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칭패(不稱覇: 패권을 추구하지 않는다)" - 모택동(毛澤東 Mao Zedong)과 시진핑
1950년대 마오쩌둥은 “50년 후의 중국은 대국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하였다. 문화대혁명 때는
“불칭패”(不稱覇: 패권을 추구하지 않는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개혁개방을 하면서 중국은
“평화굴기”(平和崛起: 평화롭게 우뚝 선다)와 “조화로운 세계”를 주창하였다. 그래도 오늘날의
중국에는 ‘패권’이란 단어가 늘 따라다니고 있다. 마오가 예언한 50년 후가 되어서일까, 아니면
중국이 정말 ‘패권’으로 나가기 때문일까?
세계 역사를 보면 고대든 근대든 패권에 도전하지 않은 신흥대국은 없었다. 어찌 보면 세계 역사란
패권국과 도전국이 전쟁을 통해 자리바꿈을 해온 역사이기도 하다. 패권은 강대국의 궁극적 목표
이기도 하다. 현대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냉전 시기엔 미국과 소련이 패권을 다투었고, 냉전이 종식된
뒤에는 세계 유일의 초대강국인 미국이 패권을 추구하여 왔다. 신흥대국인 중국 역시 패권으로 나갈
것이라고 예단하는 것은 바로 이 역사 패턴이 관성으로 재현되리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패권이란 한마디로 다른 나라에 대한 통제권과 지배권을 의미한다. 사실 개혁개방 30년 동안의
중국은 이와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중국의 패권’을 운운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중국의 앞날을
지난 역사 패턴에 미리 가두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많은 행위 방식을 패권으로
풀이하려 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중국은 과연 패권으로 나가려 하고 또 나가게 되는 것일까?
이제 시대는 고대 영토를 확장하고 근대 식민지를 쟁탈하던 제국주의, 식민주의 시대가 아니다.
각국의 주권의식이 지금처럼 고조된 적이 없다. 주권은 곧 평등권이고 국제질서이다. 약육강식의
패턴이 이제는 쉽게 통하지 않는다. 거기에 글로벌화, 지역경제블록화가 추세이다. 주권의식의
강화와 글로벌화가 결합되면서 범세계적인 사회화, 민주화가 이루어져 간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제 타국의 주권을 조종하고 통제하며 빼앗던 패권주의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다.
중국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고 있다는 징후는 뚜렷치는 않지만 그러한 의심을 살만 한 사건들이
결코 없는 건 아니다. 패권의 의미를 음미해보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것은 중국만이 아닐
것이다. 다른 신흥국들은 두말할 것 없고 각 나라의 주권의식 고조도 ‘도전’일 수 있다. 글로벌화와
지역경제블록화도 ‘도전’이 될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중국이 패권을 추구한다면 무엇을 얻게 될까? 한마디로 시대에 대한 역행으로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될 것이다. 패권은 결코 중국이 추구하는 패턴이 아니고, 또 아니어야 할 것이다.
세계는 지금 심각한 전환기에 있다. 자원과 에너지 고갈, 환경 오염, 식량 부족, 대량살상무기 문제
등은 이제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거기에 패권이 가세하면 ‘세계의 종말’도 멀지 않을
것이다.
‘패권’은 이제 세계가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이젠 세계적인 문제에 공동 대응
하는 ‘세계체제’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미국과 중국은 이제 이러한 것을 선도해 나가는 책임 있는
주도형 대국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최근 중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신형 대국관계론’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중국은 이제까지의 패턴에서 벗어나 새로운 대국의 길을 찾아
나가려 하는 것이다.
2. ‘북한 붕괴론’과 사드(THAAD, 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고고도 미사일방어 체계)
작금의 한국 주요 언론이 전하는 북한 ‘사태’를 보면 북한은 이미 붕괴 과정에 진입한 듯하다. 박근혜
대통령도 북한의 엘리트층조차 무너지고 있고 심각한 균열 조짐을 보이며 체제 동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지난 8·15 경축사에서는 북한 당국의 간부들과 모든 북한 주민에게 통일 시대를 열어가는
데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한마디로 북한은 무너져가고 통일은 다가오고 있다는 뉘앙스가 풍겼다.
북한 붕괴론과 통일 대박론이 바야흐로 합치되는 느낌이다. 과연 그럴까?
돌이켜보면 북한의 장성택 처형 사건은 박근혜 정부의 ‘신뢰 프로세스’를 말소한 사건이기도 했다.
그 시점에 ‘통일 대박론’이 고고성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남북관계가 대결로 치닫는 시점에서 ‘통일
대박론’은 한국 주도의 통일만이 ‘난마’를 자르는 ‘쾌도’임을 호소했다. 북한이 핵 개발로 체제 붕괴를
재촉한다면서 통일을 강조하는 것은, 그 통일이 화해와 협력에 의한 것이 아님을 표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한국이 선택한 통일의 길은 제재와 압박으로 북한의 ‘폭정’을 종식하는 것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그 제재와 압박의 한끝에 중국이 있다. 한국은 중국이 움직이지 않으면 제재가 밑굽 빠진 항아리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줄곧 중국이 북핵 문제 해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줄 것을 바랐다.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이 동맹국의 고압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천안문 성루에까지 오른 데는 중국의 역할을 이끌어
내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북한이 느닷없이 4차 핵실험을 하자 한국은 최상 관계의 중국이 ‘본격적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다.
북한을 질식시킬 정도의 제재를 바란 것이다. 그렇지만 불과 며칠 만에 한국의 기대는 ‘분노’에 가까
우리만치 ‘실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도입이 거론됐다. 중국을 ‘겨냥’한
측면이 없지 않다. 한·미가 사드 한국 배치를 결정하자 최상이라던 양국 관계는 언제 그랬냐 싶게 급랭
했다. 양국 신뢰 기초가 얼마나 취약한가를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한국이 배치하려는 사드는 북한의 핵 미사일을 방어하는 기능과 한-미 동맹을 강화하는 기능이 있다.
거기에 추가된 것이 바로 중국을 압박하는 기능이다. 사실 그동안 북핵 정국에서 남북간에 균형을 이뤄
오던 중국의 추는 최근 수년간 한국에 기울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사드 문제가 터지면서 중국인들은
압도적으로 반대 쪽으로 기울었다. 중국과 한국 양국 관계의 본질적인 성격이 바뀔 정도로 중-한 관계는
수교 후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결과적으로 한-중 사드 논쟁의 핵심엔 북핵과 북한을 둘러싼 양자 간 인식의 차이가 있다. 한국은 북핵의
궁극적인 해결이 제재와 압박을 통한 북한 정권의 교체나 붕괴에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면서 중국이
한국에 힘을 실어줄 것을 바란다. 중국은 평화·안정, 부전(不戰), 불란(不亂)을 강조하며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주장한다. ‘전쟁 불사’까지 거론하는 한국 일각에서는 고리타분한 주장일 수 있다. 이를 북핵 용인
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중국이 북한을 감쌌기에 이 지경까지 왔다고도 한다. 그래서 사드가 불편하면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없애라고 한다. 결국 중국이 사드의 위협을 받지 않으려면 한국과 함께 북한을 강력
하게 제재하고 압박해야 한다는 논리가 아닌가? 그 끝이 북한이라는 거대한 ‘세월호’의 침몰로 이어진다면
대안은 있는 것일까?
한국의 대북정책은 이제 북한의 ‘체제 붕괴’를 유도하는 쪽으로 기우는 것 같다. 사드도 그런 맥락에서
중국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중-북 관계 70년의 저력을 너무
쉽게 간과하는 것이 아닐까? 다른 한편으로, 필경 중국에 있어 가장 큰 위협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에서
오는 것이다. 사드 문제에서 중-한 갈등과 중-미 갈등이 서로 다른 성격인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3. 동북아의 판도라 상자
근대사 이후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상 동북아에서의 당대 제국인 청-일의 힘겨루기, 러-일의 힘겨루기,
미-소의 힘겨루기는 모두 예외없이 한반도에서의 갈등과 충돌, 전쟁으로 치러졌다. 이제 또다시 미-중의
힘겨루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이다. 공교롭게도 북핵이 몰고 온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정국으로 한반도에 다시 또 지난 역사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 같다.
냉전이 종식된 뒤 동북아에는 두드리면 원하는 것이 나온다는 ‘도깨비방망이’가 출현하였다. 북핵이다.
북한이 그 방망이를 두드리면 원하는 경수로도 나오고 중유도 나왔고 북-미 협상도 나왔다. 미국이
두드리면 원하는 미-일, 한-미 동맹 강화가 나왔고 아시아로의 회귀도 나왔다. 일본은 그 방망이를
두드리며 원하는 ‘군사대국화’를 이뤄왔다. 한국도 지난 10년여간 그 방망이를 두드리며 한국 주도의
통일을 이루려 했다. 그 와중에 북핵은 보면 볼수록 커지는 거대한 도깨비가 되어 동북아 국제정치를
그 프레임에 가뒀다. 남-북 관계, 북-미 관계, 북-일 관계 모두 북핵에 갇혔고 후에는 중국도 가세했다.
어찌 보면 동북아의 협력도 결과적으로 북핵에 의해 동결됐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국 북한과
미국, 여러 나라들이 함께 두드려온 이 도깨비방망이는 사드라는 판도라 상자를 만들어냈다.
사드는 비록 제한적이지만, 한국에 북한의 핵·미사일 방어용임은 틀림없다. 사드의 기능과 역할이 그
뿐이고 남북 대결의 산물이라면 중국은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중국의 시각에서 볼 때
사드는, 미국이 북핵을 컨트롤하며 전개해온 전략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지난 20여년간 미국은 북핵
게임에서 단연 승자가 돼왔다. 북핵이 있었기에 오늘의 미-일 동맹과 한-미 동맹의 전례없는 강화가
있고 아시아 재균형 전략이 있으며 중국에 대한 포위, 견제가 가능했다. 그 절정은 사드를 중국의 턱
밑에 배치하는 것이다. 북한은 승자라고 자처하지만, 결국은 미국 전략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젠 북한이 도깨비방망이를 두드려도 결국은 미국의 전략에 힘을 실어주는 격이 된다.
한국은 사드가 북한 미사일을 막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한다. 그 사드가 북한이 쏘아올린 핵미사일을
막기 위해 발사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북한이 한국과 공멸하려는 시점일 것이다.
사드가 방어하지 못하는 서울은 말 그대로 불바다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사드 배치가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멈출 수 있을까? 결국 한국에 사드의 기능은 실효성보다 상징성에 있고, 한국의 안보
를 위한 한-미 동맹의 강화에 있지 않을까. 혹자는 중국의 북핵 대응에 대한 실망도 한몫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미국에겐 사드의 기능은 무엇일까? 유사시 사드의 기능을 확장하여 중국의 미사일 체계를
무력화할 수 있다. 전시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사드이기 때문이다. 전세계에 미사일방어(MD)
체계를 구축하려는 미국이다. 괌~오키나와~한국을 잇는 엠디 체계를 구축하고 한국을 엠디에 편입
시켜 한·미·일 삼각동맹을 묶으려 한다. 중국의 주변 해역은 이제 재무장하는 일본과 미국의 최신무기
전시장이 돼가는 느낌이다.
미국의 본격적인 중국 견제가 시작됐다. 그 시점에 한국에서의 사드 배치가 이뤄지고 있다. 중국의
우려가 기우일까?
이제 사드라는 판도라 상자가 열리면 동북아의 균형이 깨지고 수십년의 평화가 깨질 수 있다. 동북아
에서 평화가 깨진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반도는 늘 그 진원지이자 피해지였다. 비극은 외적으로는
한반도를 자국의 전략에 편입시킨 대국들의 갈등과 충돌, 그리고 전쟁에 의해 일어났다. 내적으로는
강대국들의 갈등을 이용하려 한 ‘이이제이’ 전략이 한몫을 했다. 곧 강대국들을 ‘협력’과 ‘적대’로 나눠,
‘제1 협력국’과의 관계로 ‘제1 적대국’을 상대하는 식이었다. 근대사 이후 계속돼온 이런 패턴이 이제
더는 재현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진징이(金景一. 1953) 중국 베이징(北京)대 한반도연구센터 교수