 토크 쇼는 너무 잘 맞는 분야였다. 그녀의

능수능란한 진행 덕분에 그녀의 토크 쇼는 큰 인기를 발휘하게 된다. 1983년 시카고에서 진행된 그녀의

아침 토크 쇼 '에이엠 시카고(AM Chicago)'는 얼마 되지 않아 시카고에서 가장 인기 있는 토크 쇼가

되었고, ‘오프라 윈프리 쇼’로 이름을 바꾸어 전국적으로 방영돼 전미 최고의 토크 쇼로 자리잡게 된다.  


1991년 오프라는 토크 쇼에서 9살 때 성폭행당한 사실을 공유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해, 2년 뒤 클린턴

정부가 아동 성폭행범의 신상정보를 국가가 기록·공유하게 하는 '오프라 법안'을 제정, 통과시키는 데

기여한다. 2011년 토크 쇼를 마무리한 그녀는 자신의 회사인 '오프라 윈프리 네트워크'와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하포(Harpo)사 운영에 집중하고 있다. 


오프라 윈프리는 1985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컬러 퍼플],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2013), 2014년

화제작 '셀마'의 제작과 조연을 맡는 등 영화인으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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